로컬 무대, 신진 작가 레벨 업!
양평군립미술관에서 미술대학 연합전 <무엇이 보이는가>(3. 14~5. 10)가 열렸다. 서울, 경기, 인천 소재의 16개 미술대학이 뭉친 대규모 그룹전이다. ‘인지’를 키워드로 예술의 가치와 역할을 묻는다. 유망 작가 59명이 회화, 조각, 설치 등 170여 점의 작품으로 참여했다. 필자는 어려운 미술담론을 친숙하게 풀어낸 전시의 시각적, 구조적 요소에 주목했다. 신진 작가의 무대이자 미술 입문의 길잡이로서 지역 미술관의 가능성을 포착했다.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이미 해석된 세계를 인식한다. 눈앞의 사물을 볼 때 단순히 형태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경험이 겹친 필터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작품 앞에 선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것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 각자의 기억과 감각이 다른만큼, 보이는 세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양평군립미술관의 <무엇이 보이는가>전은 이러한 ‘인지’라는 개념을 신진 작가전이라는 형식에 접목했다. 16개 미술대학의 신진·예비 작가 59명의 작품 170여 점을 ‘인지’라는 철학적 틀로 묶었다. 협업의 과정, 작품의 크기나 완성도 모두 미술관과 참여 작가들의 열정을 드러낸다. 아니, 플랫폼 전시와 기획 전시의 성격을 결합한 것 자체가 상당히 야심 찬 선택이다.
야심이 크다는 것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진 작가전은 본래 동시대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형식에 가깝다. 반면 ‘지각’이라는 개념은 강한 해석의 틀을 요구한다. 플랫폼 전시와 개념 중심 기획 사이에서 긴장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과연 하나의 개념이 서로 전혀 다른 젊은 작가 59명의 작업을 묶을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전시는 단일한 개념과 다수의 작업 사이의 간극을 예상보다 안정적으로 조율했다.
"이걸 보고 계시는 당신만이 기준"
그 열쇠는 주제의 번역 방식에 있다. ‘지각’이나 ‘인지’는 철학적으로 정의된 개념이지만, ‘무엇이 보이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지는 순간, 기획으로서는 훨씬 더 유연해진다. 어떠한 시각 작품도 이 질문 안에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번역은 관람 경험에도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무엇이 보이는가’라는 단순한 질문 앞에서 관람자는 작품 감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작품을 보고 떠오른 것을 그대로 말해도 된다는 일종의 허락이 질문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위축감, 즉 자신의 이해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을 이 전시는 걷어낸다. 이처럼 동시대미술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감상을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은 미술관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지각’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닌 철학적 추상성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전문가라면 모를까, 가까운 미술관을 찾는 지역 주민이 주를 이루는 군립미술관의 특성상 그 개념은 여전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다행히 미술관 측은 이를 이미 의식한 듯하다. 섹션별 도입 텍스트가 친절하게 마련되어 철학적 개념과 관람객 사이의 간극을 확실히 좁힌다. 각 섹션 입구에서 관람자는 짧고 해석 가능한 언어를 먼저 만난다. 이 텍스트는 개별 작품을 설명하지 않는 대신 어떤 방향으로 바라보면 좋을지 제안한다. 예를 들어, 네 번째 섹션에서는 전시품들이 “유명한 이름도, 검증된 경력도” 없는 작가의 작품들이기에 “이걸 보고 계시는 당신만이 기준”이라고 쓰여 있다. 어떤 권위에도 기대지 않은 자신만의 인식이 예술의 기준이 된다는 선언이다. 미술작품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는 안전망을 먼저 제공하는 것은, 공립 미술관이 동시대미술을 접하는 관객들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관용적인 태도가 아닐까.
주제에 걸맞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260cm를 넘는 대형 장지 위에 그물창과 그 너머의 풍경, 창살에 맺힌 물방울과 곤충을 그린 최재성의 <Droplets on the Bar>가 그렇다. 배경의 숲은 흐릿하게 번져있고, 물방울과 그 안에 비치는 곤충은 또렷하다. 그물창의 격자는 우리가 세계를 볼 때 항상 어떤 틀을 통해 본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본다는 것이 곧 이해라는 착각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작품도 있다. 윤혜란의 <식물도감> 연작인데, 제목부터 일종의 함정이다. 도감이라는 단어는 정확한 분류와 기술을 약속하지만, 그림 앞에 서는 순간 그 약속은 철회된다. 대나무처럼 생긴 줄기에는 붉은 천이 감겨 있고, 왼쪽 위의 형체는 새로 보이다가 꽃으로 보이다가 결국 어느 쪽도 아닌 채로 남는다. 보면 볼수록 확신했던 것들이 하나씩 흔들린다. 이 외에도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배치한 작업, 여러 의미로 읽히는 설치, 컴퓨터 게임이나 가상 공간을 호출하는 인터랙티브 작업처럼 관람객의 적극적인 보기를 요청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서로 다른 매체와 형식을 사용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관람자의 인지적 개입을 요구한다.
물론, 59명 참여라는 규모에서 그 요구가 얼마나 일관되게 전달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전시의 주제와 합하는 작품도 여럿 있었지만, 단일한 개념과 다수의 작가 사이의 간극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작품 감상을 보조하는 장치들에서도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QR 코드로 제공되는 설명 텍스트는 또 하나의 해독 대상처럼 느껴졌다. ‘부재중 메시지’라는 이름의 작가 육성 녹음은 흥미로운 발상이지만, 작품과의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운 소리나 대화의 파편이 재생되어 오히려 작품 감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위험이 있다. 보조 장치는 관람자가 작품 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작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발을 내디딘 관람자를 또 다른 난해함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는 플랫폼 전시와 개념적 기획전 사이의 긴장을 자연스레 누그러뜨렸으며, 가능성 있는 작가들을 누구보다 일찍 포착했고 관람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첫 회를 시작한 이 전시가 연례전으로 자리 잡아, 다음 세대 작가들에게 하나의 열린 문으로 기능하기를 기대한다. 지역 미술관이 동시대미술의 가장 이른 목격자이자 가장 안전한 관람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기대를 충분히 뒷받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