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자생공간’ 뜬다

2015년 7월호 「젊은 ‘자생공간’ 뜬다」

새로운 씬(scene)의 등장을 예고하는 징후처럼 소규모 예술 공간이 서울 시내 곳곳에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젊은 미술인들의 ‘미술 순례’는 삼청동이나 청담동 일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이제 스마트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서울 끝자락의 영등포구에서 노원구로 횡단하며, 미술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파트나 주택 주차장 안으로 향한다. 찾아가기 힘들기로 정평이 난 공간은 종로구 창신동의 ‘지금여기’. 비교적 시내 중심부에 있고 6호선 창신역으로부터 1km 내 이른바 역세권에 있지만, 지하철 출구에서 나와 걷기 시작하면 급경사를 오르며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때까지 등산을 하게 된다. 다른 곳들도 비슷한 형편이다. 운영자들은 별도의 생업이나 아르바이트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기 때문에 이들의 공간은 대체로 임대료가 낮은 지역에 분포돼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며 마주치는 풍광이 흥미롭다. 서울 도심에서 보기 어려운 공장지대, 수그러든 상가나 재래시장, 미개발 지역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신생 공간’이라고 통칭되는 이곳들을 가리킬 만한 새로운 이름을 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1990년대 국내 아트씬을 이끌었던 ‘대안공간’과는 엄연히 성격이 다르다. 한 가지 특징이라면 2013년 즈음부터 생겨난 이러한 곳들은 대체로 미술가, 디자이너, 뮤지션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인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아티스트런스페이스’라고 부르고 넘어가기에는 그 열기가 범상치 않다. 유행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 공간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기 전에는 먼저 어떤 신생 공간이 있고 그곳에서 어떤 행사를 하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애써 찾아 갔는데 헛수고하기 일쑤다. 왜냐하면 상시적으로 문을 열어 두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친절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생 공간들의 형편에 홍보팀, 마케팅팀은 어불성설이다. 대신 이들에게 최고의 홍보 수단은 돈 들지 않고 파급력이 큰 SNS다. 톡톡 튀는 이름을 짓고 로고를 만들어 SNS에 프로필 사진을 업로드하면 금세 홍보 완료. 최근에는 이 공간들의 전시 일정을 한데 모아 표로 정리하고 공유하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 ‘엮는자’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집계조차 어려울 만큼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는 여러 신생 공간 중에서 서울 시내로 국한시키고, 특히 작가들이 운영하는 공간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벌써 24곳이나 된다. 이러한 공간들은 작가들의 작품만큼이나 제각각 다른 모양새로 꾸려지고 있다. 작가이면서 공간을 운영하는, 이른바 ‘작가-운영자’의 관심사와 의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콘텐츠와 시스템을 구성한다. 공동 운영자 중 한 명이 성소수자인 ‘청량엑스포’는 LGBTQ의 문화를 폭넓게 다루기 위해 관련 주제의 전시, 퍼포먼스, 영화 상영 등을 진행해 운영자의 색깔을 적극 살렸다. 심지어 전시를 열지 않는 곳도 많다. 작가 4인이 운영하는 ‘미연씨’는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취향과 성향에 초점을 두고 작업 활동에 영향을 주는 레퍼런스, 취미를 공유한다. 아파트에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원하는 용도에 따라 집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작가 박현정이 운영하는 ‘스튜디오파이’는 다른 작가나 강사를 초빙해 수업료를 받고 <그리고 찍는 활판인쇄 수업> <연필 드로잉> <선 자수> 등의 소규모 수업을 진행한다.


뭘 하든 ‘주인장 마음’대로 운영되는 모습이 작업실이나 작가들의 놀이터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경제적 측면까지 진지하게 모색하는 곳도 있다. 중구의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에 들어선 4개 공간 ‘800/20’ ‘300/20’ ‘200/20’ ‘개방회로’는 지난 3월 <세운상가 좋아요, 대림상가 좋아요, 청계상가 좋아요>를 함께 진행하며 공간별 전시는 물론 사생대회, 상가 투어 프로그램, 30년 이상 종사한 베테랑 상인들과 교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작가가 직접 운영하기에 작가-운영자 본인의 작업만 선보이는 경우도 있다. 올해 4월부터 딱 1년만 운영할 것을 미리 밝힌 작가 그룹 789의 ‘정신과시간의방’은 789의 작업을 2주마다 연속적으로 교체하며 전시하고 전시 작품을 직접 판매하기도 한다.


갤러리, 미술관, 심지어 대안공간에서조차도 전시할 기회를 잡기 어려운 젊은 작가들은 이제 이렇게 스스로 자신이 활동할 ‘무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미술계에 강한 존재감을 남기거나 아트씬의 판도를 바꿔보겠다는 대의명분을 들먹이지 않는다. 운영자이기 전에 작가인 자신은 물론 주변 동료 작가들이 평소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이 핵심이다. 기성 미술계와 제도권은 아직 신생 공간의 동향에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고, 신생 공간 역시 이들의 이목을 끄는 데 별반 관심이 없다. 이러한 ‘자급자족 시스템’은 일견 폐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생 공간의 각종 미술 이벤트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또 다른 작가, 혹은 마니아층 관객으로 구성된 새로운 ‘미술 순례단’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신생 공간들끼리 마저도 서울 시내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가-운영자’들은 자신의 공간을 돌보는 데 치여 다른 공간들과 교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로의 공간을 방문하며 비교적 왕래가 부쩍 잦아졌고, 큰 규모의 행사를 함께 기획하는 등 다수의 ‘작가-운영자’들이 일시적 연대를 도모하기도 한다. 대개 임대 계약이 만료되는 2년을 주기로 공간들은 생겨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이 공간들에서 ‘놀던’ 사람 중 누군가는 스타 작가로 성장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또 다른 삶의 터전을 마련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무엇이 되던 간에 오늘의 젊은이들이 신생 공간에서 직접 경험한 ‘자생의 힘’은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❶ 교역소
사실 교역소에서는 전시가 열린 적은 없다. 지난 7개월여 간 2개의 이벤트 〈상태참조〉(2014. 12. 13~14, 20~21)와 〈수정사항〉(6. 13)을 릴레이식으로 진행했을 뿐이다. 미리 배부한 시간표에 맞춰 다양한 작가들의 프레젠테이션, 퍼포먼스, 스크리닝 등을 선보였다. 전자는 ‘상태’에 기반을 둔 활동, 후자는 그 이후 ‘수정, 변경’된 사항에 중점을 뒀다. 심사나 선정 과정 없이 주변 작가의 추천만 받아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공동 운영자 김영수 정시우 황아람은 중랑구 상봉동의 자전거 상점 건물 안에 교역소를 마련했다. “영수가 앞에서 일을 잔뜩 벌여 놓으면 아람과 시우가 뒤에서 일을 정리해요.” 작가 김영수는 최근 일민미술관의 〈뉴스킨: 본뜨고 연결하기〉전(7. 3~8. 9)에 참여했고, 정시우는 미술관에서 인턴 근무를, 황아람은 미술계나 패션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각자 생업을 병행하며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교역소의 첫 수익 활동으로 제132회 서울코믹월드에 참여해 교역소 로고로 만든 스티커를 판매하고자 했지만 불발됐다. “악수하는 모양의 교역소 로고에는 눈코입이 없어 ‘캐릭터’가 아니라고 퇴출당했어요.” 자칭 타칭 ‘노답 3형제’ 교역소 운영자 3인은 젊은 미술인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실제로 다른 여러 신생 공간 운영자가 이들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게 됐다고 말한다. ‘교역소’라는 이름답게 단순히 전시를 여는 것을 넘어서 ‘젊은 예술’을 교역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체 기획 행사는 아니지만 ‘청년관’ 이슈가 촉발됐던 좌담회 〈안녕 2014, 2015 안녕?〉(2014. 12. 28)과 미술생산자모임 제2차 공개 토론회(3. 29)도 교역소에서 열렸다.

나경호 김보경 장햇살 조지승 <바퀴벌레> 퍼포먼스 2015_교역소가 있는 건물 옥상에서 진행된 이벤트 <수정사항>의 프로그램 하나
교역소 운영자 3인. 왼쪽부터 · 김영수 황아람 정시우.
김수연&식물연구원 한지수 <Mission On> 3월 전시 전경 2015
구탁소 운영자 3인. 왼쪽부터 · 김현주 송민정 김민경.

❷ 구탁소
‘예술가’도 직업일까? 구탁소가 2015년 한 해 동안 진행하는 <직업예술>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직업예술>은 연초부터 매달 미술가 1인과 다른 분야의 직업인 1인을 매칭해 한 달간 협업한 결과물을 마지막 주에 전시로 선보이는 프로젝트로, 이미 12월까지 일정이 짜여 있다. 각 월별 미술가와 직업인의 매칭은 대략 이런 식이다. 설치 작가와 아르바이트생, 회화 작가와 식물 연구원, 안무가와 플로리스트, 일본화 화가와 대학박물관 계약직원 등으로 다양하다. 대체로 운영자 3인이 매칭했다. 다만 경우에 따라 참여 작가가 특정 직업군의 인물과 협업해 보기를 원할 경우 운영자들이 인맥을 총동원해 적격자를 찾기도 했다.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모든 직업에 예술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저희가 ‘기획자’는 아니에요. 오히려 참가자들의 작업을 좀 더 일찍 접하고 자세히 아는 ‘관객’의 입장이죠. 우리도 모두 작가이다 보니 참가자들에게 새로운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 궁금한 것을 마구 물어보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다섯 명이 디렉팅을 하고 있더라고요.” 참여자들에게는 해당 월 중순에 매일 10개의 질문에 하나씩 답변하는 ‘Q&A’라는 숙제도 주어진다. 5개 문항은 운영자가 미리 정한 고정 질문이고 나머지는 참여자들이 정한다. 답변은 육성으로 녹음해서 텍스트와 함께 웹사이트에 업로드된다. “이 숙제를 마치고 나면 다들 자신을 많이 되돌아보게 된다고 해요. ‘작가 갱생’ 프로그램이랄까요?(웃음)” 운영자 3인 김민경 김현주 송민정은 원래 세탁소였던 이 공간을 작업실로 임대했다. 작업실은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다른 작가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는 장소의 기능도 겸하기 때문에 세 사람은 이 공간을 일반적인 전시장이 아닌 ‘열린 공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된 구탁소는 두 층을 모두 작업실로 사용하되 지하 1층은 프로젝트 결과를 선보이는 오픈스페이스로 활용한다. 인터뷰 내내 농담과 웃음이 그치지 않던 운영자 3인은 입시미술학원 시절부터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이 잘 맞는다. 서로의 적성을 알기에 업무 분담도 수월했다. 김민경은 섭외 및 의견 조율을, 김현주는 테크니션을, 손민정은 홍보를 주로 담당한다. 구탁소는 세 사람이 준비한 오프닝 만찬으로도 유명하다. “현주는 음식, 민정은 디저트, 민경은 술 전문이에요. 오프닝 때 오세요!”

❸ 기와하우스
기와하우스는 2013년 8월에 문을 연 디자인 스튜디오 겸 게스트하우스다. 한옥 주택에 현대적 요소를 결합해 개조한 공간으로 그래픽디자이너 임원우가 숙박 시설과 전시 공간을 동시에 운영한다. 천장을 유리로 덮어 비를 막고 마당에 타일을 깔아 신발을 벗고 다닐 수 있도록 설계했다. 한옥 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손님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동시에 전시나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장했다. 전시는 외부에서 제안이 들어오는 경우도 많지만 대체로 임원우가 직접 기획하며, 참여 작가는 전시 기회뿐만 아니라 기와하우스의 방을 작업 공간으로 제공받는다. 그는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멀티플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민한다. 주로 타이포그래피나 그래픽디자인 전시가 열린다. 임솔의 개인전 <시원해지고싶다>(2014. 6. 7~21)는 한글 레터링 작업으로 사회 구조의 모순을 지적했으며, 김규호의 개인전 <기억의 궤도>(2014. 12. 17~21)는 동성애자로서 한 해 동안 경험했던 사건 중 일부를 추상적인 그래픽으로 제작해 선보였다. 디자인 전시 외에도, ‘임대’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전시와 숙박 프로그램 등을 구성해 기와하우스의 공간 특성을 활용한 전시 <임대의 추억>(2014. 11. 14~16)을 기획했다. 그밖에 2015년 새해를 맞아 설날에 인디밴드 ‘회기동 단편선’의 공연이 열리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저희는 입구에 간판이 없어요. 공간 이름도 ‘기와하우스’, 말 그대로 기와집이에요. 특별한 이미지를 형성하기보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규격화된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전시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놀다 갈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프로젝트를 추구한다. 임원우는 숙소에 예약이 들어오면 손님과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손님이 원할 시 무료로 동네 투어 가이드도 해 준다. 일회적인 관계가 아니라 디자인, 음악 등의 분야에서 계속 영향을 주고받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싶다고. 임원우는 ‘숙박’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성 전시를 구상 중이며 언젠가 여기에서 첫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김규호 <기억의 궤도> 전시 전경 2014
기와하우스 내부 전경
신도시 오프닝 행사 전경 2015
신도시 내부 천장에 부착된 네온사인 간판 ‘신도시’

❹ 신도시
신도시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커피나 술을 마실 수 있다. 미술가, 디자이너, 음악가 등의 아지트로, 예술가의 생활 패턴처럼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든다. 공동 운영자 이병재 이윤호가 신도시를 작업실로도 사용하듯, 작가들도 삼삼오오 모여 놀이터이자 사무실로 애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생’하고 싶어요. 신도시는 생계형 공간이면서도 저희는 물론 친구, 동료와 따로 또 같이 마음껏 작업하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서울아트시네마의 팬인 두 운영자는 그 근방의 중구 수표동에 둥지를 틀었다. 신도시 주변엔 공구상가와 창고들이 들어서 있다. 해가 지고 상가 직원들이 빠져 나가면 신도시에는 그야말로 ‘신(新)도시’가 펼쳐진다. 예약을 통해 각종 공연, 파티, 워크숍, 팝업키친 등은 물론 옥상에서 필름 상영회도 가능하다. 지난 5월 문을 열고, 한 달여 남짓 동안 벌써 《젖은잡지》의 출간회 〈젖은파티>, 뮤지션 날씨의 앨범 발매 콘서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빙하기>, 레이블 ‘영기획’의 3주년 파티 <The33 Littl3 Wacks>, 제5회 전국자립음악가대회 <51플러스> 등이 열렸다. 앞으로 자체 기획 프로그램을 비롯해 비정기적으로 운영되는 출판사 및 레이블도 병행할 예정이다. 그룹 파트타임스위트를 했던 작가 이병재는 과거 이태원에서 바(bar) ‘꽃땅’을 3년간 운영했고, 사진작가 이윤호는 작년부터 친구 4명과 함께 잡화점 ‘우주만물’도 운영 중이다. 각자의 노하우를 살려 꾸민 신도시의 인테리어는 한약재 보관용 서랍, 괴목, 불량 테이블과 의자 등 소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교회에서 장의자를 잔뜩 얻어다가 바, 벤치, 테이블 등을 만들었어요. 버려지고 방치된 것들을 줍고 얻고 자르고 붙여 만들었어요. 근검절약 콘셉트랄까요?” 사실 ‘신도시’라는 이름도 두 운영자가 평소 눈독을 들였던, 오래 전 망한 가게의 간판에서 비롯했다. “원래 ‘신도시’는 20년 전에 생겼다가 사라진 게이바래요. 간판 떼러 갔다가 들었어요.” 이 간판은 신도시 천장에서 예술가들을 향해 다시 빛을 밝히고 있다.

❺ 공간사일삼
공간사일삼은 작가 김꽃, 심혜린이 함께 운영하는 전시 및 프로젝트 공간이다. 2009년 문래동4가 41-3번지의 빈 공장을 작가 김보리 김꽃 정동훈 송곳이 공동 작업장으로 사용하면서 출발했다. ‘프로젝트413’이었던 명칭은 2010년 기획전과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413’으로, 2011년부터 레지던시까지 병행해 ‘아티스트런스페이스413’으로 변해 왔다. 올해 초 ‘공간사일삼’이라는 간결한 이름으로 개칭하고 새로운 ‘공간 사용 매뉴얼’을 도입하며 대대적으로 리뉴얼했다. 공간은 1층 ‘안개부엌’과 복층 ‘안이자밖’으로 분리된다. ‘노네임노샵’의 이혜연이 설계한 안개부엌은 공동 부엌이자 공연, 낭독회 등을 위한 공간이다. ‘문의-방문-협의-홍보-예약-사용-기록’ 순으로 매뉴얼화돼 있다. 한편 전시공간 안이자밖은 복층을 공사했을 때 기와지붕이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름 지었다. ‘문의-방문-협의-인터뷰-디자인-홍보-사용-복구-전달’ 매뉴얼에 따라 운영되고, 마지막의 ‘전달’은 앞선 전시 입장료를 다음 전시 비용으로 사용하는 과정이다. “누가 이곳에서 전시하건 간섭하지 않는 편이에요.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기록하죠. 물론 전시에 관한 상의나 토론은 언제나 환영해요.” <던전 Dungeons>은 개칭 후 처음 선보인 전시다. 작가 강정석 김동희 김정태 이수경 한진이 함께 기획, 참여했다. 온라인 게임에서 참여자(들)이 몬스터를 사냥하길 원할 때마다 일회적으로 생성되는 ‘인스턴스 던전’이 신생 공간들의 생태와 닮았다고 보고, 퀘스트를 수행하듯 각기 다른 CC101(5. 4~6), 공간사일삼(5. 19~22), 개방회로(6. 8~10) 등 세 공간에서 연이어 전시를 열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관객이 3명씩 입장해 숨어 있는 아이템을 찾거나 미션을 완수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7월 중 200/20에서 도록 출판기념회가 열릴 예정이다.

<던전 DUNGEONS>은 온라인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조종할 없는 캐릭터 NPC 역할을 하는 사람(참여 작가 김정태)을 전시장에 배치하기도 했다.
공간사일삼에서 열린 번째 <던전 DUNGEONS> 전시 전경 2015
‘오픈베타 반지하’의 사무실 한편에 있는 굿즈의 판매품 진열대 전경
김동희 <노가다 자수패치> 컬러 자수 패치 6×6cm 2014

❻ 굿즈
굿즈는 젊은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의 파생물, 소량 제작된 에디션 등 ‘굿즈(goods)’를 판매한다. 아트페어는 매년 늘어나고 있지만 일반 관객이 작품을 자유롭게 구매하기에는 아직 문턱이 높다. 젊은 작가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적이다. 작가 돈선필과 박현정이 운영하는 굿즈는 이 문턱을 낮춰 보고자 시작됐다. “유무형의 작업을 판매 가능한 형태로 ‘포장’할 수 있도록 작가들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회의를 통해 함께 고민하기도 해요. 설치 작가의 작업을 판매 가능하도록 제작한 굿즈를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에요.” 현재 가장 인기 있는 판매품은 작가 박현정의 드로잉 작품에서 차용한 요소로 제작한 <표본뱃지(Specimen Badge)>다. 굿즈의 판매품은 온라인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나 구입은 오직 현장에서 굿즈 매니저나 작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배송 중 파손의 우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와 구매자가 직접 만날 기회를 제공하고 작품을 거래하는 경험을 공유하기 위한 장기적 목적이 더 크다. 두 운영자는 각각 제주도와 대구에서 직접 방문해 처음으로 미술작품을 구매한 두 손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굿즈는 현재 상봉동 미술 공간 ‘오픈베타 반지하’(이하 반지하)의 사무실 공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굿즈의 공동 운영자 돈선필은 반지하도 함께 꾸려 가면서 서울 중심에서 떨어진 상봉동 일대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게 하고 있다. 반지하는 소프트웨어의 시범 서비스 ‘베타 테스트’처럼 작가가 다른 곳에서 본격적인 전시를 선보이기 이전에 ‘프로젝트’로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공간이다. 굿즈 역시 장차 별도의 공간으로 독립할 때까지 반지하 안에서 시스템을 다듬고 있다. 오는 10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여러 신생 공간과 작가가 참여하는 아트페어 <굿-즈 2015>가 열린다. 굿즈와 몇몇 공간, 그리고 소수의 작가들이 의견을 모아 시작했지만 현재는 공간 17곳과 작가 60여 명이 함께 기획하고 있다. 새로운 대안적 아트페어로서 활약할 수 있을까?

❼ 300/20
800/40, 300/20, 200/20. ‘방’을 구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할 법한 이 숫자들은 ‘보증금/월세’를 지칭하는 기호로 인식되겠지만 사실 청계천 인근 상가에 들어서 있는 미술공간 세 곳의 명칭이다. 물론 실제로 입주한 상가의 계약금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하다. 자매 공간으로 운영되는 이들은 상호는 비슷하지만 각 공간이 추구하는 운영 취지와 방식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중에서도 세운상가 3층에 있는 300/20은 전시 및 프로젝트 공간인 800/40에서 전시를 선보였던 작가 김갑환 김환중이 2013년 10월에 오픈한 공간이다. 현재는 김갑환 안재훈이 공동 운영하고 있으며 ‘작품 판매’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주로 800/40에서 전시한 작품을 팔지만 그렇다고 고정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300/20 자체에서 전시를 열고 출품작을 그 자리에서 팔기도 한다. 판매는 일반 상점처럼 상시 진열하거나 옥션처럼 고정된 자리에서 진행되지 않고 ‘행사’를 개최해 그 기간 동안만 판매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2014년 3월 15일에 열린 <백일만이천원>은 작품을 판매하는 상황 자체를 이벤트로 만들어 공간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 주기 위해 기획된 행사였다. ‘삼백 경매장’으로 변한 전시장에서 경매사를 맡은 작가가 진열된 작품을 하나씩 소개하고 최소 금액을 상정하면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관객이 경매에 참여해 입찰하는 일반적인 경매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대원의 컬렉션: 세이프티 번트 자세>(3. 30~4. 18)는 전임 운영자였던 작가 조대원이 ‘번트’라는 야구 용어를 인용해 고가가 아닌 작품들을 판매한 전시였다. 또 다른 행사 제목은 <사줘>로 짓는 것도 모자라 포스터에 온통 ‘사줘’라고 쓴 것은 직설적이다 못해 절실함이 느껴진다. 300/20은 작품을 금전적인 가치로 환원시키고 ‘행사’라는 능동적인 이벤트를 결합해 ‘판매’를 단순히 소비하는 개념이 아닌 또 하나의 생산적인 창작 활동으로 전환한다. 현재 300/20은 800/40에서 열릴 작가 김정화의 개인전 <240시간 전시>(7. 17~26)와 연계해 <240시간 세일>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붉은산타 마츠코 언니문석단이 기획한 프로그램 <캔디 Tour, 투어, ツア一.> 300/20에서 열린 〈사줘〉의 포스터 2014
<백일만이천원> 작가 왕자은의 〈삼백 경매장〉 진행 장면 2014
지하 1층 조광사진관자립본부가 있는 충무로 정석빌딩의 입구
조광사진관 자립본부 운영자 2인. 왼쪽부터 · 박다함 박정근.

❽ 조광사진관자립본부
사진가 박정근과 뮤지션 박다함이 운영하는 조광사진관자립본부는 사진관 역할과 소규모 음악생산자들이 결성한 자립음악생산조합의 본부 역할을 겸한다. 주로 평일에는 사진관, 주말에는 공연장으로 운영된다. “충무로 일대는 저녁에 공동화되기 때문에 공연하기에 적합해요. 윗집 요청으로 보통 저녁 7시 이후에 공연을 시작하고, 최근 건물 앞에 생긴 호텔 때문에 가급적이면 밤 12시 이전에 마쳐요.” ‘조광사진관’은 박정근의 아버지가 강동구 암사동에서 운영하던 사진관 이름을 물려받은 것. 2012년 박정근은 트위터에 북한 계정 ‘우리민족끼리’의 게시물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2014년 8월 무죄를 최종 확정받았다. “친구들이 활동하는 지역과 거리가 멀기도 하고 과거 압수 수색을 받았던 곳을 떠나 새로 시작하자는 의미로 충무로로 이사했어요. 조금 큰 공간을 구해 파트너를 찾다가 마침 공연장 겸 사무실을 만들려던 자립음악생산조합과 공간을 공유하기로 했죠.” 박정근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음반 레이블 ‘비싼트로피 레코드’를 운영했을 정도로 언더그라운드 음악계 뮤지션들과 친분이 두텁다. 그래서 현재 사진관은 증명사진, 가족사진 촬영 등 ‘동네 사진관’ 기능도 하지만 박정근의 작업실이기도 하며, 여기서 뮤지션 앨범커버 등의 촬영 업무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박다함은 주로 공연 업무를 맡는다. 조합원의 공연은 물론 합주, 녹음 일정을 관리하고 외부인에게 공연장을 대여해 주는 업무도 한다. 부부가 아니냐는 농담이 자자할 정도로 딱 붙어 다니는 두 운영자는 현재 작은 공연을 함께 기획 중이다. 공연 일정은 jaripmusic.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자생공간’ 뜬다 • ART I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