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 피는 꽃
포도뮤지엄은 2021년부터 남녀노소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주제로 대규모 기획전을 선보여 왔다. 역사의 상흔, 차별과 혐오에 이은 올해의 키워드는 ‘노화와 기억’.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전은 개인의 기억 상실로 인해 자신과 주변인의 삶이 무너지는 과정을 미학적으로 고찰했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앞둔 한국에는 치매를 처참한 질병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전시는 누구나 마주하게 될 삶의 후반기를 ‘어쩌면 더 아름다울’ 한 장막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치매의 아픔을 승화하는
전시를 총괄한 김희영 디렉터는 “모든 생명체의 연약함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예술의 힘”을 강조한다. 미술 애호가는 물론, 제주를 찾은 관광객도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을 더했다. 먼저 루이스 부르주아의 <밀실 1>은 작가의 어머니가 투병 생활을 했던 방을 재현했다. 낡은 문짝과 켜켜이 쌓여있는 의료 기구 더미에서 고립된 세월과 환자의 고독함이 배어난다.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이 기억으로 형성된다고 말했다. 부르주아는 어머니를 여읜 기억을 정리하며 일기장에서 발췌한 글귀를 매트리스에 수놓았다. “내 기억이 필요해요. 그건 내 기록물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 <밀실 1> 목재, 천, 금속, 유리 210.8×2743×243.8cm 1991
루이스 부르주아 <밀실 1> 목재, 천, 금속, 유리 210.8×2743×243.8cm(부분) 1991
사진작가 셰릴 세인트 온지도 치매를 앓는 노모와의 일상을 기록했다. 조류학자이자 조각가였던 어머니와 사진을 찍고 새 둥지, 밀짚모자, 쌍안경 등 추억이 깃든 물건을 모아 아카이빙했다. “신기하게도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면 모델 같이 포즈를 취했다. 기억을 대부분 잃은 후에도 사진 찍는 일만큼은 즐거워하셨다. 꼭 오래 해온 일만은 기억하는 것처럼….” “모든 날 중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한 번도 웃지 않은 날이다”라는 니콜라스 세바스티안 드 샹포르의 말처럼, 작가는 아이처럼 웃는 어머니의 초상 시리즈를 ‘슬픔을 넘어선 행복’이라 회고한다.
셰릴 세인트 온지 섹션 전경
정연두의 <수공 기억>은 여섯 노인의 이야기를 풀어낸 2채널 영상이다. 왼쪽 화면에서 노인이 오래전 기억을 전래 동화처럼 들려주면, 동시에 오른쪽 화면에서는 그 내용이 그대로 무대 세트로 구현된다. 작가는 안국동, 종묘, 파고다공원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노인을 인터뷰했다. “한번은 촬영 문제로 다음날 다시 같은 내용을 인터뷰했는데, 이야기가 많이 달라져 무대도 다 바뀌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며 기억이 변형, 미화되는 과정을 연극적으로 풀어냈다.
전시의 대미를 장식한 테마 공간 <Forget Me Not>은 100년을 살다 죽은 배롱나무를 전시장에 옮긴 몰입형 설치작품이다. 포도뮤지엄에서 개최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의 참여작을 모아 나무에 영사하고 오케스트라 연주를 얹었다. 나무가 태어나 꽃을 피우고 지기까지의 여정은 생로병사의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제주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힐링 스폿’이 되겠다는 꿈. 자칫 신파에 그칠 수 있는 연출을 넘어 미술관의 애정 어린 진심이 묻어난다.
테마 공간 <Forget Me Not>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