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빚은 ‘시’

아트인컬처 평론 프로젝트 ‘피칭’ 제31회 선정자
2026 / 08 / 31

신촌극장에서 고권금의 현대무용 공연 <피콜로 X 고권금>(3. 19~21, 이하 <피콜로>)을 보았다. 무대 세팅은 단출했다. 꽹과리, 갈대, 천장부터 바닥으로 길게 늘어뜨린 줄. 약속한 시각이 되자 고권금이 사물들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앞에 앉은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된 퍼포먼스는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피콜로>에서 드러나는 반복적인 동작의 수행은 퍼포머가 신체의 미세한 층위를 파고들어 끝내 차이를 발견해 내는 과정에 가깝다.

<피콜로>의 중심 동작은 다음과 같다. 상체를 숙이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로 발날을 이용하여 몸을 기울인다. 팔을 몸을 기울이는 방향과 반대로 하여 균형을 잡는다. 이 동작을 자리와 각도를 바꾸어 여러 번 반복한다. 자세는 반복될 때마다 미세하게 달라진다. 발날에 실리는 체중, 무릎의 각도, 팔이 그리는 모양이 매번 조금씩 다르게 조율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같은 동작이 아니라 같은 동작을 찾아가는 몸의 여러 시도를, 변주를 목격하게 된다. 고권금은 이 반복을 “정교함을 연습하는 과정”이라 부른다. 다만 그 정교함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과 상태를 감지하는 것에 대해 더 정밀해지려는 노력에 가깝다. 무대에서 그는 처음 걷는 아기처럼 매 순간을 새롭게 감지하며, 예측할 수 없는 세계 속으로 계속해서 걸어 들어간다.

극장에 흐르는 오로민경의 사운드는 선율이 있는 음악이 아니라, 내레이션/언어가 등장하지 않는,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야외의 소리를 담았다. 어떤 소리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소리는 낮은 볼륨으로 공간에 스며들며 무대 위 사물들과 조응한다. 바람 소리인지 마찰음인지 끝내 판별되지 않는 소리는 오히려 관객의 청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운다. 보여주려 하지 않는 행위라는 이 모순적인 지향은 관객 스스로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화이트 큐브 안으로 밀려 들어온 어떤 몸-퍼포먼스들은 고정 설치된 작품과 달리 움직이며 시선을 낚아챈다. 드러냄, 표출하기, 주목 받기…. “여기 몸이 있어! 자, 이것을 봐.”라고 말하는 듯하다. 고권금은 반대로 나아간다. 느리고 고요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반복하는 자세는 가시성이라는 멍에가 감춘 영혼의 자리를 상상하라고 말을 건넨다. 눈으로 대상을 오래 응시하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낯설어진다. 색과 형태, 대상과 배경이 아주 선명해지다가 흐릿해지고 이내 사라지기도 한다. <피콜로>는 관객의 눈을 사로잡지 않음으로써 사로잡고, 뚫어지게 보다가 이내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자문하게 하는 방식으로 가시성에 저항한다. 이때 응시는 대상 앞에서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행위가 된다.

<피콜로>에서 고권금의 움직임은 그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시 언어로서의 안무이다. 그렇다면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은 낱말이 낱말로서 감지될 때, 낱말들과 낱말들의 구성, 그들의 의미와 외적 및 내적 형태가 그저 현실을 지칭하는 대신 그들 자신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할 때 시적인 것이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낱말을 신체로 대체하면 고권금의 몸이 ‘지시적 기능의 극소화가 야기하는 불투명성을 지향함으로써, 즉 언어 바깥에 있는 현실을 일차적으로 지칭/지시하지 않음’으로써 시적 언어에 가깝게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정적 표현이 최소화된 진공적 상태에 놓인 관객은 어느 순간 고권금의 체온, 근육의 피로감, 집중의 정도를 자기 몸으로 상상하기 시작하며, 신체적 전이를 느낀다. 제 발날이나 팔뚝이 뻐근하게 저리는 듯하다. 그러나 고권금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봄으로써 보지 않기 위해 필요한 시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놓인 시각성이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그는 살과 피와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자기 몸으로 살아낸다. 고권금의 동작은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고권금의 퍼포먼스와 그 자신의 삶이 밀착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품과 삶이 밀착할수록, 작품을 향한 말은 작품을 만든 사람을 향한 말이 되기도 한다. 해서 <피콜로>는 다치기 쉬운 몸이다. <피콜로>는 낯선 사람들이 모인 극장을 안전한 장소라고 상정하고 맨몸으로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장소와 허물없이 관계 맺는 고권금의 몸은 완전한 안전함이 허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로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안전함은 그곳을 이루고 채우는 사람들의 믿음으로 ‘겨우’ 완성되는 것이고,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라고 <피콜로>는 말하고 있다.

공연 다음날 나는 고권금의 동작을 따라했다. 몸을 숙이고 무릎을 굽히고 발날을 비트는…. 흔들리는 갈대처럼. 극장 벽을 타고 흐르던 그림자처럼. 성당의 작은 창문으로 본 녹음처럼. 공연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배경 · 고권금 <피콜로 X 고권금> 퍼포먼스 2026 신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