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의 겹, 물성의 알갱이
멀리서는 색, 가까이에서는 대지. 손지형의 그림은 다가설수록 깊고 넓어진다. 하나의 색면이 크고 작은 알갱이로 흩어지고, 그 틈에 묻혀있던 색이 보는 각도에 따라 번갈아 떠오른다. 손지형 회화에서 화면은 물감과 왁스가 쌓이고 깎이기를 거듭한 지층이다. 이 땅은 세 겹의 알갱이로 다져진다. 먼저 굵은 올의 캔버스 천이 요철을 깐다. 그 위에 묽게 푼 물감을 물들이듯 바르면, 미처 녹지 않은 안료가 요철 사이에 내려앉는다. 여기에 왁스를 섞은 물감을 롤러로 눌러 펴면 크고 작은 알갱이가 맺힌다. 이렇게 쌓인 두께를 뾰족한 도구로 파내면 가장 아래층의 색이 드러난다. 그림은 붓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쌓고 파내는 손의 시간 속에서 일궈진다.
작가는 개인전 <at the point>(8. 29~9. 23 스페이스윌링앤딜링)에서 그렇게 다진 땅에 식물을 심는다. 일상 사물을 그리던 화면에 매일 같은 길에서 마주친 잎과 꽃을 불러들였다. 사물의 색과 형상이 고정된 결과물이라면, 식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가는 그 ‘생성’을 화면에 담고자 대상의 윤곽도 이름도 모두 지웠다. 남는 것은 가까이 들여다볼 때만 보이는 잎의 솜털, 가장자리부터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색채, 꽃잎이 더디게 펼쳐지는 방향…. 장미가 피기까지 기다린 시간이 화면에 고스란히 쌓였다. 화면을 나누던 선과 면은 뒤로 물러나고 그 아래, 알갱이가 앞으로 나섰다. 더 나아가 작가는 최근 구체적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추상에 천착하고 있다. 형상에 기대지 않고, 색의 결과 겹만으로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식물을 길러온 땅이 그 자체로 풍경이 되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