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체’의 미술언어를 버려라!

2013년 5월호 「‘병신체’의 미술언어를 버려라!」
최근 ‘보그 병신체’가 회자된다(「‘병신체’」, 『경향신문』, 2013년 3월 14일자 참조). 패션 잡지 『보그(Vogue)』의 한국어판 기사 중 한 문구. “뉴 이어 스프링, 엣지 있는 당신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은 실크화이트 톤의 오뜨 꾸뛰르 빵딸롱”. 무슨 말일까? 『경향신문』의 최우규 기자는 “날카로운 감수성을 가진 당신의 새봄 필수 품목은 흰 비단결 같은 고급 양장 바지” 정도로 풀었다. 외국어를 뒤섞어서 소리 나는 대로 적되 토씨만 붙인 꼴이니, 최 기자가 풀어 쓴 말이 옳은지 그른지도 헷갈린다. 이 같은 ‘병신체’도 중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신조어에 비하면 약과다(『서울경제』, 2013년 4월 1일자 참조). 다음은 대화 중 일부다. “너 걔랑 썸 타냐?(관심 가는 이성과 잘돼가니?)” “고나리(관리)나 잘하라 그래” “프사(프로필 사진) 바꿔”. 이런 대화가 SNS에서는 버카충(버스 카드 충전),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 돼), 행쇼(행복하십쇼) 등으로 압축된다. 그리고 이런 신조어 중의 일부는 한국어 대사전에까지 오르게 됐다. 사실상 공식 언어가 되는 셈이다.
나는 병신체와 신조어를 공격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없다. 병신체는 병신체를 ‘소화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언어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신조어 또한 신조어를 ‘소비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들만의 새로운 어법일 게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오죽하면 신조어 테스트를 위한 애플리케이션까지 만들어졌을까! 언어도 사물처럼 활용하고 소비하는 자에 의해 생멸(生滅)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유야 어쨌든 병신체와 신조어는 최소한 외계어로서의 독백이나 방백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그들끼리의’ 소리 언어요, 문자 언어이다.
내가 병신체와 신조어를 예로 들어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미술계 내부의 ‘미술언어’이다. 달마다 배달되는 미술잡지를 읽다보면 눈에 거슬리는 문구가 한둘이 아니다. ‘보그 병신체’를 조금 과장해서 빗대어 말한다면 미술잡지에 실린 평론의 거개가 다 병신체를 구사한다. 예컨대, “나의 텔로스는 리좀처럼 뻗어나가는 나의 시니피앙이 그 시니피에와 디페랑스되지 않게 하므로써 그것을 주이상스의 대상이 되지 않게 콘트롤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인용의 편차나 정도의 깊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라캉주의자는 라캉의 언어로, 데리다주의자는 데리다의 언어로, 헤겔주의자는 헤겔의 언어로 문장의 빈틈을 빼곡히 채운다. 심지어 아도르노에서 지젝에 이르기까지 숱한 철학자의 개념어로 직조한 어떤 글은 이해도 해석도 되지 않는다. 그런 글에서는 작가도 작품도 온전히 살아남지 못한다. 개념만 둥둥 떠서 썩어갈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평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작가의 글이다. 작가의 글 중 열에 여덟은 주어 목적어 동사가 맞지 않는다. 주어가 없는 곳에서 목적어 서넛이 다툼을 벌이거나 관념적인 형용구가 마치 목적어인 양 나서서 동사를 끌어당기니 그 꼴이 참 말이 아니다. 한 문장 안에 복문과 비문이 뒤섞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작가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때때로 심각한 수준의 ‘작가 노트’를 볼 때마다 오타 수정과 교열, 윤문의 욕구를 참지 못하고 해치워 버린다. 그렇다고 그렇게 수정된 글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것도 아니다. 자칫 작가의 생각까지도 교정해 버릴 수 있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 아닐 수 없다! 『보그』 병신체나 신조어보다 미술언어의 병신체를 구사하는 평론가와 작가의 글이 더 나쁜 것은 그것이 많은 부분에서 소통 불가능한 외계어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독백과 방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문자 언어는 독자가 아니라 그들 내부로만 수렴되는 기이한 소통 언어다. 그런 미술비평 언어 또는 작가 노트가 양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보그 병신체’나 ‘인문 병신체’의 경우처럼 ‘미술계’라는 독특한 예술 영역 내에서 지적 유희로 가장되는, 그래서 읽히거나 말거나 어떤 지적 수준의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자존하고 마는 ‘과시 언어’의 소통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과시 언어에는 어떠한 자기 진정성의 자기 언어가 없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평론은 미학도 철학도 미술사도 아니다. 평론의 언어는 문학이다. 평론이 문학이라는 명제가 성립될 때, 바로 그때 평론은 미학도 철학도 미술사도 포용한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글 또한 미학도 철학도 미술사도 아니다. 작가의 글은 사유의 에세이다. 그러므로 그 글도 문학이다. 문학의 영역 안에서 평론은 풍요로워져야 한다. 미술평론은 이미지 언어를 문자 언어로 바꾸는 제1차적 기술하기에서 출발한다. 기술하기는 물론 객관적 서술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기술하기를 표현하는 문장의 힘은 오롯이 문학의 힘이다. 비평은 그 힘에 기대어 스스로를 인용하며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이를 다룰 때 미학이 발생하고 철학이 터지며 미술사가 새겨지는 것이다. 작가의 에세이는 때때로 그 깊이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자,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글쓰기의 태도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소설가 김훈이 소설을 쓸 때는 연필과 칼, 원고지 그리고 우리말 사전만이 책상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한다. 나는 종종 『장승욱의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 『말들의 풍경』을 읽는다. 그것들은 ‘한국어라는 하나의 커다란 풍경’을 그린 책이다. 올해부터는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고 내년에는 한글박물관도 건립된다 한다. 우리말, 우리 문자로 쓰는 미술언어를 궁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