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이야기

아트인컬처 다시 읽기
2019년 8월호 「괴물 이야기」
2025 / 07 / 14

누구나 들으면 귀가 솔깃해지지만, 막상 만나기는 꺼려지는 미지의 존재들. Art는 지난해 8월호 ‘귀신 이야기’에 이어 ‘괴물 이야기’를 소개한다. 인간과 다른 오싹한 생김새로 공포와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는 괴물은 오래 전부터 신화 종교 민속 예술 분야에 출몰하며 ‘괴물 문화’를 형성해 왔다. 10여 년간 채집한 괴물 282종을 엮은 『한국 괴물 백과』의 저자 곽재식은 고전 문헌을 예시로 들며 한중일의 괴물 문화를 비교 분석한다. 괴물에 관한 시각 자료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인식과 판타지를 미래에 증명해 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경북 안동의 풍산김씨 문중에는 『세전서화첩』이라는 보물이 있다. 말 그대로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그림을 묶어 놓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넘기다 보면 보통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錢別圖)> 정도로 불리는 그림 한 장이 보인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여러 군대가 전쟁이 끝나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림에서 줄지어 있는 병사들 중에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괴상한 모습이 섞여 있다. 온몸이 검은 털로 덮여 있고 색깔이 약간 푸르스름한데 얼굴은 쥐나 개처럼 생긴 짐승 같은 것이 마치 군인처럼 두 발로 행진하며 창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뚜렷이 그려져 있다.

섬세하고 정교한 필체의 그림은 아니다. 『세전서화첩』의 그림은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한 예술품으로 제작한 것이라기보다는 후손들에게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려 주기 위해 참조용으로 그린 것에 가깝다. 그러므로 형상만 봐서는 이 괴물들이 도대체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괴물 중 하나가 글씨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있다. 깃발에는 “원병삼백(猿兵三百)”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원숭이가 병사가 되어 싸운 삼백 명 규모의 부대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괴물 같은 형체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제법 유행했던 원숭이 병사 전설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 후기 지리학의 중요한 자료로 첫 손에 꼽히는 『택리지』는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원숭이 병사 전설을 간략히 소개한다. 『택리지』는 이 병사들을 ‘농원(弄猿)’이라고 부르는데, 농원은 말을 몰 줄도 알아서 말을 탄 채 일본군을 갑자기 습격하며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일본군이 당황해서 대패했다고 설명한다.

『택리지』가 워낙 널리 알려진 책이기 때문에 나는 『한국 괴물 백과』를 쓰면서 이 이상한 원숭이를 닮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농원이라는 제목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농원 내지는 전쟁터에서 싸울 줄 아는 원숭이에 대한 전설은 『택리지』 말고 다른 기록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난다.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두 마리의 싸울 줄 아는 원숭이가 임진왜란 때에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고, 조선 후기 역사 서술의 걸작인 『연려실기술』에는 『일월록』이라는 문헌을 인용하여 네 마리의 싸울 줄 아는 원숭이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난중잡록』에는 이 원숭이의 모습이 괴상했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농원은 마치 커다란 고양이를 닮았다고 한다. 정말로 원숭이를 훈련시켜서 전쟁터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혹은 원숭이와 고양이를 반반쯤 닮았으면서 날쌘 병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괴물 같은 이상한 짐승이 임진왜란 때 부대를 이루어 조선군을 도와주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을까? 처음 이 기록을 보았을 때 나는 실제로 농원이라는 괴물 부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조선시대 사람들 눈에 원숭이를 닮은 괴물처럼 보이는 낯선 나라 출신의 병사들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비슷한 사례로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군대의 일부로 참여한 병사들 중에 ‘해귀(海鬼)’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해귀는 말 그대로 옮기면 바다의 귀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자료를 종합해 보면 포르투갈인과 함께 중국에 들어온 아프리카계 흑인을 부르던 이름임이 드러난다. 그 사람들 중에 워낙 힘이 세고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두고 해귀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치 괴물처럼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나는 농원도 바로 해귀와 비슷한 사례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만 해도 농원을 『한국 괴물 백과』의 일부로 포함하는 것을 미루어 두었다. 몸을 놀리는 재주가 좋은 사람을 원숭이에 비유하는 것은 한문에서 흔한 표현이기도 하다. 때문에 농원이 아주 몸놀림이 뛰어난 병사들을 일컫는 비유법이었다고 본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의 발표를 소개한 신문 기사를 보고 나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안 교수는 농원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조사해서 다양하게 설명했는데, 그중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손기양의 일기를 소개한 대목이 있다. 손기양의 일기, 1598년 7월 21일자 내용에는 손기양이 명나라 군대를 돌아보고 군대에 낙타도 있고 원숭이도 있었다는 말을 듣는 대목이 있다. 즉 임진왜란 전쟁 당시에 실제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안 교수는 임진왜란 중에 정말로 훈련시킨 원숭이를 병사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 듯하다. 원숭이의 팔에 칼날을 달아 놓은 팔찌 같은 것을 끼운다면 사람을 해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진짜 사람처럼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생각해 봐도 잘 훈련시킨 사나운 원숭이를 적진에 풀어 놓는다면 적어도 적을 당황시키거나 잠시 혼란스럽게 만들 수는 있을 성싶다.

나는 어떤 목적이건 명나라 군대를 따라 온 두어 마리 정도의 원숭이가 있었고, 그것을 신기하게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퍼지면서 점점 소문이 커진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나 추측해 본다. 상상해 보자면, 실제로는 명나라의 어느 장군이 아끼며 기르는 원숭이 두 마리 정도가 있었는데, 장군이 기르는 원숭이다 보니 갑옷을 입히거나 칼을 찬 모양으로 꾸몄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원숭이들은 주인에게 유독 충성스러워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실제로 일본군에게 덤벼든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말이 도는 가운데 과장되었던 것은 아닐까? 『성호사설』에서 원숭이 두 마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연려실기술』에서 원숭이 네 마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커지고, 『택리지』에서는 농원 부대가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가, 『난중잡록』의 큰 고양이를 닮은 이상한 외모에 대한 이야기와 겹친 끝에 마침내 풍산김씨 『세전서화첩』에 3백 명이나 되는 대규모 괴물 부대에 대한 그림으로 남게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말이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과정도 괴물 이야기가 탄생하여 퍼지는 모습과 같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한국 괴물 백과』를 출판하기 전 결국 농원도 포함시켰다.

농원에 관한 전설은 몇몇 신문을 통해 이후 언급되기도 했고, 안 교수가 상세한 논문을 써서 발표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내가 나름대로 농원 이야기에 대한 결론을 내린 것도 이런 관심을 통해서 여러 자료가 많이 소개되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까마구둥지 블로그’를 통해 이야기 나누었던 많은 분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는 농원 이야기가 이 정도의 관심을 받은 데에는 역시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풍산김씨 『세전서화첩』의 그림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마치 환상 소설 속 괴물 종족이나 외계인 군단을 닮은 그 그림 속 모습이 자꾸만 여러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했지 싶다. 투박한 필체로 그린 그림이고, 게다가 그림에 나오는 많은 병사 중에 고작 몇몇의 모습일 뿐이지만, 수백 년 전의 그림에 나타난 신비로운 형체는 글로 된 묘사나 말로 듣는 이야기보다 훨씬 쉽고 강렬하게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와 비슷한 다른 사례로는 또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아쉽게도 조선시대 이전 한국 괴물 이야기에 대한 그림 자료는 풍부한 편은 못 된다.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공예품을 포함해도 상황은 비슷하다.

12세기 일본의 <신충> 부분. 누에나방의 다른 이름인 신충은 옛부터 신격화되어 악귀를 쫓는다고 알려져 있다. 작품에서는 나방에 호랑이와 말의 형상을 합쳐 그렸다. 나라국립박물관 소장

괴물 그림이나 괴물 조각이 아예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순히 숫자만 따져 보면 많다고도 할 수 있다. 고구려 무덤의 벽화에 나타나는 중국 도교 계통의 신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사례부터,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조선시대 군사들의 깃발에 그려 놓은 그림까지 괴물 그림의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불교 사찰마다 그려진 신중도(神衆圖)나 지옥도(地獄圖)에서도 괴물 형상은 쉽게 찾아낼 수 있으며, 옛 무덤 앞에 설치된 석상 중에도 괴물 모양인 것들이 왕왕 있다. 하다못해 광화문 앞에 서 있는 해치 석상도 분명히 괴물 조각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내가 한국 괴물 이야기에 대한 그림 자료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괴물 그림, 괴물 조각들과 한국에 뿌리를 내린 전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례가 적다는 뜻이다. 고구려 무덤에 현무나 주작을 대단히 아름답게 그려 놓은 그림은 있다. 하지만 정작 현무나 주작에 대한 옛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 거북인 줄 알고 무심코 삶아 먹었는데 알고 보니 현무의 새끼라서 그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든가, 절벽에서 떨어질 뻔했는데 주작이 날아와 등에 올라타고 탈출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기록 속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람들 사이에서 괴물에 대한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퍼져 나가면 그것을 소재로 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생기기 마련일 텐데, 그런 사례는 매우 부족한 듯이 보인다.

문자 기록의 양이 모자란 고구려나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로 넘어와도 상황은 비슷하다. 해치는 중국 고전에 나오는 괴물로 조선에서 흔히 높은 벼슬아치들의 옷 가슴팍에 그림을 붙이는 풍습이 있어서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졌던 짐승이다. 요즘에는 해치가 불의와 싸운다거나 화재를 막는다는 이야기도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해치에 대한 전설이 사람들 사이에 남은 기록은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우연히 해치를 잡은 사냥꾼이 있었다는 이야기나, 먼 옛날 해치가 살았던 동굴이 있었다는 식의 간단한 전설조차 사례를 찾기 어렵다. 중국식 장례 풍습이 전해지면서 생긴 방상씨 같은 괴물이나, 조선 궁중에서 멋진 깃발로 만들어 그림을 그려 놓았던 백택, 삼각 같은 괴물 역시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전설로 자리 잡은 예는 거의 없다. 현무 주작 방상씨 백택 삼각 같은 다양한 괴물 형상이 중국 문화가 유입되면서 의례적이고 장식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런 것이 어디엔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이 상상할 정도로 깊이 들어오지는 못한 듯싶다.

반대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괴물 이야기를 누군가 그림이나 조형물로 만든 사례 또한 드물다. 강철은 조선 후기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괴물 이야기의 대표로 꼽아 볼 만한 소재다. 용과 비슷한데 털이 난 듯한 모습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재난을 일으키는 이 짐승은 조선의 독특한 괴물로 잘 알려져서 여러 사람이 그에 대한 전설을 기록으로 남겼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은 중국 청나라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조선만의 특이한 괴물로 강철을 언급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잘 알려져 있었던 강철을 누군가 그림으로 그린 예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른 괴물도 상황은 비슷비슷하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거인 이야기가 자주 나왔는데 그런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드물고, 바다사자나 물개와 닮은 형상에 가까웠다고 하는 독특한 조선의 인어 이야기에 대해서도 그림으로 남긴 자료는 내가 아는 한은 없다. 그렇다 보니, 조선의 옛 괴물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시각화된 것과 실제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돌고 있던 괴물 이야기는 따로 노는 경향이 강해 보인다. 즉 공을 들여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으로 만드는 것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엄숙한 의례적 상징이나 외국에서 유래한 종교적 도안을 따르는 것들로 제한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 괴물들이 민간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 느낌이다.

한편, 민간에 자생해서 탄생한 재미난 괴물 이야기를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불충분했다는 생각도 든다. 괴물 이야기가 이것저것 돌고 있었지만, 주술적인 힘을 갖고 있거나 지켜야 할 의식에 필요한 괴물 모습이 아니라면 굳이 그것을 시각화해서 기록에 남기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로 여겼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괴물 그림이나 조각 자체를 그저 즐기고 재미있는 볼거리로 보며 놀고 후대에 남겨 준다는 것의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시각 자료의 부족은 이웃 일본이나 중국의 비슷한 시기 문화와는 대조를 이룬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요괴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여 다양한 요괴 이야기를 여러 화가가 앞다투어 그리고, 그것이 여러 출판물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하나의 예술 조류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 때문에 대중이 다양한 요괴 이야기를 여러 가지 그림을 통해 과거부터 넉넉히 즐기고, 당시의 자료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도 많다. 19세기에 이르면, 이미 이런 여러 가지 일본 요괴에 대한 그림들을 서로 연결하거나 정리하려는 시도조차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다.

중국의 사례는 일본과는 다르지만 역시 괴물에 대한 시각 자료의 풍부함은 한국에 비해 월등하다. 고대 문헌에서부터 내려와 이미 고전으로 자리 잡은 여러 가지 괴물 이야기나 중국 토착 종교 속의 괴물을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은 원래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게다가, 시대 변천에 따라 대중문화 소비가 성장하면서 대중 취향의 괴물 자료가 더욱 늘어나기도 했다. 『서유기』 『봉신연의』 같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괴물을 그린 출판물의 삽화나 그림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고, 그에 맞추어 공연 문화가 같이 성장하면서 괴물들을 표현한 가면, 인형도 만들어졌다.

이런 방대한 자료의 뿌리 덕택에 현대의 작가들은 일본과 중국의 전통 소재를 보다 쉽고 가깝게 느끼고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컴퓨터 게임이나 영화를 만들 때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전통 디자인 요소를 활발히 개발해서 생활 속에 스며드는 문화를 이끌어내는 데도 과거의 시각 자료는 훌륭한 자원이 된다. 말하자면 문화의 산맥에서는 괴물 그림이 석유고 귀신 조각상이 황금이다. 그런 석유와 황금이 일본과 중국에는 풍부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으로 나라마다 다른 경제 발전의 수준을 제시해 볼 수는 있다. 경제 규모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현격히 작았던 조선에서 출판이나 대중의 문화 소비가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하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선에서 신기한 괴물 이야기를 다룬 책이 출판된다고 해도 팔리는 양은 적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제작비용을 들여 삽화를 같이 싣기란 힘들다. 또한 향유하는 사람의 숫자가 적다면 그중에서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도 낮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단순한 경제 규모의 차이 이상으로 즐기는 문화, 재미로 보는 문화에 대한 기록과 보존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요즘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부르는 글이 여러 곳에서 종종 보인다. 그 말처럼 국가에서 역사 기록으로 중시한 자료는 풍부하다. 하지만 기록의 나라답지 않게 민간 분야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 그림이나 시각화된 자료는 더욱 적다. 역사 기록을 위해 조선 사람들이 법과 제도를 만들어 중요하게 여긴 실록의 글이나 의궤의 그림이 방대하고 출처가 정확하다는 점은 대단히 훌륭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국가의 권위로 지정되지 않은 기록 중 다수는 별 가치 없는 것으로 무시되어 그냥저냥 사라져 버린 듯싶다. 19세기 조선 문화의 걸작 자료집인 『오주연문장전산고』가 고작 몇십 년이 지나 군밤 장수의 포장지로 쓰이다가 발견되었다는 농담 같은 일화도 있을 뿐 아니라, 지금 보면 귀중한 자료가 틀림없을 여러 대중 소설이라든가, 무당이나 역술인들이 그린 귀신 그림, 조선시대 어린이들이 갖고 논 인형이나 딱지들이 그냥 휴지로 사라져 버린 예는 무수히 많을 거라고 본다.

정말 안타까운 순간은 대중문화의 기록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일이 현대에조차 필요한 만큼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조선시대 괴물에 대한 시각 자료가 부족한 것을 아쉬워하는 우리가, 정작 우리 시대의 자료를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과연 당당할 수 있을까? 1977년부터 방영된 TV극 <전설의 고향>에 나온 수많은 귀신과 괴물의 모습을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전설의 고향>이면 한국 귀신, 괴물의 대표가 아닌가?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방영된 분량은 그나마 자료를 구하기가 수월한 편이지만 1970년대, 1980년대 방영분에 대한 영상은 방송국에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미국 TV 영상물은 크게 인기도 없었던 연속극의 1950년대 방영분까지도 VOD나 블루레이로 구해서 전편을 누구나 찾아볼 수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전 국민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전설의 고향>마저 그 영상을 볼 수 있기는커녕 전체 방송분 제목과 출연진을 확인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하물며 포털 사이트가 망할 때마다 사라지는 웹툰이라든가 웹소설, 도서관이나 미술관에 자리를 잡지 못한 만화책, 장난감, 영화 전단지 같은 것들은 얼마가 나타나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만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자료를 좀 더 챙기고, 재미있을 만한 자료라면 당장 크게 대단해 보이지 않더라도 잘 보관하고 공유하는 데 우리는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 덕택에 요즘은 자료의 보관과 공유가 대단히 간편해졌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옛 자원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잘해 나간다면 우리 다음 세대에게는 무엇인가를 남겨 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잊힌 한국의 옛 괴물의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해 두는 작업을 시작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한국 곳곳에는 건물이 무너져 터만 남은 유적지나, 성벽의 흔적만 남은 옛 성터가 많은 편이다. 만약 이런 곳을 관광지로 만든다고 억지로 건물을 복원해 세우면 그 과정에서 도리어 유적이 파괴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터만 남은 유적 위에 옛 괴물 모양의 조각상을 그 시대와 의미에 맞게 여럿 만들어 올려다 놓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괴물 조각상을 공원 모양으로 꾸며 두면 유적을 부수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무너진 유적의 느낌에 어울리도록 일부러 부서지거나 낡은 모양으로 괴물 조각상을 만들면 더 재밌을 것 같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터에 부서진 도깨비 조각상이나 머리 없는 귀신 병사의 닳아빠진 조각상이 그 시대에 맞는 옷차림으로 이리저리 쓰러져 있다면 제법 운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괴물 원숭이 부대 이야기를 다시 찾아 돌아볼 수 있었듯이, 우리가 괴물로 꾸며 놓은 장소를 보고 어쩌면 미래의 누군가가 또 다른 잊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찾아내고, 또 무슨 아무도 하지 못한 상상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