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인류와 지구의 공생
환경 문제가 시급한 의제로 떠오르는 지금, ‘생태’와 ‘공생’은 동시대미술계에도 뜨거운 이슈다. 젊은 작가들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반성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해체한다. 이들은 주로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을 제시하기보다 리서치, 워크숍, 퍼포먼스 등 과정 중심의 작업으로 ‘공론의 장’을 형성한다. 자연물과 폐기물을 재료로 사용해 작업에 친환경적인 방식을 도입하며, 동물을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감하는 타자로 인식하고 있다. 과학적 분석과 예술적 상상력을 결합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기물의 세계를 디지털로 시각화하고, 근미래의 자연 풍경을 가상 현실에 구현한다. 또한 큐레이터는 기획 과정에서 환경 윤리를 의식하며 지속 가능한 전시 디자인을 고민한다.
전 지구적 역병의 창궐은 기존의 제도와 규범, 환경을 심문하게 하였다. 이성과 합리 위에 구축된 오늘의 근대성은 끊임없는 반문의 도마에 오르게 되었으며, 인간 중심적 시선과 사고는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러한 오늘의 조건에서 홍이현숙의 작업은 몹시도 유효하다. 홍이현숙은 도식화된 삶의 양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복시키는 작업으로 사회의 규범과 보편적 인식에 균열을 가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최근 그는 자연과 동물을 정복과 지배, 도구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의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전면적 개편을 요구한다. 때로는 시각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근대적 이성을 전복하고, 고정된 인식의 프레임 바깥으로 시선을 확장하기 위해 시각을 배제한 여타의 감각을 동원하며, 그가 상상한 주술적 무대 위로 관객을 적극 끌어들인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에게 이제까지 영위해 온 삶의 방식을 재고하도록 하며, 사회의 관습적 행동 양식에서 벗어나 사고를 확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새로운 감각을 일깨움으로 타자 되기를 기꺼이 요청하는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발 딛고선 세계의 가공할 속도에 제동을 걸어 이 세계를 추동하는 원리라고 믿어왔던 체계를 의심하게 된다.(김성우)
결국 오늘날 인류의 고민은, 지구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수렴된다. 그것은 물리적 생존 그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인간계에서 유용하게 작용하는 생존 역량의 편차에 지배받지 않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다양한 개체가 일정한 삶 질을 유지하면서 공생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열망과도 연결된다. 각자 바라보는 ‘살기 좋은 세상’의 조건이 다르다는 것과, 내가 동의하는 관점으로 세상이 운영되어야만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여긴다는 점이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 관계망에 대한 필요성은 눈의 위치를 우주로 보내거나(행성적 비전), 흙의 세계(우드와이드웹)로 옮겨놓는다. 우주에서 본다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국가 중심의 위계질서에 추종하거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 같은 것은 무의미해진다. 김경태가 사물을 보는 방식에서 행성적 비전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을 발견한다. 황선정이 <탄하무 프로젝트(Tanhamu Project)>에서 소개한 우드와이드웹은, 그 타당성과 진위 여부에 대한 과학계의 논란에도, 공동체의 선한 작동 방식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투사한다.(김지연)
‘공생’은 코로나19 이후 떠올랐던 주요 의제였으며, 생태와 기후 위기에 대응하여 행성 차원에서 지구 종이 함께 사는 방식을 재사유하도록 촉구한 포스트휴먼 이론과 그 맥을 같이한다. 염지혜는 공생 발생설 및 진화론 등 광범위한 생명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위기에 처한 지구 종의 전환 국면을 선언적 스토리텔링과 CGI 필름영상으로 보여준다. 한편, 조각가 정지현은 환경 조각, 도시 경관 등에서 찾을 수 있는 물리적 지지체, 조형의 형성과 관계성을 탐구하고 원형에서 변주하는 행위를 조각의 실천으로 삼는데, 이 조각의 변주는 데이터의 속성과도 닮아있다. 큰 규모를 양산하는 매체 특성상 환경과 재료에 대한 고민은 다수의 조각가에게서 발견된다. 정지현은 쓰레기, 폐기물에서 발견한 자재로 도시 어딘가에서 사용되고 버려졌을 물질의 변형을 조각적 맥락으로 가져오며, 물질의 소멸 과정을 포괄한다.(노해나)
살기 좋은 세상?
원전 사고, 기후 위기, 팬데믹 등은 근 십여 년간 우리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화두이다. 이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 삶 전반에 만연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전환은 다른 존재와 생태에 관한 관심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남성적이고, 근대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이분법적 사고의 전회는 작업하는 태도와 방법이 되어 실천의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제로의 예술’의 공동 기획자이자 개별 작가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화용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겠다. ‘제로의 예술’에서는 공동 기획자 강민형, 전유진과 함께 기후 위기, 기술 윤리, 젠더, 돌봄 등 동시대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이슈를 성찰하며 다양한 형식의 실험과 시도로 문제의 대안들을 모의하고 실천하는 활동을 펼쳤으며, 개별적으로 최근 ‘소금’을 중심으로 우리의 생태와 일상을 리서치로 엮어낸 활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생태’의 문제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데 그치지 않는 실천으로서의 ‘생태적 사고’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박가희)
기후 위기, 식량 위기… 현재 지구는 위기 상태이다. 미술계 역시 전 지구적 움직임에 동참하여 환경을 생각하는 전시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 기획자들은 가벽을 최소화하거나 이전 전시의 구조물과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등, 지속 가능한 전시 디자인을 어느 때보다 고민하고 있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관심 역시 뜨겁다. 작가 이소요는 여러 생명 연구에서 파생되는 기술과 윤리 문제를 실험하는 미술가이자 독립연구가이다. ‘생태’와 ‘포스트휴먼’이라는 키워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추천한다.(배예임)
인간 중심의 역사와 세계, 인간-비인간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적 토대 위에 ‘탈인간중심주의’와 동식물, 비인간 사물들과의 관계를 자각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는 추세이다. 페미니즘 관점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다뤄왔던 홍이현숙은 최근작에서 비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과 사유를 바탕으로 ‘비인간-되기’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실험적 작업을 선보인다. 기후 변화, 해빙, 플라스틱 쓰레기 등 전 지구적 재난 상황을 마주한 2020년대는 ‘생태학적 관점과 사유’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현대미술의 주요 화두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공존, 공진화 등의 개념과 함께 전시를 만드는 과정을 재고하며 방법론적 접근을 모색하고 있다. 영상 작가 염지혜는 인간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전 지구적 위기의 현실을 드러내며, 인식의 전환과 회복을 위한 제안을 건넨다.(서지은)
허비(虛費)의 경제, 공통재의 생물학, 탈공리주의 생태학 등의 관점으로 생태를 바라본다. 자연은 지금까지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만 해석되었다. ‘활용’, ‘이용’, ‘필요성’, ‘의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시도된다. 지구에 대한 인류의 영향을 강조하는 ‘인류세’를 비판하는 이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점, 위기에서도 인간의 능력과 관점이 여전히 깔려있다는 것을 언급한다. 허비는 다양성과 비소유를 지향하고, 주체 없음의 주체성을 뜻하며, 비효율과 비인간을 말한다.(성용희)
전 세계에 한국만큼 자연재해가 드물고 사계절이 뚜렷한 곳은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구상 그 어느 곳보다 기후 변화가 다소 더디게 체감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직접적 영향권에 들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재난의 빈도와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외 주요 비엔날레가 기후 변화를 대주제로 삼은 것은 물론, 이러한 이슈를 예민하게 체감한 국내 작가들 사이에서 작품의 화두로 진지하게 성찰되고 있다. 허윤희 작가의 드로잉 퍼포먼스 <빙하가 녹고 있다>는 제목이 명시하는 상징성만큼이나 이 경향을 대표하는 작업으로 기억된다. 매일 산책하면서 나뭇잎을 그리는 작업을 10년이 넘도록 해온 그가 기후 변화를 작업 주제로 삼은 것은 찌 보면 필연적이다. 기후 변화와 멸종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을 펼친 허윤희는 <빙하가 녹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대형 벽에 드로잉을 그린 후 이를 다시 지워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북극의 빙하가 온전해야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 또한 온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대자연을 어떤 스케일로 담아낼까 궁금증을 자아낸 이 작업에서 작가는 작은 체구가 무색하게도 유압 사다리를 이용해 인류가 오래전부터 누리고 번영해 왔던 지구가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의 탐욕으로 망가진 지구를 회복하는 일은 소수의 환경 운동가만의 과제가 아니라 모두가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공동의 의무가 되었다.(신사임)
지구를 회복하는 일
최근 동시대미술에서 기후 위기, 디지털 기술의 변화, 불안한 미래와 취약성을 감각하는 작품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대항하고 사회적 소수자에 연대하는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커졌으며, 기후 재난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생태 감각을 되찾는 것은 작품의 주제뿐만 아니라 물성의 소비 및 전시 제작 과정 전반에서도 반성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중 기후 위기 시대에 ‘생태 감각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돋보인다. 그 예로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은 자본주의 사회 생산과 소비의 경로에서 간과되어 왔던 생태계와 공동체 사이의 분리된 관계에 관심을 갖고, 지리 및 문화적 경계를 넘어 생태 감각으로 소통하는 자리를 구상해 오고 있다.(심소미)
코로나19 시대는 현재 세계 어디에서나 생태적이고 사회적 붕괴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기후 위기의 시대, 근대적 가치를 구축해 온 자본주의 세계는 파국에 들어서고 있다. 과거 식민지 대량 학살에서 지금 다국적 기업의 전 세계적 생태 학살까지 무분별한 파괴가 자행된 것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파국의 시대,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큰 질문이기에 체감하기조차 어려운 듯 보인다. 인도 태생의 저술가 아미타브 고쉬는 『대혼란의 시대』에서 ‘기후 위기는 예술적 상상력의 위기’라 말한다. 우리가 종종 잊는 건, 바뀔 건 어떤 세상이며, 도래할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세계의 구조와 본질을 성실히 분석하고,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좋은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볼 필요가 있다. 파괴적인 인류세만이 유일한 미래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구와 인간이 미래에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는 지구에 가하는 인간의 영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전환을 요구한다. 보편적 인간 해방의 지평에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관점에 ‘생태-젠더-공산’을 재발견하는 사상이다. 이는 여성과 자연을 ‘물질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구조적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에코페미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 여성, 남성이 이러한 대전환적 사유에 함께할 것을 요청한다.(양지윤)
2020년대 시각예술을 이끄는 강한 추동력은 전 지구적인 기후 위기와 생태적 파국에 있다. 여기에 더해서 이러한 상황을 낳은 원인이면서 동시에 해결할 열쇠라고도 여겨지는 과학 기술 또한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화두다. 먼저, 종 다양성의 위기와 생태적 재난들을 목도하며 많은 미술가가 근대적 사고방식을 떠나 다른 관점과 태도로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담론적 지형도와 발을 맞추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기술과 인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비판적/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진영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관점과 태도와 닮아있다.* 공통적으로 탈인간중심주의, 비인간과의 관계를 탐구하려는 경향, 근대적 공간성과 시간성을 비틀어 새로운 관점에서 미시적인 이야기를 발굴하는 연구들이 보인다. 그래서 기후 위기와 생태적 파국에 관한 관심을 앞에 두고 작업하는 이들의 작품은 인간을 중심으로 선형적으로 쓰였던 과거의 한 시점을 꼬집어내고, 비인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편한 뒤 그물망과도 같이 얽혀져 있는 복잡한 이야기로 드러내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작가들은 단일하고 깔끔한 형태와 물성을 가진 작품을 결과로 내놓기보다는 리서치의 결과물을 텍스트로 나열하거나, 채집하거나 수집한 비인간 동식물의 물질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등 과학자나 연구자와 같은 태도로 실험실이나 연구실을 전시의 형태로 개방한 것과 같은 형식을 보여준다(이소요, 김화용). 이렇듯 그동안 기후나 생태를 연구해 온 과학을 적극적으로 예술적 실천의 행위자로 불러오는 경향이 최근 예술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과학 기술적 연구의 현장에 연루된 관객들은 이제 작품과 물리적 거리를 두고 ‘보는 나’와 ‘보이는 너’의 구도에 머무를 수만은 없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하여 일시적인 무대를 만드는 작업도 주목할 만하다(다이애나밴드).(윤민화)
전시의 환경 윤리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미술관은 이제 전시의 환경 윤리를 생각해야만 한다. 철거와 시공을 되풀이하는 전시 공간과 한번 전시하고 폐기될 수밖에 없는 전시 부속품을 윤리적 차원에서 고민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를 고찰하는 전시를 보며 각성이 필요함을 자각했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2021)과 국립현대미술관의 <다원예술 2022: 미술관탄소-프로젝트>(2022)처럼 환경 윤리적인 차원을 고려하여 전시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이동민)
키워드 ‘새로운 여성/성’은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 개개인 간의 애정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양한 종(種) 사이의 사랑 또는 종을 위한 사랑이다. 2023년 지금도 우리는 분단국가에 살고 있고, 반대편의 지구에서는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또 많은 존재를 잃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또 다른 종을 수만 년간 도구화하고 파괴해 왔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매일을 살고 있는 서울과 바다를 건너 이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사랑’이라는 마음과 태도로 ‘공생’의 길을 함께 헤아리는 긴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대단하거나 거창할 필요는 없다는 것, 다만 모두에게 노력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질문을 던져주기를, 오늘을 같이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기대한다.(장혜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