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무지개를 거닐다

<봄을 걷는 두 연인> 리넨에 유채 160×220cm 2023
이진한은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동양과 서양, 모국어와 외국어, 사고와 감정의 ‘간극’을 고민해 왔다. 이해 불가능한 순간을 회화로 번역한다. 그가 개인전 <안녕, 안녕>(3. 22~7. 7 스페이스이수)을 열었다. 밤과 낮, 해와 달, 꿈과 현실이 만나는 초현실적인 신작 풍경화를 공개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공을 그리는 작가를 만났다. / 김해리 기자
— 먼저, 시곗바늘을 앞으로 감아 미술을 처음 시작했던 무구한 시절을 떠올려 보자. 어린 당신을 미술세계로 이끈 동력은?
Lee 나는 줄곧 그림을 좋아했다. 색과 형태를 조합할 때 생기는 경이로운 추상적 표현을 특히나. 빠른 선택과 직관에 기대는 작업 방식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다. 날 여기로 데려다 준 동력은 세상에 속하고픈 욕망이다. 홀로 밤을 지새우며 그림을 그릴 때면 마치 깜깜한 무대 위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독백하는 배우처럼 느껴진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작은 웅성거림을 상상하며 누가 와줬을까 떠올려 본다. 작업을 마치면 공연장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것 같다.
— 어린 시절 얘기를 물었던 이유가 있다. 당신 작업은 어쩐지 신비로운 동화 세상 같다. 봄, 달, 무지개 등 자연의 도상이 펼쳐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자연을 의인화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자연화한다.
Lee 이 질문을 받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인지하지 못한 채 자연과 인간을 겹쳐오곤 했는데 아카이브를 쭉 훑어보니 그림의 등장인물인 나 자신이 자연을 흉내 내고 있더라. 자연의 강한 힘을 빌려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려고 했던 거 같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
— 이번 개인전 <안녕, 안녕>에는 특정한 ‘순간’을 곱씹는 회화를 그렸다. 어떤 순간이 당신의 뇌리에 남곤 하는가?
Lee 이번 전시를 예로 들자면, 바쁘게 지나가던 외국인 친구가 “Hi! Bye!”라고 인사말을 던지고 홀연히 사라진 장면에서 시작됐다. 그게 슬프고 아쉬워서 짧게 피고 지는 벚꽃에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차마 붙잡지 못한 인연, 덧없이 흐르는 시간···. 못다 한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한다.
—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찰나를 그림에 고정하려는 까닭은?
Lee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 생각, 감정을 회화 언어로 변환한다. 무어라 설명되지 않는, 흔히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순간에서 창조적인 힘을 얻는다. 특정 사건을 그림으로 옮기려면 제목을 붙이고, 글을 쓰고, 드로잉하며 오랫동안 떠올려야 한다. 그때 느낀 것을 그릴 때 회화 언어가 온전히 작동하는 것 같다.
— 2007년 런던으로 떠나 15년간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지냈다.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 번역 (불)가능성을 느꼈을 법도 하다.
Lee 모국과 모국어의 아늑한 둥지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외국어를 사용하며 수없이 마주친 ‘불안정’과 ‘불확실’이 기존 언어의 의미와 사용법을 창조적으로 재정의하는 기회가 됐다. 막 영국에 도착한 직후에는 한국과 다른 문화, 교육 수준을 절감하며 사회적 위계질서의 하단부에 나를 끼워 넣었다. 스스로를 낮추며 ‘모름 투성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매달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 불가의 간극이 좁아지더라. 이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덩달아 그리고 싶은 것도 함께 줄었기 때문이다. 이후 태도를 바꿨다.

<꼭 쥐어진> 리넨에 유채 40.5×35.5cm 2019

<해와 달> 리넨에 유채 200×180cm 2023
— 그래서인지 당신의 ‘이해 불가 상황’에는 경쾌한 맛이 있다. 왠지 기뻐 보이기도 하고.
Lee 과거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를 나누면 그 진위가 궁금했다. 이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우선시된다. 위계질서에서 나 자신을 위에 두는 태도다. ‘하이, 바이!’ 같은 상황도 흘러가는 인연이라 보면 서글프지만, 능동적으로 인사를 건네면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아리송한 대화와 감정이 연속되는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내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 중요하다. 나름의 ‘전복’이다. 그런 의미에선 오독이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 꽃망울이 터지는 듯한 컬러가 눈에 들어온다. 회화의 색채는 어떻게 구상하나?
Lee 최근 들어 더 밝은 색채를 쓴다. <해와 달>(2023)에는 해와 달이 한 공간에 두둥실 떠 있는, 어쩌면 이뤄지지 못할 사랑을 꿈꿨다. 해와 달이 함께 뜬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공간, 이 불가능한 순간을 회화는 가능하게 한다. 초현실적인 사랑을 성사시키며 환희와 기쁨의 컬러를 사용하게 됐다.
— 과거에는 임파스토 기법을 연구해 작업에 적용하기도 했다. 최근 고심 중인 필치는?
Lee 2021년 런던 서남부에 위치한 비콘스필드라는 비영리 기관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에 한 달 남짓 머무르며 가상 현실과 회화의 관계를 고민했다. 당시 프로그램의 대주제가 VR이어서 드로잉 활동이 가능한 VR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했다. 기계를 쓰면 눈앞에 캔버스와 물감, 붓 같은 게 있고 조이스틱을 조작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막연히 ‘진짜 회화’처럼 그려보려 했는데 곧바로 그건 실현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특히 VR에서는 내가 그린 그림을 천장에서도, 바닥에서도 볼 수 있고 심지어 캔버스 안을 뚫고 지나가서 볼 수도 있다. 일점 원근법을 적용할 수 없는 혼돈의 공간이다. 불안하게 움직이는 시선을 따라 흔들리는 빈티지 포인트를 보며 회화가 왜 현실에 존재해야 하는지 다시금 확인했다. 급변하는 매체와 일상을 반영하는 회화의 시대 정신을 생각하면서.

<독서가> 패널에 유채 70×100cm 2016

<실연> 패널에 유채 70×100cm 2016
— 지난 4월부터 갤러리현대와 한솥밥을 먹게 됐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선보일 예정인가?
Lee 오래 흠모하던 갤러리와 함께하게 돼 기대가 크다. 이제 국내외 페어에서 자주 인사드릴 수 있을 거 같다. 전통적인 회화 매체를 쓰는 화가로서는 동시대를 살며 재고해야 할 여러 문제를 끌어안으려 한다.
—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에게 예술이란?
Lee 나의 단순하고 유희적인 회화가 복잡한 언어, 상황, 사고, 감정을 포용하고, 관객에게 실험적 감상을 허용하는 안전지대가 되길 바란다. 그게 된다면 우리가 삶에서 피치 못하는 ‘이해 불가’의 상황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뮈가 말했듯, 예술은 나를 비롯한 예술가를 고독에서 구원해 주고 세상에 살게 해준다. 예술은 내게 한없는 포용의 존재다.

이진한 / 1982년 서울 출생. 홍익대 회화과 및 센트럴세인트마틴, 골드스미스 석사, UCL슬레이드스쿨오브파인아트 박사 졸업. 누크갤러리(2021), 공간서울(2021), 런던 비콘스필드(2021), 갤러리엠(2018, 2015), 대안공간루프(2012) 등에서 개인전 개최. <Alone Time>(런던 유니온퍼시픽 2023), <Magnetic Fields>(BB&M 2022), <겨울, 여름>(아트스페이스3 2021), <데이 인 이브닝>(스페이스K 과천 2018) 등 단체전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