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을 조각하는

더페이지갤러리, 영국 작가 네이단 콜리 한국 개인전
2023 / 06 / 15
<You Create What You Will> 가변설치 2014

네이단 콜리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레터 조각가’다. 지난 25년간 텍스트 설치, 건축 모형, 라이트 박스, 사진, 드로잉, 영상, 아트북 등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현대 사회에서 ‘공공 공간’의 의미를 탐구해 왔다. 2007년에는 영국 터너미술상 후보에 올라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 받았고, 오는 6월 말부터 런던 테이트모던에 소장된 대형 텍스트 설치 <We Must Cultivate Our Garden>(2006)이 미술관 야외에 설치될 예정이다. 최근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콜리의 한국 첫 개인전 <No Golden Rules>(5. 24~7. 8)가 열렸다. 가로 길이 10m에 달하는 조명작품부터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건축 모형까지, 콜리의 예술세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 13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콜리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은 ‘길거리(street)’이다. 땅(land)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풍경(landscape)은 문화적 구성체이듯, 도심 풍경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길거리는 단지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연결되는 통로가 아니다. 길거리는 철저하게 디자인된 사회적 산물이자 온갖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 무대이자, 동시대 트렌드를 양산하고 전파하는 생생한 문화 현장이다. 콜리는 길거리라는 공공장소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예술로 고찰한다.

황금률은 없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갤러리 공간을 도심의 길거리처럼 구성했다. 전시 출품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콜리의 트레이드 마크인 텍스트 설치작품. 작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짧은 문구나 단어를 조명으로 나열하는 ‘조명 문자(illuminated letters)’ 작업에 주력해 왔다. 1년에 한 점씩 제작해 현재까지 총 15점을 완성했다.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문장은 <You Imagine What You Desire>(2014), <You Will What You Imagine>(2014), You Create What You Will>(2014) 세 점이다. ‘당신은 당신이 욕망하는 것을 상상한다’, ‘당신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을 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창조한다’ 등의 잠언은 경건한 태도로 관객에게 메시지를 건네는 듯하지만, 사실 특별한 의도가 깃들어 있지는 않다. 작가는 직접 작문하기보다 평소에 읽은 시, 노래 가사, 사람들과 나눈 대화에서 ‘선언’과 유사한 문장을 발췌하고, 이를 대형 설치로 구현한다.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잠깐이나마 곱씹어 생각할 만한 텍스트를 일종의 레디메이드 삼아 자신의 예술언어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You Imagine What You Desire> 전구, 알루미늄, 비계 440×520×280cm
<Camouflage Church, Mosque and Synagogue> 시리즈 하드보드지에 페인트 2006~08

콜리는 문장에 내포된 의미보다 그 문장이 주변 환경과 관계 맺는 방식에 더 집중한다. 이는 ‘황금률은 없다(No Golden Rules)’는 전시 제목에도 드러나는데, 이 문장은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명언 “황금률은 없다는 것이 황금률이다”에서 차용했다. 작가는 관객이 자신의 텍스트작품에서 황금 같이 고귀한 아포리즘이나 도그마를 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내 조각이 언어의 틀에 갇히지 않길 원한다. 오히려 텍스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보인다면 좋겠다. 언어의 견고함과 이미지의 유연함이 내 주된 관심사다.” 이러한 의도는 텍스트를 이루는 조명의 재료에도 나타난다. 콜리는 다른 현대미술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네온 대신 1990년대 극장이나 축제의 불등으로 쓰이는 백열등을 선택한다. 백열등은 네온보다 유약하고 희미하지만, 자신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기보다 주변 환경에 자연스레 녹아든다는 특징이 있다. “동시대미술에서 네온은 팝 컬처나 광고와 관련되지만, 나는 그런 자극적인 대상에는 흥미가 없다. 내게 예술은 내 신념을 설득하거나 판매를 유도하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장소특정적 작품은 작가가 특정한 장소의 역사와 맥락을 연구한 다음, 이에 반응하는 작품을 설치하는 과정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콜리는 현장 설치작업에 이와 반대로 접근한다. 장소를 재해석하는 작품을 가져다 놓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놓임으로써 장소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콜리에게 길거리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낯선 사물과 상호 작용하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나가는 역사의 장이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출품작은 건축 모형이다. 여기에는 <Parade Sculpture>(2015)와 <Camouflage Church, Mosque and Synagogue> (2006~08)가 포함된다. 먼저 <Parade Sculpture>는 이탈리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그려진 지오토의 프레스코화를 모티프 삼았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건축물 다섯 채를 호두나무로 입체화하고, 각각의 작품 하단에 좌대 대신 알루미늄 봉을 부착해 시위대의 피켓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Parade Sculpture>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액션 오브제(action objects)’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건축물들이 행진이나 거리 시위에 사용된 후 벽에 기대어 둔 물건처럼 보이기를 바란다. 작은 공공의 행동을 기억하는 기념비인 셈이다.” 한편 사선 스트라이프가 인상적인 <Camouflage Church, Mosque and Synagogue>는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상징하는 건물로 구성됐다. 세 종교의 성지가 서로 인접해 있는 예루살렘을 묘사하면서 첨예한 대립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초라한 건축 모형과 비현실적인 위장 패턴으로 종교 건물과 신념의 관계를 질문한다.

<Palace> 전구, 알루미늄, 비계 가변설치 2015
<무제(Parade Sculpture)> 시리즈 호두나무, 알루미늄 2015

정리하자면 콜리는 이미 누군가 만들어둔 회화, 건물, 텍스트를 레디메이드 삼아 ‘공공’의 키워드를 다룬다. 그가 공적인 개념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결국 그곳이 수많은 개인의 사적 열망이 들끓고 있는 용광로이기 때문일 테다. 확고한 소신을 지키기 위해 시위 행렬에 합류하는 나, 신의 은혜로 현세의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나, 인생의 기로에서 현명한 삶의 지침을 갈망하는 나…. 이러한 현실을 압축해 보여주는 출품작 <Palace>(2015)는 인간의 다섯 가지 중요한 신념을 영롱한 조명 텍스트로 세웠다. 관객은 ‘삶(Life)’, ‘마음(Mind)’, ‘믿음(Belief)’, ‘땅(Land)’, ‘부(Wealth)’ 사이를 거닐며 각자가 생각하는 이 다섯 가치관의 의미를 재고해 볼 수 있다. 끝없이 자기를 계발하라고 채찍질하는 사회에서 아마도 ‘황금률’은 정말 (너무 많아서 단 하나만 꼽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 이현 수석기자

네이단 콜리 / 1967년 글래스고 출생. 글래스고 스쿨오브아트 졸업. 영국 찰스턴트러스트앤서섹스모던(2022), 맨채스터 위트워스(2022), 오클랜드 아트갤러리(2022), 런던 파라핀(2019, 2017), 에든버러 팔리아먼트홀(2019) 등에서 개인전 개최. <Resurrection>(다크모포 2022), <Miracles>(네덜란드 카타르진컨벤트 2020), 코치-무즈리스비엔날레(2018) 단체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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