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청년의 말.말.말.
‘말’은 언제나 세상을 반영하며 진화해 왔다. 인터넷 상에 떠도는 비속어와 은어도 마찬가지. 연령과 취향 등으로 쪼개어진 특정 커뮤니티 내에서 국적불명의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말들은 다양한 성격과 기능을 갖고 있는 각종 웹게시판과 SNS, 그리고 컴퓨터게임을 통해 널리 퍼져나간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PC와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구동되는 온라인 네트워크는 더 이상 가상현실이 아닌, 그 어느 공간보다 리얼한 실재계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정서를 살피고, 소통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들이 사용하는 ‘말’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때 ‘청년 논객’으로 불렸던 필자 노정태는 근자의 청년문화를 설명하는 데 핵심이 될 만한 ‘말’ 21개를 꼽아, 그 정의는 물론 ‘기대감소의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청춘의 군상을 묘사한다. 그가 선택한 키워드의 ‘짤’로서, 자칭 ‘김치 후죠시’ 진정윤의 이미지 아카이브를 일부 공개하는 수행적 콜라보레이션도 함께 선보인다.
21세기 초반 대한민국 청년 문화의 가장 크고 중요한 흐름이 어디서 시작되었냐고 묻는다면, 그 ‘어디’는 물리적 장소가 아닌 한 웹사이트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딱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그 웹사이트는 당연히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m, 이하 디씨)일 것이다. ‘DCinside’에서 DC란 디지털카메라를 뜻한다. 디씨는 본래, 사이트가 처음 만들어질 무렵 가장 핫한 전자기기 중 하나였던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리뷰 및 사용기가 올라오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디씨는 그렇지 않다.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정보가 아예 안 올라온다는 말이 아니다. 미약하게나마 그 기능은 지금도 살아 있다. 중요한 것은 디씨라는 사이트가, 운영자들이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이렇다. 디지털카메라의 사용자 및 잠재적 구매자가 많으니, 당연히 그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올라와야 한다. 그런데 모든 사진들이 똑같은 게시판에 올라올 수는 없으므로 주제별로 게시판이 나누어졌다. 그 하나하나를 ‘갤러리’라고, 줄여서 갤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갤들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가장 흥했던 곳은 ‘여자친구 갤러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자친구를 찍어서 올리는 갤러리인데, ‘남자친구 갤러리’가 생기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각 갤에서는 뭔가 히트작이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것들을 모아서 정리해 주는 ‘히트 갤러리’, 줄임말로 ‘힛갤’이 생겨나면서부터 뭔가 분위기가 묘해졌다.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만 올려야 한다는 법은 없으므로 사람들은 합성 사진도 이것저것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을 모으는 ‘합성 갤러리’도 생겼다. ‘힛갤’과 ‘합갤’의 등장은 디씨의 성격을 재정의하는 한 분기점이 되었다. 단지 카메라의 성능을 시험하고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디지털 이미지를 올리고 자랑하며 시시덕거리기 위한 공간으로 디씨의 속성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이트 관리자 측도 이런 변화에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갤러리에 게시물이 올라오면 특정 주제에 해당하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을 ‘짤림 방지’용 사진, 즉 ‘짤방’이라고 불렀고, 두 글자도 너무 길었기 때문에 곧 짤로 축약되었다. 오늘날 인터넷상에서 거의 모든 이미지를 짤이라고 부르는데, 그 어휘의 기원이 이렇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만 한 노인 흉내를 내보았는데, 이렇듯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의 청년층을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다. 스마트폰을 거론하고, 유튜브가 등장하고, 종종 힙스터(2000년대를 전후로 하여 청년들이 다양한 시대의 문화적 요소를 일상 및 소비, 혹은 반-소비문화의 형태로 녹여 넣은 것) 같은 생경한 어휘도 나온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의 문제적 성향을 두고 ‘일간 베스트’, 즉 줄여서 일베 이야기가 한번은 나오게 마련이다. 호남 사람들을 ‘홍어’라고 거침없이 비하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노알라’(노무현+코알라), ‘노운지’(노무현+운지[투신자살을 뜻하는 은어]) 등으로 부르며 시시덕거리는 그 일베 말이다. 그마저도 디씨의 파생물이다. 앞서 우리는 디씨의 힛갤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힛갤에 올라가는 게시물들이 나름의 패턴을 띠고 식상해지자, 디씨 내의 여러 맥락과 맞물려, 외부에서 디씨 게시물 중 재미있는 것들만 긁어 보여 주는 사이트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베다. 오늘날 가장 문제적인, 혹은 문제적이라고 여겨지는 인터넷 문화 현상의 근원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 디씨라는 기원의 장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베가 됐건, 나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스스로 믿는 ‘오늘의 유머’, 즉 오유가 됐건, 현대 한국에서 활발히 돌아가는 웹 커뮤니티들은 결국 어떤 디씨 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드래그와 복사가 가능한 텍스트로 쓸 때보다 카카오톡 메시지 등의 형식을 빌려 짤방으로 만들었을 때 더욱 잘 전파된다. TV에서 지나가는 순간적인 장면들을 캡처한 짤이 흥하면 그것은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국밥을 먹고 어묵을 먹는 등의 모습은 심지어 그를 싫어한다고 공언하는 이들이 모인 사이트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업데이트되고 또 조롱의 대상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강력한 ‘먹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지 ‘짤’은 언어 ‘썰’을 압도한다.
짤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기존의 당위적 논리가 아니다. 그것을 타인에게 제시하는 순간 그는 (씹)선비라고 비아냥거림을 들을 수 있다. 괄호 속에 든 욕설형 접두사를 빼고 나면, 선비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선비다. 진리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상대주의가 절대적 진리로 자리매김하고 나니, 어떤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곧장 ‘선비’ 취급받게 되는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이나 세월호 참사처럼 대량의 인명이 희생된 사건을 놓고 어떻게 시시덕거릴 수 있는지, 특히 일베를 보며 많은 이들은 의문 부호를 던진다. 이른바 ‘일베충’들이 말하는 바 그 자체를 해석하고자 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인터넷 상의 커뮤니티에서 ‘레벨’이 됐건 ‘등급’이 됐건, 아무튼 무언가를 ‘업’하기 위해서는 해당 커뮤니티의 이용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어야 한다. ‘노운지’가 됐건 ‘전땅크’가 됐건, 온갖 정치적 소재들은 그러한 게임적 리얼리즘 속에서 제 기능을 한다. 요컨대 수십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자퇴해도 벗어날 수 없는 또래집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청년들의 일상화된 언어 속에는 이렇듯 게임의 흔적이 가득하다. 가령 관광이라는 용어를 생각해 보자. 어디 경치 좋은 곳에 가서 둘러보고 놀고 온다는 뜻이 아니다. 디씨의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에서 만들어진 이 용어는, 원래 ‘강간’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강간이란 스타크래프트의 플레이어 A가 플레이어 B를 압도적인 실력 차로 누르고 모멸감이 느껴지도록 가지고 노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런데 강간이라고 하자니 좀 그러니까 용어를 나름 순화시켜서 관광이 되었다. 아마 요즘은 그리 널리 쓰이지 않는 표현일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신조어들이 탄생한다. 힐링도 그렇고, 버프도 그렇다. 힐링은 우리가 지겹도록 들어온 그 힐링이지만, 그 힐링이 몇몇 스님과 교수님의 손에서 ‘인문학 빔’을 맞기 전부터 청년층은 그 단어에 익숙했다. 왜냐하면 MMORPG(대규모 다중사용자 롤플레잉 게임)의 세계 속에서 늘 벌어지고, 반드시 필요하고, 내가 타인에게 호의로 베풀 수도 있는 어떤 요소가 바로 힐링이기 때문이다. 게임 캐릭터의 체력을 보충해 주는 것, 그 본래적 의미가 청년들에게 익숙했기 때문에 ‘힐링 팔이’가 급격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반면 버프는, 게임 캐릭터의 공격력 등을 일시적으로 높여 주는 것인데, 아직 인문학의 향기에 물들지 않은 어휘다. 하지만 청년층은 이미 그 단어를 잘 알고,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나친 확대 해석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크리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나 오늘 학고 크리ㅠㅠ”라고 어떤 대학생이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면, 그 문장의 화자는 ‘학사경고’라는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이다. 그런데 왜 크리인가? 크리는 ‘Critical Damage’의 한국식 축약 표현이다. 치명적인 피해라는 말인데, 그 치명적인 피해는 어디까지나 게임 속에서 (대체로) 랜덤하게 뜰 수도 있고 안 뜰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크리는 게임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제 굳이 게임의 맥락이 없어도 이해될 수 있을 정도의 저변을 확보했다. 내게 어떤 크리가 떴다면, 나는 운이 없었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황인 것이다.
오늘날 갓 대학에 입학한 젊은이들이 ‘현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창구는 단 두 군데뿐임을 상기하자. 학교, 그리고 게임뿐이다. 학교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은어들(요즘에는 ‘담탱이’ 같은 말은 안 쓰는 듯하다)도 있겠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전체 인구의 상당수가 어떤 식으로든 게임을 하고 있으며, 게임을 통해 부가적으로 창조해 내는 문화적 영역이 적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게임으로 먼저 ‘현실’을 배운 오늘날의 청년들은 브뤼노 라투르가 말하는 ‘비인칭 행위자’에 대해서도 너무 익숙하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조종하지 않는 캐릭터인 봇들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봇은 사람처럼 움직이지만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특히 트위터에서는, 봇을 굴리는 이른바 ‘봇주’들이 “계정 뒤에 사람 있어요”라고 울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어 트위터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봇은 정해진 행동만 하고 정해진 말을 내뱉으며, 필요가 없어지면 곧장 폐기처분된다. 게임을 하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청년들은 아마 스스로가 봇이 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의 청년들,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XX’의 줄임말. ‘잡’이라는 접두사 뒤에는 그 어떤 범주가 들어가도 무방하다)들의 운명이 그러하다고, 이미 다들 체념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아직 근대도 이룩하지 못했는데 탈근대 타령이 웬 말이냐” 같은 논쟁을 했던 것이 2000년대 초의 일이다. 사실 저 문장 자체가 근대의 성취에 대한, 당시에는 가능했던 어떤 평가절하를 담고 있기도 하다. 탈근대도 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일단 근대부터 하자, 이런 말은 근대를 성취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을 때 비로소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 결과와 함께, 많은 이들은 멘붕(‘멘탈 붕괴’의 줄임말. 충격과 공포 등으로 인해 본래의 심적 평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을 호소하였고, 한국 사회에도 ‘스스로 발전하는 역사’에 대한 환상이 깨어져 나간 듯하다. 중요한 것은 그 멘붕을 외친 주체가 과연 누구냐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만나 본 사람들의 범위 내에서 고찰해 보면, 20대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대선 결과에 대해 멘붕을 겪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역사의 개념이 너무도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늘 똑같고,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이렇게 구시렁거리는 청년들을 채찍질하여 투표장으로 끌고 가고자 했던 40대 이상이 멘붕할 때, 청년들은 그저 병맛(병신맛, 혹은 병신 같은 맛. 무언가가 병맛이 난다면, 그것은 병신 같다는 소리)으로 가득한 웹툰을 읽으며 드립이나 치고 있을 따름이다. 드립은 애드리브의 줄임말이다. 애드리브는 대본에 없는 대사를 임의적으로 내뱉는 행위를 뜻하는 방송 용어다. 즉 어떤 말이 드립이라면,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실언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문제는 드립이 아닌 정당한 표현과 발화를 뜻하는 은어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말의 무게와 힘이 현저히 약해졌는데, 그 빈자리를 대체하기 위한 무언가가 태어나지는 않았다. 박근혜의 대국민 담화도, 안철수의 연설도, 모두 ‘드립’일 뿐이다. 청년층에게 받아들여지는 바 그러하다는 것이다.
언어의 힘이 시들어 가고 있으며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짤’인데, 웹툰과 짤의 상호 관계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웹툰 중 많은 것들은 인터넷에서 본 짤들을 바탕으로 패러디를 하거나 그것을 레퍼런스로 삼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웹툰은 적당히 편집되어 다시 짤이 된다. 곤죽이 된 채 휘저어진 이미지들이 나름의 규칙을 띤 채 명멸하지만, 심지어 그것을 활용하는 이들조차 자신이 무슨 원리와 원칙에 따라 이미지의 사유를 하는지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한바탕 웃어버리고, “아, 병맛 쩔”이라고 한 마디 내뱉는다.
현재 청년 세대는 자신들의 욕망과 반응의 기제를 객관화된 형태로 포착해 내지 못했다. 이미지와 자료가 범람하는 시대를 헤엄쳐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덕후’와 ‘후죠’들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어로 ‘오타쿠’라 하면 애니메이션 등에 집착하고 그것을 단지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체계적으로 자료화하고 소비하는 이들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누군가를 ‘오타쿠’라 칭하는 것이 상당한 비하의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덕후(일본어 ‘오타쿠’의 한국적 변용)라는 말은 그 문호가 상당히 낮아지고 넓어졌다. 구세대 오타쿠들의 평가 기준으로 보면 어림도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드라마 몇 편을 보고 ‘움짤’ 몇 개를 자기 텀블러에 올려놓은 후 스스로를 ‘덕후’라고 칭하는 장면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심지어 비하의 의미로도 잘 사용되지 않는 듯하다. 스스로를 덕후라고 드러내면서, 즉 ‘덕밍아웃(덕후의 커밍아웃)’을 하며 인기를 끄는 몇몇 연예인까지 등장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후죠는 여성 오타쿠 중 영상 매체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동성애 관계로 커플링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을 뜻하는 용어다. 오타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후죠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았지만, 오타쿠들이 그랬던 것과 유사하게 후죠들은 그들에 대한 어떠한 개념 정립을 거부하는 모양새다. 뭐라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모에(싹틀 맹(萌)의 일본식 훈독.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에 대한 사랑이 싹터 오른다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포괄적으로 ‘내가 저 캐릭터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표현을 할 때 사용되는 어휘)하다고 느끼는 그것을 향한 정의되지 않은 쾌락의 문법을 즐기고 있지만, 그것을 어떤 거울에 비춰 재정의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
청년 세대는 이렇게 한 단계의 필터링을 거친 동성애 문화에 대단히 친숙하다. 후죠 문화, 덕후 문화가 기저에서 출렁이고 있기에 인터넷에는 게이 코드를 활용한 온갖 2차 창작물이 범람하고 있다. (수많은 영화, 만화 등에 대한 2차 창작보다는, 여기서는 남녀노소 공히 잘 아는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빌리 형’이라 불리는 한 전직 게이 포르노 배우는 디씨인사이드의 합성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디씨 합갤의 ‘필수 요소’가 된다는 것은 그의 이미지가 수없이 많은 디지털 이미지 속에서 콜라주된다는 말과 같다.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하고 싶다면 구글에서 ‘빌리 헤링턴’을 입력한 후 이미지를 살펴보자.) 하지만 마치 덕후와 후죠들이 자신들의 쾌락을 그저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의 논리 뒤에 감춰 두고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 인권 운동을 포함한 사회 각 분야의 동력은 이전 시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상태다.
일찍이 한국 사회는 이렇게 욕망과 의지가 없는, 있더라도 규정되지 않은 연령대의 집단을 만나본 적이 없다. 생존 본능으로 살아 왔고 살고 있는 고령층,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운 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온 386세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심지어 오늘날의 청년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양태마저도 국뽕(國+뽕, 온갖 것들을 애국심과 결부시켜 과도하게 도취하는 행위를 비아냥거리는 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청년층이 즐기는 쾌락을 일관된 논리와 규범으로 포섭하려 하면, 그들은 재빠르게 꼬리를 감춘다. 하지만 그들을 내버려두고 가만히 관찰해 보면, 그들이 향유하는 쾌락과 욕망의 편차는 그리 크지 않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을 뿐 아니라,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격렬한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세대가, 이제 10여 년 뒤면 생물학적으로 사회의 허리 역할을 맡아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팬더를 교배시키기 위해 팬더끼리 교미하는 영상을 보여 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중국 동물원 사육사들의 모습이 머리에 문득 떠오른다. 아닌 게 아니라 디씨에서 시작한 유행어 가운데 많은 것들이 성적 능력의 상실, 즉 고자와 관련되어 있다. ‘10억 받기 vs 고자되기’ 같은 질문이 대표적이다. 이 잘못된 질문-농담은 수많은 형태로 변주되었는데, 결국 이 오작동하는 아이러니가 지시하는 바는 한결같다. 이딴 질문을 하는 나나 그걸 듣고 있는 너나, 돈 없는 고자라는 것 말이다.
가난한 고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화하지도 못한 채 순간적인 모에의 깜부기불을 쫓아다니는 덕후와 후죠들. 욕망이 부활하려면 죄가 되살아나야 한다. 죄는 절대적인 참과 거짓의 구분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21세기는 절대화된 상대주의가 상대적인 진리의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 잡아 버린 그런 시대다. 취향이니까 존중해 달라는 악다구니를 이겨낸 채 십계명을 들고 왔다가 깨뜨려버린 모세처럼 활약할 누군가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 미지근한 지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