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조각, 자연을 빚다
조은숙갤러리, 박상준 30년 만의 국내 개인전
2022 / 11 / 09
조은숙갤러리, 박상준 30년 만의 국내 개인전 / 미쉘 김(독립큐레이터)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도예가 박상준. 그가 서울에서 첫 개인전 <Perfect Imperfection in Ceramic>(9. 1~30 조은숙갤러리)을 열었다. 한국을 떠난 지 30년 만에 고국 나들이다. 이번 전시에는 ‘완벽한 미완’을 주제로 한 도자조각 및 대형 설치작품 등 14점을 선보였다. 분청 도자를 쌓고 걸고 부수고 해체하는 현대도자의 최전선을 보여주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필자가 박상준의 미국 활동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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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 of Brooklyn> 분청도자 20×59×18cm 2022
박상준의 이름과 작품을 만난 것은 2016년 이른 봄이었다. 뉴욕의 한국문화원에서 전시 중이던 그의 조각작품을 마주했다. 탁자에 놓여있어야 할 그릇들이 포개지고 켜켜이 쟁여진 채 전시장 벽에 걸려있는 것이다. 아니 벽면을 밀치며 다른 차원을 향해 튕겨 나왔다. 조각이라기보다 움직이는 낯선 풍경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전시 공간이 가파르게 꺾이자 이번에는 붉은 인화문 분청 조각이 나란히 벽에 기댄 채 어떤 철학적 사유를 건넨다. 작가는 분청 그릇에 추상과 관념을 덧입혀 절제되고 사려 깊은 미술을 내보였다. 낯설지만 내재한 정신이 탄탄한 아우라를 품고 있는 듯했다. 도자 그릇은 하나같이 깊은 내면에서 부유하던 생각과 관념 같은 것들에 언어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도예가의 언어가 되어준 그의 그릇. 박상준의 그릇은 낯선 땅에서의 작가 언어다. 명사이고 동사이며 형용사와 부사다. 그가 살아낸 이야기고 세상을 향해 다가가는 작가의 말이다.
박상준은 전통 도자기에 천착한 도예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도제 생활을 거친 뒤 대학에 들어가 도예를 전공했다. 졸업 후 작업장에서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매일 12시간 6일을 꼬박 일하는 강행군이었다. 고되고 열악한 작업 환경은 오히려 그가 도자기를 만들고 익히는 일에 깊이 몰입하게 했다. 그에게 가족은 삶의 토대이고 영감의 뿌리다. 도예가로 설치미술가로의 길을 걷게 하는 원초적 에너지라 할 수 있다. 그는 특히 분청사기의 형태에 매료되었는데, 분청은 자연스럽게 그의 평생 화두가 되었다.
박상준은 ‘서울을 거치지 않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세라믹을 제대로 배워볼 요량이었다. 뉴욕은 동시대미술의 모든 장르가 경계와 한계를 넘나들며 실험되는 곳이다. 석사 과정에서 조각을 전공한 교수에게 사사했는데, 전혀 다른 매체인 도자기와 조각의 접점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을 맞이했다. 미술사 전체를 아우르고 관통하는 단어는 ‘만남’이다. 서로 다른 두 정신이 만나는 지점을 말한다.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가장 위대한 미술의 시대 ‘르네상스’는, ‘전통과 혁신’의 첨예한 두 정신이 충돌하고 갈등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역사를 열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미술의 본질은 발전이 아닌, 늘 언제나 새로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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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오브제(Red, Blue)> 연작 분청 도자 15×15×18cm 2022
박상준의 미술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게 된다. 전통적인 형태나 선, 색채에 질문을 새롭게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그리고 설치미술에 대한 새로운 논의와 실험은 그의 분청 그릇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동양과 서양, 실용과 예술, 도예와 조각이 서로 부딪히고 순응하기도 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지도를 그리게 된 것이다.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다.
박상준은 다양하고 미묘한 표현으로 가득한 분청 그릇에 붉은 인화 문양을 더해 간결하고 절제된 현대적인 미감을 불어넣었다. 그의 도자기는 추상적 혹은 직설적으로 결합해 그만의 매력적인 조형성을 구현한다. 그리고 2005년부터 시작된 <Bowl> 시리즈는 이내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미술관을 비롯해 필라델피아미술관, 워싱턴미술관 등 미국의 메이저 미술관이 앞다투어 그를 주목했으며, 그가 빚어내는 도예 조각작품에 깊이 매료되었다. 특히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스미스소니언미술관 공예전은 8회에 걸쳐 박상준의 조각을 우수 작품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금상을 수상, 명실공히 시대를 이끄는 탁월한 현대미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완벽한 미완(perfect imperfection in ceramic). 그릇의 운명과 매력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멀다. 그릇을 빚는 것은 날, 계절, 시간마다 다른 물리적 자연적 조건에 온전히 기대어야 하는 작업이다. 여기에 그 땅의 햇빛, 계절의 간격과 세기가 더해져 그릇은 매 순간 새롭다. 그릇의 운명이고 매력이다. 빚고 굽고 만들고 더러는 깨지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그릇은 저마다 아름답다. 자연의 생애 주기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데 소멸하는 아름다움이 깃든다. 인간의 생애 주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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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alma vase> 분청 도자 28×60×30cm 2021
박상준의 최근작은 무한 영감을 주는 자연을 다른 형태의 설치미술로 풀어냈다. 물레에서 깨지고 버려진 그릇 위로 굽지 않은 그릇을 포개어 숲속에 펼쳐놓고는,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의 바람과 비, 눈과 안개가 지나가게 내버려두었다. 그 위에 그릇을 다시 얹고 배열하고 재배열하는 반복을 거치며, 더러는 남고 더러는 사라지고 소멸되었다. 그릇이 자연의 생애 주기 안으로 들어갔다. 숲의 생명을 그릇에 담아내는 일은 언제나 녹록지 않지만, 숲에 살며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에게 어떤 소명처럼 주어진 기쁨이다.
박상준의 첫 서울 전시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그의 말대로 ‘서울을 거치지 않고’ 뉴욕으로 달려가 이룬 예술의 성취를 선별해 펼쳐 보이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도자기에서 조각과 설치미술로 확장되는 박상준의 예술영역은 작가 고유의 전시 방식인 쌓기, 걸기, 부수기 혹은 해체하기를 통해 관객에게 한 발 더 다가선다.
이질적인 도자기가 서로 결합되고 해체되는 실험은 관객을 추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의 미술은 주장하거나 선언하지 않는다. 또한 애써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친절해 보이지 않지만, 보는 이에게 그만큼의 여백과 어떤 여지를 남겨둔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관조할 수 있도록. 너무 많은 함의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각자의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놓친 이야기를 이 전시로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박상준의 미술은 우리와, 우리가 머무는 공간을 변화시킨다. 이우환은 공간과 미술의 관계를 이렇게 해석했다. ‘공간을 달리하면 물리적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해가는 미술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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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 1968년 대전 출생, 1992년 도미. 목원대 학사 및 프랫인스티튜트 석사 졸업. 로스앤젤레스 샤토갤러리(2022), 뉴저지 KCC갤러리(2021), 뉴욕 첼시웨스트갤러리(2011), 뉴저지 FGS갤러리(2006, 2005) 등에서 개인전 개최. 뉴욕 버그도프굿맨(2021), 워터폴갤러리(2021), 워싱턴 디스트릭트클레이갤러리(2018) 등에서 열린 단체전 참여. 스미스소니언미술관 공예전에 2006년부터 2015년까지 꾸준히 출품. 보스턴공예전(2014, 2019) 베스트 전시 선정 및 스미스소니언공예전(2012) 금상 수상.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