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신 이야기
고대부터 인간은 당대의 사고 체계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과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불가사의한 존재를 상상해 왔다. 낯설지만 친숙한 그들의 이름은 귀신 유령 요괴 괴물…. 이성과 합리성을 존중하는 오늘날까지 미지의 존재는 공포물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면서, 혐오감을 유발하는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중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들은 부정하고 배척해야 마땅한 금기의 대상이기만 할까?
Art는 ‘귀신’에 얽힌 관념과 이미지를 다시 살펴보고자 고전 화집부터 동시대 미술작품까지 공포와 관련된 삽화로 지면을 꾸미고, 최기숙 교수의 논고를 싣는다. 필자는 동아시아의 대중문화 중에서 귀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서사를 분석하며 귀신의 실체와 의미를 고찰한다. 주체의 범위를 규정하는 주류 문화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담은 한갓된 공포물이 아니라 윤리와 정의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다. 한과 억울함에서 연유한 귀신이라는 감정은 소름 끼치고 불쾌한 타자가 아니라, 사회 부조리의 피해자로서 상처를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다.
귀신은 온전히 목격자에 의해 존재가 증명된다는 점에서 타자 의존적이다. 본 사람이 없다면 귀신은 없다. 결여나 부재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그저 ‘없음’, 즉 ‘무(無)’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귀신은 스스로 자기 증명을 할 수 없다. 그/녀는 살아있는 사람에 기대어 살아간다. 생명, 삶, 현실은 귀신의 숙주다. 귀신은 스스로 존재 증명이 불가할 뿐더러, 사회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지도 못하므로, 당연히 공인된 소속이 없다. 귀신에게 허용된 공간도, 본적도, 자격증도 없다. 귀신의 최종적 존재 근거는 사인에 못 박혀 있다. 잘못된 죽음이 귀신으로 하여금 삶의 문턱을 나설 수 없게 만든다. 석연치 않음, 의혹, 원한은 귀신의 반투명한 생명을 지탱하는 자기 확신적 근거다.
귀신은 철저하게 감각의 존재다. 귀신은 스스로를 창조하며, 존재를 증명할 ‘거울-타자’를 찾는 데 능하다. 귀신을 본 자는 선택된 자이며, 그에 따른 책무를 갖는다. 귀신을 보는 사람이 압축된 밀도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체를 압박하는 놀라움의 감각은 목격자의 정신과 혼, 마음까지 한꺼번에 뒤흔든다. 공포와 전율은 이에 대해 최종적으로 정돈된 감정이다. 놀라움은 귀신을 감각하는 모든 목격자들의 공통된 체험이다. 주로 그것은 상상된 이야기 속에 재현된 감각으로 한정되지만, 실제로 귀신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면 대체로 차갑고 불쾌한 어떤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불쾌함이 귀신 자체의 것인지, 귀신과 관계 맺는, 또는 귀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불쾌함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아니면 혹세무민을 위해 가장된 규약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해 보자. 아무튼 귀신은 강렬한 포스를 지닌 카리스마의 존재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아시아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은 무조건 주인공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귀신의 포스는 삶과 상상의 영역을 모두 장악한 셈이다).
언어 구조로 보면, ‘귀신’이란 ‘귀(鬼)’와 ‘신(神)’의 합성어다. 주희에 따르면 ‘귀’는 온축되는 것이며, ‘신’은 펼쳐지는 것이다.1)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귀신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중국에서는 ‘귀’라는 단어만으로 같은 의미를 전달했다. 『중용』의 제16장인 「귀신장」에서는 귀신이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만물을 체현시키며, 성대한 덕을 지닌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장횡거(張橫渠)는 『중용』을 주석하면서 귀신을 일종의 기(氣)의 움직임으로 설명했는데, ‘귀’는 음(陰)의 영(靈)이며, ‘신(神)’은 양(陽)의 영이라고 보았다. ‘귀’는 돌아오면서 수렴되는 기이고, ‘신’은 나아가면서 펼쳐지는 기이다. 실상의 차원에서 보면 귀와 신은 하나다.2)
성리학적 맥락에서 다시 ‘귀신’을 ‘기’로 설명해보면, 사람의 육신은 혼과 백이 깃들어 있는데,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다. 혼은 위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 육신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혼과 백을 갖는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육신을 떠난다. 어떤 이유로 혼과 백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게 될 때, 서로 뭉쳐서 이승을 떠돌게 된다. 그것이 귀신이다. 망자의 혼, 정, 신을 발목 잡는 것은 세상을 향한 불쾌한 감각이다. 억울함과 원망, 한의 감정이 귀신의 대표적 감정이다. 귀신이 전하는 두렵고 불쾌한 감각은 이러한 ‘사연’에서 연유한다. 죽을 수조차 없는 사연이 망자가 세상을 여읠 수 없게 붙들고, 귀신을 만들어, 현실을 뒤흔든다. 목격자는 귀신을 외면할 수 없다. 첫 만남의 강렬한 인상에 붙잡혀 제대로 헤어나지 못한다. 귀신은 산 자에게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죽을 수도 없게 혼의 발목을 잡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목격자의 눈앞에 쏟아 붓는다. 귀신은 자신을 보는 사람의 정신을 꽉 붙든다.
귀신을 본 자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다. 그는 붙들린 자, 사로잡힌 자이기 때문이다. 못 본 척 하는 것,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 것이 산 자들의 세계에서는 일상적일 수 있지만, 귀신과의 관계일 때, 그것은 죄악이다. 모른 척한 대가는 혹독하다. 귀신을 부정한 자는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귀신을 보고 듣는다는 것은 어떤 사연에 연루되어 책임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모든 귀신 이야기는 공포담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귀신 이야기를 할 때, 오싹한 분위기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성 때문이다.
한국에서 귀신은 한을 지닌 존재로 간주되었다. 한은 억울함에서 연유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곤경에 부딪히고, 그것이 점점 불거져 삶을 에워싼 굴레가 되었을 때, 원한이 생성된다. 원한을 가진 이가 주변에 있다면 어떤가. 가장 흔한 방식은 모른 척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일단 회피한다. 그러나 귀신은 말한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외면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자가 죽음에 이르는 수순은 모든 귀신담에 공통된 규약이다. 억울한 자를 외면하는 것은 죽어 마땅한 죄다. 그런 이유로 귀신담의 본질은 징후로서의 공포라는 감정이 아니라, 생성과 대처 맥락에서의 정의(justice)의 감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의 처녀귀신 이야기다(요즘은 ‘처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처녀귀신’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가치 함축적인 의미로 전승되기에 사용하기로 한다).3) 한밤중의 관아로 낯선 처녀가 방문한다. 머리는 산발한 채, 피 흘리고 있다. 목격자는 공포에 질려 사망한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아무도 그곳에 부임하려 하지 않는다. 용맹한 관리가 부임을 자처한다. 또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집안이 한미해서 중앙의 요직에 줄을 댈 수 없는 가난한 선비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 위험을 무릅쓰고 지원한다. 귀신이 나타난다. 그는 원래 용감하므로, 또는 다른 방도는 없다는 절박함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 귀신과 독대한다. 귀신은 관리의 용맹에 힘을 얻어, 공손히 절하고 사연을 말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살해된 내력을 들려준다. 귀신의 목소리가 드디어 세상을 향해 전파되기 시작한다. 여자의 억울한 내력은 가족사 비극이다. 주로 치정사건과 재산 문제다. 조선시대 민사, 형사 사건의 주요 비중을 차지하던 일에 다르지 않다.
관리는 문제 해결에 착수한다. 재수사를 하고 시신을 부검하여, 가내의 치정사건, 재산싸움(딱지본 소설 『장화홍련전』에서도 계모가 전실 딸을 살인 교사한 이유는 재산 때문이다)의 시비를 가린다. 억울함이 해소된다. 관리는 문제해결력을 갖춘 정의적 명관이라는 평판을 얻어 출세가도를 달린다. 이로써 그는 한미한 집안을 일으켜 세운, 자수성가의 증인이 된다. 그는 능력만으로도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생성함으로써, 세상은 타락한 듯해 보여도 아직은 생명력이 있음을 알리는 시대의 인물이 된다(이 맥락은 조금 복잡하다. 이야기를 읽고 쓴 이들이 상층의 엘리트 남성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타락을 고발하면서도, 그 세상이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고 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려는 욕망 구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가 폭로되었을 때,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 않고, 문제를 폭로한 이를 포용하는 사회적 포즈를 취하는 것이야 말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권력-제도의 노하우다).
처녀귀신의 피의 흔적은 억울함의 상징이다. 그것은 무서워서 회피해야 할 불쾌한 사건이 아니라, 왜 그런지 이유를 묻고 돌봐야 할 상처의 증거다. 귀신을 공포로 대하려는 태도는 억울함을 단지 타인의 것으로 한정 지으려는 스스로의 이기심과 매정함에 대한 감정적 포장술이다. 피 흘리는 귀신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는 영혼이며, 상처받은 존재다. 귀신은 사사로운 복수를 거부하고 사회적 신원을 요청한 존재다. 귀신은 정의를 믿는 자다. 법률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어 하는 법적 주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기회를 찾지 못해 죽음의 세계에서 삶의 세계로 달려온 억울한 존재, 귀신은 여성이다(귀신 이야기에서 남성은 억울한 원귀가 아니라, 자손으로부터 제사를 받고 죽어서도 가족을 돌보는 가부장, 조상신으로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각주 3번의 책을 참조). 살아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억압된 여성은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회적 발언 주체가 된다. 즉 여성이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 자체를 섬뜩하게 느끼는 시선이야말로 불편부당한 감각이다. 혐오(무시와 거부의 감각)가 공포로 전이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을 수도 없는 억울함은 단지 듣는 귀를 만남으로써 해소된다. 왜냐하면 듣는다는 것은 듣고 흘려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책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누군가 아파서 울고 있을 때, 그저, 그렇구나, 너는 아파서 울고 있구나, 라고 반응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누군가 아파서 울고 있다면, 어디가 아픈지 또는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묻고 궁리해야 한다. 개인의 고통에 대해 주변의 타인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의료보험과 각종 복지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만, 그에 앞서 가장 사람다운 처신은 그/녀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현대는 대체로 이 질문을 의사에게 위임하는 방식으로 마음의 의료화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의 마음, 태도, 감정에 대한 단련은 여전히 필요하다).
한국의 전통적 귀신은 단지 억울한 사연을 산 자에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듣는 귀를 찾는 것은 귀신으로서의 자기 책임성이다. 들어줄 사람을 찾을 때까지, 귀신은 죽을 수가 없다. 사회적 부패와 모순, 부정과 비리가 귀신을 출현시켰다면, 귀신을 사라지게 하는 것도 사회의 몫이다. 누군가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다면 귀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면, 귀신을 피할 도리는 없다. 귀신으로 인해 사회적 공포와 불안이 증식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사회의 부정부패가 증폭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서는 귀신담이 관리의 용맹과 정의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투영한 이야기로 구조화되었다. 관리는 죽을 수도 없게 억울한 사건에 휘말린 귀신의 내력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의 공감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태의 시비곡직을 명백히 밝힐 수 있는 정의감도 갖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죽음을 불사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 <내부자들>(감독 우민호, 2015)을 보더라도, 사회 비리에는 각종 세력과의 결탁이 연루되어 있고, 이것을 무마하려는 각종 노하우도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척결하려는 데에는 엄청난 공력과 비용, 희생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흥행은 이에 대한 대중의 공감 구조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도 새롭게 생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공감 능력, 정의감, 용기는 관리가 갖추어야 할 자격 조건이다. 출신이 한미한 관리가 이 일을 도맡는 것으로 설정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신분제 사회의 패착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집안이 좋고, 학식이 높다는 것과 사회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 정의를 회복시키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뜻이다. 귀신담이 한갓된 공포담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이웃으로서의 책임감, 돌봄의 윤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모든 귀신담이 공포담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귀신 이야기는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다. 못다 한 사랑 때문에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귀신담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 흥행한 로맨스 멜로 영화인 <지금, 만나러 갑니다>(감독 이장훈, 2018)는 동명의 일본 영화(감독 도이 노부히로, 2004)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여자 주인공은 귀신이라고 부르기 부적절할 정도로 아름답고 청순하다(여주인공을 맡은 배우 다케우치 유코와 손예진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런 감정을 갖게 했다). 여자는 몸이 죽은 아내이며, 넋이 죽은 엄마다. 여자가 현실로 살아 돌아왔을 때, 영화 속의 가족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여자가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귀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정체를 폭로하는 순간, 귀신은 더 이상 사랑스런 아내, 친밀한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초대를 받지 못한, 가엾고 두려운, 망자의 처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은 여자를 귀신으로 대하지 않는다. 정체를 모른 척 하는 게 관계 지속의 규칙이다(이 규칙은 21세기 영화의 새로운 문법이 아니라, 15세기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도 발견되는 아시아의 역사화된 전통이다).4) 이 암묵적 동의에 참여한 것은 단지 영화 속 인물만이 아니다. 관객 또한 공모자다. 사랑과 정념이 이어짐으로써, 못다 이룬 사랑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감정 구조에 스크린 안팎의 모두가 빠져든다. 사랑은 지속되고, 로맨스는 완성을 향해 치닫는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공감 구조는 아시아의 문학사에서 이미 익숙하다. 귀신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전기소설의 정서 구조와 상상력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15세기 조선의 『금오신화』, 17세기 중국의 『요재지이(聊齋志異)』(저자 포송령), 18세기 일본의 『우게쓰 모노가타리(雨月物語)』(저자 우에다 아키나리)는 모두 사람과 귀신이 사랑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귀신이 등장하는 아시아의 전통적 서사는 귀신과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의 만남에 대한 거대한 은유를 담아냈다. 귀신과 사람은 성별이 다르다. 이들의 만남은 음양의 공존이자 생사의 화해다. 그리움, 사랑, 욕망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양자 간에 충돌 없는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정념이 경계를 허문다.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저승에 간다고 한다. 저승은 미지의 영역이다. 산 자는 가본 적이 없고, 죽은 자는 그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 생과 사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결별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이 저승이라는 공간을 만들었지만, 그 공간의 실체는 다시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좋았던 한때는 기억 속에 있고, 완벽한 인생은 상상 속에 있다. 현재는 기억과 상상에 밀려 부유하며 흔들린다. 귀신은 미련, 아쉬움, 그리움을 채워주는 감정의 촉매다. 귀신은 아름다운 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사랑은 귀신같은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귀신같은 사랑은 이 세상에 없다(이에 대한 반발을 환영한다. 사랑에 대한 믿음과 현실 증거에 대한 수집이야말로, 어쩌면 이 확고한 문장이 품고 있는 강렬한 내적 욕망이다).
그렇다면 귀신은 진짜 있는 것일까.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본 사람에게 들었다는 이도 있다. 귀신은 감각의 존재이지만 또한 이야기의 존재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귀신담은 그것의 가장 정교한 직조물이다. 이야기 속의 귀신은 가장 마지막에 자기 존재를 밝힌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귀신이 정체를 밝히는 순간은 이별을 고할 때다.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숨기는 것이 진짜 정체다(드라마 속의 남장여자, 위장간첩, 스파이, 지구에 온 외계인, 착한 척 하는 나쁜 사람, 서민인 척 하는 재벌, 또는 그 반대 등). 숨겨진 것을 고백하거나 폭로되었을 때, 좋은 방향이든 그 반대로든, 관계는 전환되고, 삶은 전복된다. 귀신이 자기 정체를 고백했을 때, 고상하게 위장된 현실이 난폭함을 드러내고(처녀귀신담), 다정한 연인/부부/가족이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는 것(로맨스 귀신영화)은 이 때문이다.
지난겨울 개봉되어 1,400만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 영화 <신과 함께>(감독 김용화, 2017)는 망자가 저승에서 심판을 받는 과정을 판타지로 그려낸 동명의 만화(작가 주호민)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 속의 귀신은 생사를 경계 없이 넘나들지만, 현실에 개입할 수는 없다. 귀신이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직접 인간 세상에 개입할 자격은 주어져 있지 않다. 영화 속의 귀신은 일본의 전통 연극 ‘분라쿠(文樂)’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배우가 인형을 움직여 연기하는 것처럼, 사람을 움직여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모습을 드러내어 행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뒤에는 검은 천을 뒤집어 쓴, 귀신같은 힘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가해한 어떤 힘에 이끌린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 귀신들렸다, 귀신에게 홀렸다고 말한다. ‘귀신은 없다’라고 하고, 귀신을 믿는 것은 미신이라고 하면서도, 언어적으로는 여전히 귀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귀신을 대하는 이중 감정은 역사화된 것이다. 귀신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단지 산 자에게 무게 중심을 두어, 주체적이고 의지적인 처신, 태도, 삶을 유지하도록 격려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의미 맥락은 망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제사를 의례화하면서도(망자가 귀신이 되어 온다는 전제), 귀신의 실체를 부정(‘괴력난신’은 말하지 않는다는 『논어』에 근거를 둠)하는 유교 문화의 역설적 구조, 또는 중첩적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귀신의 감정적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공포와 전율, 부정과 배척, 거부와 혐오에서부터 연모와 애정, 참회에 이르기까지 귀신을 둘러싼 정념의 파장은 언어와 감정,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장구하다. 귀신은 각 시대의 주요한 문화 콘텐츠(전기소설 야담 영화 드라마 연극 만화 웹툰 등)의 소재였으며, 예술가와 작가의 영감을 자극하는 창조적 촉매이기도 했다. 장국영과 왕조현의 영화로 널리 알려진 정소동 감독의 홍콩영화 <천녀유혼>(1987)의 원작은 중국 청대에 창작된 『요재지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는 일본의 민간 신앙에 유래를 둔 각종 귀신과 요괴들이 출현한다. 이마 이치코의 만화 『백귀야행』은 귀신과 요괴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의 정수를 담고 있다.
합리성과 이성을 존중하는 문명화 과정의 흐름 속에서 귀신은 미신과 야만, 혹세무민의 부정적 매개로 비판받았지만, 그러한 비판의 여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믿음 상상 문화 예술 민속 신앙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각 시대의 문제와 가능성, 신념과 기대를 투영한 문화적 매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없으면서도 있는 것,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존재, 알지만 표현하기 곤란한 상황이나 사건, 그것들 사이에 보통 명사로서의 귀신이 있다. 아시아에는 예로부터 귀신이 존재하며, 현재까지도 사회와 문화, 예술, 내면과 소문 속에 깃들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을 둘러싼 공통 감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욕망 제도 윤리 법을 성찰할 수 있는, 부정하고도 가장 확실한 단서를 공유한다. 차갑고도 투명한, 어둡고도 음습한 그곳에, 낯설고도 익숙한 계절처럼, 당대 사회의 불편부당한 문제와 접속해 무한대의 변신을 하고 있는, 귀신이 살고 있다. 귀곡성은 한갓된 공포의 오락물이 아니라, 세상의 공기를 신체 삼아 죽음의 사연을 써 내려간, 목소리로서의 자기 증언이다. 이 세상이 정의롭다면 귀신은 없다. 역설적으로 말해, 귀신을 창조해 낸 그 사회는 정의롭다.
1) 주희, 『주자어류』 1권, 허탁·이요성 옮김, 청계, 1998, 59, p.360.
2)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된 ‘귀’ ‘혼’ ‘백’의 의미에 대해서는 Zeitlin, Judith T. 『Historian of the Strange: Pu Songling and the Chinese Classical Tal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p.4~5를 참조.
3) 해당 이야기는 유사한 이야기 몇 편을 합해 통합된 스토리로 만들어 본 것이다. 구체적인 이야기의 목록에 대해서는 최기숙, 『처녀귀신』, 문학동네, 2010 및 이 책에 인용된 필자의 논문을 참조.
4) 『금오신화』에서 귀신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최기숙, 「귀신의 처소, 소멸의 존재론: 『금오신화』의 환상성을 중심으로」, 『돈암어문학』 16, 2003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