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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찾아‘종만리’

P21,젊은작가이현수개인전

2025/01/01

이현수는 드로잉의 특성을 재해석하고 이를 입체,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태로 확장하는 조형 실험을 한다. 개인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창작 원리와 미술사적 고전을 교차하면서 ‘그리기’의 본질을 탐구해 왔다. 최근 P21에서 그의 개인전 <종만리>(2024. 12. 14~1. 25)가 열리고 있다. ‘아버지 이종만’과의 기억을 주제로 신작 및 근작 드로잉, 조각 29점을 선보인다. 부자 관계를 중심으로 아버지의 노화와 죽음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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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수/1981년서울출생.서울과학기술대조형예술과학사한국예술종합학교조형예술과전문사,뉴욕스쿨오브비주얼아츠순수미술석사졸업.인천아트플랫폼(2022),SeMA창고(2021),탈영역우정국(2018)등에서개인전개최.서울에서거주활동중.

작가의 감정이 ‘복잡’하다고 적은 이유는, 여기에 단순히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슬픔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종만은 개인전이 열리기 25일 전 세상을 등졌다. 43년 동안 아버지로 살았던 한 인간이 떠났다. 그러나 이현수는 흔한 추념의 말 대신 시시껄렁한 옛 기억을 꺼내놓는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때린 일, 술만 마시면 고함치며 허풍을 떨던 일, 치매에 걸려 온종일 손에 라이터를 쥐고 담배를 찾던 일, 그러다 금단 현상조차 잊어버리고 평생 놓지 못하던 담배를 끊은 일…. 그래서 작가는 관객이 그림의 “뚱하고 멍텅한 얼굴을 보고 키득키득 웃어주기를” 바란다며 먼저 웃음을 보였다. 물론 이 웃음은, 온전히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했던 여전히 철없는 아들의 아픈 배수진일 것이다. 작년 추석엔 보름달을 보며 이번 개인전이 잘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제일 먼저 빌었다는 그를 보고 우리는 함께 낄낄 웃음을 터뜨리며 작품을 볼 수밖에 없다. “허풍도 고함도 사라진 조용한 곳 종만리.” 작가는 아버지를 미안함이 아니라 미소로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웃고, 우리는 슬픔엔 늘 온기가 함께한다는 깨달음으로 함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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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돌>파스텔가변크기2024

허풍도 고함도 사라진 조용한 곳

그림은 때로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단절의 선’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일상의 육안이 아니라 회화의 형안으로만 겨우 드러나는 것을 사로잡고, 현실 바깥으로 도주한다는 점에서 이현수의 드로잉은 삶의 관습과 단절한다. ‘실연의 유대’가 이번 전시의 핵심은 아니다. 문제는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중에서 이현수의 드로잉이 실천하는 일은 슬픔에 훼방을 놓는 것이다. 뭔가 잔뜩 어질러야 내가 가진 게 많다는 걸 알게 되듯이, 누가 내 슬픔을 훼방 놓으면 문득 내게는 그걸 받아들일 만한 힘이 있구나 하면서 슬픔을 넘어서게 된다는 깨달음. 그러니까 누군가를 격려할 때 그의 등짝을 후리는 행동처럼, 징징대는 생을 한 대 툭 쳐주라는 것. 이것이 이현수의 작업이 지닌 힘이다.

이현수는 심오하게 적나라하고, 정교하게 제멋대로인 작품을 펼친다. 가령 <머릿돌>(2024) 시리즈는 좌대에 아버지의 두상을 올린 작품이다. 작가의 창작 활동이 가족에게 미친 영향을 조각으로 은유했다. 마치 대하드라마에 등장하는 수급처럼 생긴 작품을 두고 슬픔에 빠지려는 찰나, 그 위로 천장에서 이어진 부러진 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예술계엔 ‘집안 기둥을 한꺼번에 뽑아버리고 싶으면 음악을, 서서히 뽑아버리려면 미술을 시켜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현수는 미술로 집안 기둥을 한꺼번에 뽑아버렸다. 기둥이 뽑혀 나간 자리에서 아버지는 망연자실한 표정과 신경 쓰지 않고 잠을 청하는 듯한 평온한 얼굴을 오가며 눈을 감고 있다. 그 진동이 기묘한 웃음을, 자책에 대한 위안을 만들어낸다.

한편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드로잉한 <빠빠쓰뗄>(2023~24) 시리즈에는 현란한 형광 파스텔이 쓰였다. 어쩌면 현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눈부신 색채로 사그라드는 부친의 육체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이러한 숙연함은 금세 깨진다. 아무리 그래도 금발, 푸른 눈을 한 아버지라니.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턱살을 잡아당기는 아버지라니. 담배를 피우려 마루에서 안방 문을 여는 아버지라니. 맙소사 그런 아버지라면 도무지 기념비가 될 수 없다. 이번에도 작가는 슬픔에 훼방을 놓는다. 그가 네온 컬러로 아버지를 그린 이유는 ‘재고 처리’에 가깝다. 작업에 사용된 파스텔은 그가 드로잉하는 데 쓰지 않아 작업실에 쌓여있던 일종의 ‘떨이’다. 파스텔을 낱개로 구입할 수가 없어서 매번 세트를 사는 동안 같은 색이 남았다. 여기에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그린 그림은 색이 너무 예뻐서, 그 미화를 견딜 수 없어 더 이상 작업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은 덤.

물론 슬픔에 ‘죽’ 획을 긋고 빠져나오는 단절선은 어디로든, 정반대로도 향할 수 있다. 미감에 집중해 오롯이 슬픔만을 노래하는 일 역시 가능하다. 눈물로 표현되는 슬픔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참혹함보다 낫다. 그때에도 그의 작업은 우리가 온전히 슬픔에 잠기도록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현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지해지길 피했다. 하지만 그가 견디지 못한 것은 진지함 자체가 아니라, 진지함을 둘러싼 과도한 엄숙함이었다. ‘진지함’과 ‘진정함’은 다르다. 그는 ‘진지해져라’는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를 지우려 소리를 지른다. 이현수는 진지하지 않은 방식으로 진정한 그림을 아무렇게나!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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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종이에소프트파스텔41×31.8cm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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