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에 대한 생각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지나갔다. 한국은 유독 봄에 수많은 사람들을 비극으로 몰아낸 사건들을 겪어 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희생당한 7,200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 세월호의 마지막 승객이 되어 차가운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바로 우리가 봄의 ‘그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소설가 심상대는 일찍이 광주의 비극을 절제된 감정과 미학적 장치로 풀어낸 단편소설 <망월>을 발표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슬비야, 비가 온다>를 발표,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렇다면 미술은 봄의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심상대는 올해의 봄이 가기 전, 그 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전시 곳곳에서 묻어나는 사건과 기록, 그리고 사람의 흔적을 따라 그는 또다시 펜을 들었다. 봄의 그날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안산으로 가면서 오랜만에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가능하다면 하지 않기로 한 생각이었다. 과연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러한 문제에 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인간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7개월이 지난 재작년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4달 동안 나는 여섯 차례 안산을 방문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소설집에 실을 단편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 때문이었다. 나는 그 뒤 다시는 안산에 가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현재 세월호 희생자 추념전 <사월의 동행>전이 열리는 경기도미술관이 이전 2번이나 방문했던 정부 합동분양소 곁에 있는 건물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안산으로 가면서 오랜만에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가능하다면 하지 않기로 한 생각이었다. 과연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러한 문제에 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인간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7개월이 지난 재작년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4달 동안 나는 여섯 차례 안산을 방문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소설집에 실을 단편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 때문이었다. 나는 그 뒤 다시는 안산에 가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현재 세월호 희생자 추념전 <사월의 동행>전이 열리는 경기도미술관이 이전 2번이나 방문했던 정부 합동분양소 곁에 있는 건물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안산시 초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다시 시작한 ‘생각’의 정체는 한나 아렌트가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한 인간 활동 가운데 ‘행위’에 속한다. 나의 ‘생각’만이 아니라 안산으로 가고 있는 나의 이동 자체가 그러한 ‘행위’였다. 그녀의 분류에 의하면 ‘노동’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한 육체적 동작이고, ‘작업’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그 노동으로부터 재미와 일정한 명예를 추구하고자 하는 활동이며, ‘행위’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넘어 공동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사월의 동행>전 관람을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나의 ‘행위’와 그 행위를 해석하고자 하는 나의 ‘생각’은 미술 감상문을 쓰기 위한 목적이나 미술 감상과 여행을 흥미와 보람으로 여기는 삶의 일면이 아니라 지극히 공적이며 정치적인 행이다.
그러한 점에 덧붙여 나와 같이 창조적 예술 행위에 임하는 예술가들이 이러한 공공의 문제에 관여해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이유와 그 예술창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지난 1년 동안 다시는 안산을 방문하거나 세월호 참사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한 자신의 ‘생각’을 또한 생각하게 됐다. 비겁자의 삶이든 은둔자의 삶이든 세속에 살면서 세속의 문제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자 한 생각도 정치적이지 않은 바는 아니다. 그러니 나는 다시 시작한 ‘생각’을 통해 정치의 권위와 효용성을 무시하고자 하던 태도를 내 존재와 직업이 허용하는 한 인정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상흔을 다시 만나다
초지역을 통해 안산시를 방문하게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는 합동분양소와 단원고 앞 원고잔공원, 내 소설의 등장인물이 살고 있는 월피교 인근 주택가와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록구 하늘공원을 목적지로 했기 때문에 중앙역에서 하차하거나 자동차를 운전해 왔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지금은 봄도 무르익은 오월 중순이다. 하지만 도로변 가로등 허리에는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상흔이 남아 있다. ‘밖에 누가 없나요? 파도 소리 말고 바람 소리 말고’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것, 오직 진실뿐이다’와 같은 문구가 그곳에 붙어 있다. 이전엔 대부분 개인 명의로 내걸었던 족자가 이젠 ‘416 가족협의회’라는 단체 명의로 바뀌었을 뿐이다. 봄날의 햇살 아래로 유모차를 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시민이 많다. 더구나 토요일이라 경기도미술관이 있는 화랑유원지에서 아이들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엄마와 아빠는 그늘에 앉아 야유회를 한다.
그분들껜 미안한 말이지만 갑자기 ‘생각’에 몰입한 나로선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녹색의 풀잎 위로 흰 꽃송이를 치민 클로버가 지천인 연두색 잔디밭은 이곳이 지난겨울 내가 다녀간 합동분양소 앞마당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했다. 그렇게 맑은 날이었다. 햇살도 따사롭기 이를 데 없다. 웬일인지 이곳엔 다른 지역과 달리 아이들이 많다. 그 아이들이 정부 합동분양소 앞에 피어 있는 검은 연꽃 주변에서 뛰어놀고 있다. 검은 천에 공기를 주입한 커다란 연꽃은 최정화의 <숨쉬는 꽃>이라는 설치작품이었다. 연꽃이 불가(佛家)의 상징인 이유는 꽃잎을 180도 활짝 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의미는 비극의 진상이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는 뜻이고, 아직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색채적 저항이라 하겠다.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층계 아래 한쪽에 있는 최정화의 또 다른 작품 <갑갑함에 대하여> 역시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질타다. 일어나고자 해도 종내 일어나지 못하는 로봇의 형상은 참변에 희생당한 동심과 더디기만 한 진실 규명을 은유하고 있다.
미술관 안에도 노인이나 성인은 찾아보기 어렵고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와 학생들로 북적인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이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고 다시는 5월의 봄볕 아래로 나설 수 없는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을 위한 진혼의 예술품을 통해 우리는 왜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예술가의 ‘생각’을 또한 생각했다. 조소희의 <봉선화 기도>는 양손 10개의 손가락 가운데 마주하는 2개의 손가락을 통째 봉선화 꽃물로 물들이고, 그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양을 사진으로 담은 작품이다. 이 작업에 참여한 304명은 손가락을 물들이고 두 손을 모아들고 사진을 찍는 그 시간 동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전시공간 초입에 마련된 ‘기도의 방’에 들어선 관람객은 그 손을 바라보기보다는 그 손이 기도하는 염원의 실체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 전달이 예술가로 하여금 304명의 손을 사진 찍도록 하였을 것이다.
<사월의 동행>전은 ‘동행하다’ ‘기억하다’ ‘기록하다’라는 3가지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 첫 번째 파트인 ‘동행하다’ 전시장 중심엔 거대한 철제 구조물이 놓여 있다. 이는 전시 전체를 구성하는 공간의 디자인으로, 침몰하기 직전 바다 위에 떠 있던 세월호의 뱃바닥을 형용한다. 사고 며칠 뒤 어떤 민간인 해양구조 전문가는 그때 왜 그곳에 대형 풍선이라도 매달아 두지 않았던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권용주의 이 구조물 작품은 그러한 안타까운 질문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조숙진의 <천국의 얼굴>은 패널에 304개의 구멍을 뚫고 그 뒤편에 전등 불빛과 음향을 설치한 작품이다. 나는 이전 합동분양소에서 영정사진 앞에 놓인 수많은 편지와 쪽지를 훔쳐보았다. 그곳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문구는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져 봤으면’ ‘얼마나 춥니?’ ‘하늘의 별이 되었겠지’ 하는 염려와 희원의 내용이었다. <천국의 얼굴>은 저 먼 하늘나라에서 별이 되어 빛나는 304명의 영혼을 시각화했다. 맑고 밝고 화사한 빛으로 빛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 대한 ‘생각’을 단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가 닿은 그곳이 그들을 태운 여객선이 가라앉은 캄캄한 바닷속과 같은 곳이 아니라 종교적 구원의 장소인 천국이 되려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작품에 기록된 예술가의 ‘생각’ 읽기
‘기억하다’ 파트에 참여한 박은태의 작품 <기다리는 사람들>은 팽목항 방파제에서 먼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희생자 유족의 뒷모습 또는 옆모습을 보여 준다. 그날 이후 얼마간 우리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다. 어떤 사람은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머리를 박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다. 뒷짐을 지고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둘이 부둥켜안은 채 서로 위로하는 형상도 있다. 이들이 이런 자세로 그곳에 있을 때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옥을 체험했다. 시신 인양을 기다리던 유족들은 그나마 먼저 인양된 시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그 유족을 향해 투덕투덕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시신을 인양하지 못한 유족이 있으니만치 그때 그들의 박수를 야속하다 할 순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왜 아들딸이 시체로 돌아온 엄마, 아빠에게 박수를 쳐야 했나? 박수는 그럴 때 행사하는 인간 동작인가? 그런 동작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두 손이 있었단 말인가? 이러한 지옥의 풍경을 고스란히 도상으로 옮긴 작품이 이세현의 <붉은 산수>다. 이세현은 군복무 시절 투시경을 쓰고 바라본 비무장지대의 비현실적이고 음산한 적색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붉은색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내용은 현실과 비현실이 논리와 비논리로 직조돼 있다. 이 작품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산수는 수려함이 아니라 기괴한 공포의 대상이다. 딸의 시신을 부여안은 아빠는 ‘어서 집으로 가자’고 울부짖고, 아직 아들의 시신을 건지지 못한 엄마는 그들을 향해 투덕투덕 박수를 치는 그런 풍경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내가 그 앞에 오래 서서 하나하나 그 형상을 감상한 작품은 홍순명의 <사소한 기념비>다. 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오브제는 홍순명이 팽목항 해변에서 수집한 나뭇가지나 빈 병이나 깨어진 유리잔 따위다. 이러한 사소한 물질을 랩으로 염을 해 바닥에 늘어놓은 설치작품과 이들을 그린 그림이 뒷면 벽에 붙어 있다. 홍순명은 평소 어떤 풍경 속에서 소외되거나 하찮게 여겨지는 부분의 의미를 발굴하는 <사이드 스케이프>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가 팽목항에서 창조적 예술가로서 수행하고자 한 기도와 기록의 방식이 바로 이 작품으로 표현됐다. <사소한 기념비> 앞에서 내가 느낀 미안함과 어쩔 수 없음 그리고 서러움은 이 작품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한 예술가의 ‘생각’이 어느 정도 전달됐다는 증거다.
1년 2개월 전, 합동분양소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다른 이들도 누구나 쿨쿨대고 울면서 영정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고의 내막에 대한 원통함이나 억울한 감정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를 울린 대상은 영정사진틀 속에서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너무나 예쁘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희망차고 그러므로 죽어선 안 되고 죽을 수도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록하다’ 파트에 포함된 한 방은 얼른 지나쳐버렸다. <아이들의 방>이라 이름 붙인 전시공간엔 세월호 참사로 이승을 뜬 아이들 사진과 그들의 방을 촬영한 사진이 전시돼 있다. 아직도 아들의 방을 치우지 못한 엄마와 함께 그 방에 들어가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들의 작가정신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살아 남은 자의 책무는 무엇인가
마지막 방은 권용주가 디자인하고 제작한 아카이브 구조물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세월호의 불법 증축된 부분을 닮은 아카이브는 그 형태를 통해 우리에게 심신의 불편함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불편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살아남은 자의 책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곳에서 내 작품을 만났다. 지난해 15명의 소설가가 펴낸 추모 소설집은 나무 독서대에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독서대 밑에는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주세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싶은 문장에.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아이들이 그랬듯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책 맨 앞에 실린 탓에 내 소설에도 형광펜 밑줄이 그어져 있다. 누군가의 엄마거나 아빠거나 또는 누군가를 기억하고자 하는 그들의 친구인지도 모를 독자가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다.
내가 소설 앞에 적어 둔 ‘작가메모’에서는 ‘기억은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란 문장에 밑줄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여백에는 푸른 형광펜으로 적은 이러한 글이 있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학생과 선생님, 천국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했습니다.’ 어쩌면 그날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이 쓴 글인지도 모른다. 같은 색깔의 형광펜은 소설 뒷부분 이러한 대목에도 밑줄을 그어 뒀다.
슬비야, 난 네가 사하라 사막이나 히말라야 산속에 있다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찾아갈 거야. 하지만 넌 어린왕자의 별처럼 아주 먼 별에 있나 보다. 그래서 비 오는 밤이라야 학교 앞으로 올 수 있나 봐.
<사월의 동행>전 관람은 이로써 끝났다. 그 뒤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인 단원고 여학생 슬비가 살던 대동11차 아파트 가동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엔 단원고 진입로 한쪽 분식집에서 슬비를 닮은 여고생들 옆자리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그리고는 원고잔공원으로 올라갔다. 비 오는 밤이면 슬비와 친구들이 영아(靈兒)로 출현하는 바닥분수대가 그곳에 있다. 바닥분수대 곁 놀이터에도 어린아이들이 북적였다. 그들의 엄마는 그늘진 벤치에 앉아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지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아빠는 공원 아래편 배구코트에서 족구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 작은 공원 정상에 서면 단원고 교사(校舍)가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멍청한 꼴로 그곳에 서 있었다.
안산을 다녀온 다음날, 나는 새벽 4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광주광역시로 가는 고속버스 첫차를 타기 위해 첫 지하철을 탔다. 주님의 날이었고 날씨는 맑았다. 피곤했으나 광주에 도착하기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세월호를 생각했고 망월동을 생각했고 소설과 미술을 생각했고 써야 할 글과 이런저런 문제를 생각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익힌 대로 버스에서 내린 뒤 차도를 따라 죽 걸어 5·18기념공원에 있는 5·18기념문화관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당신은 아는가? 5·18, 그 위대한 연대>전은 미술작품전이 아니라 기록자료 전시였다. 당혹스러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술작품이든 언론활동과 집회에 관한 기록이든 정체는 기록이므로, 그 기록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했다.
5·18 해외 아카이브 전시인 <당신은 아는가? 5·18, 그 위대한 연대>전은 5·18민주화운동 36주년을 기념해 5·18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 가운데 해외에서 있었던 5·18 연대활동과 재단의 국제 연대사업 기록물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독일과 미국과 일본 섹션, 문화 섹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추모 섹션으로 이뤄져 있다. 1980년 5월 22일, 광주는 고립된 도시였다. 공수부대의 진압 작전에 맞선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광주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는 전면 봉쇄됐고, 광주의 진상은 외부로 알려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독일 제1방송은 광주에서 벌어진 군인의 무자비한 시민 학살 장면을 방영했다. 이는 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 ARD 산하 NDR 일본 특파원이었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전송한 영상물이었다. 5월 20일, 계엄군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광주로 들어온 힌츠페터 기자는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 장면을 필름에 담아 본사로 송고했다. 5월 23일, 다시 광주로 돌아온 그는 마지막 진압 작전까지 동영상으로 촬영해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이로 인해 5월 28일, 베를린 공대에서는 ‘투쟁하는 조국의 애국시민을 위한 재베를린 한국인 모임’이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같은 날 프랑크푸르트에서도 ‘광주 시민에 연대하는 한국인 모임’이 니콜라이 교회에 모여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올해 1월 25일 독일 북부 라체부르크에서 79세의 나이로 별세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에 대한 추모의 뜻도 포함돼 있다. 2005년 5월 19일,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특별상을 수상하기 위해 방한한 그는 당시 광주에서 목격한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 수 있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것은 모두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푸른 눈으로 목격한 광주의 참상
이 ‘푸른 눈의 목격자’에 관한 기록물과 함께 내가 주목한 전시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 관한 섹션이었다. 이 민중가요는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소재로 한 노래극 <넋풀이 굿(빛의 결혼식)>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합창곡이다. 전남 보성 출신인 박기순은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국사학과를 다니면서 위장취업으로 노동운동을 했고, 동시에 들불야학 교사로 활동하던 중 1978년 12월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윤상원 역시 위장취업으로 노동운동을 하면서 들불야학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지도부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으며 5월 27일 새벽, 도청으로 진입한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했다. 1982년 2월 20일, 양가 가족은 망월동 5·18묘역에서 이들의 영혼결혼식을 치렀고 다음 해 5월, 광주 문화운동가들이 이들을 위한 노래극을 완성됐다. 이 노래극 대본을 쓴 소설가 황석영은 백기완의 미발표 장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작사했고, 전남대 출신으로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한 가수 김종률이 작곡을 맡았다. 이 노래를 포함한 노래극 전체는 운암동 황석영의 서재에서 비밀리 녹음했으며 이후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대량 복사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오정묵의 선창으로 시작되고 광주문화패의 합창으로 이어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단히 장중한 노래로, 특히 오정묵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는 절창이었다.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곡은 고인이 된 남녀가 저승으로 가면서 산 자들에게 남기는 노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와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라는 구절이나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와 같은 후렴 가사는 치열한 투쟁과 죽음으로 귀결된 패배의 절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의지와 용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중적이면서도 비장한 4/4박자 단조 행진곡풍의 이 노래는 곧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노래가 됐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 설명과 함께 가사와 악보가 병기된 메모지가 전시돼 있다. 이 악보가 예술품이었다. 스프링 노트 백지에 볼펜으로 죽죽 그은 오선식 보표와 그 아래 서둘러 쓰고 지운 첨삭의 흔적은 그 흐트러짐으로 인해 흉내 낼 수 없는 걸작이 됐다. 또한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라는 소절의 가사는 작사가의 실력이다. 원작 시에서 이 구절은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로 되어 있다. 보도자료를 얻고자 전시관 이층에 있는 사무실에 들렀더니 한 직원이 내게 김시종 시인의 시집 《광주시편》을 선물했다.
망월동 행 518번 시내버스 창가 좌석에 앉아 받아 온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헤아려 보니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망월동 길은 실로 23년 만에 가는 길이었다. 소설가로 등단한 다음 해 나와 신혼의 아내는 어머니를 모시고 광주시 남구 봉선동 삼익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이태 뒤 이사할 때까지 목표로 했던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장편소설은 쓰지 못했고, 여러 차례 망월동 묘역을 오르내렸건만 겨우 <망월(望月)>이라는 단편소설 한 편을 썼을 뿐이다. 그리고 잊은 듯이 살다가 오늘 다시 찾아가는 중이었다.
‘생각’을 통해 ‘행위’로 나아가다
시내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묘역 입구였다. 23년 전과 뭐가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 볼 기억이 없었다.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영상으로 기록해 전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목격자’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식이 내일 이곳 망월동 구(舊)묘역에서 열린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도록 낯선 길을 걸어 제3묘역을 찾았다. 그곳만은 눈에 익었다. 그곳은 내 단편소설 <망월>의 공간적 배경이며 이전에 여러 차례 오르내린 언덕배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좀 전 시내버스에서 읽었던 시의 주인공을 만났다.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인 그는 제3묘역 한가운데쯤 봉분 낮은 장방형 묘지 안에 누워 있다. <입 다문 말>이라는 시의 부제는 ‘-박관현에게’인데, 시인은 시의 끝에 그에 관해 각주를 달아 놓았다.
* 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광주 5·18민주화운동 관련 혐의로 징역 5년의 판결을 받고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광주민중항쟁이 갖는 ‘의거’의 정당성과 군부에 의한 참혹한 시민 학살에 항의하여 3차에 걸친 40일 동안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을 결행. 끝내 1982년 10월 12일 새벽 절명. 당시 29세였다.
시인이 ‘생각’한 시의 기능과 가치 가운데는 기록도 포함돼 있는 것이다. 스물아홉 살에 옥사한 청년 옆에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숨진 이한열이 누워 있다. 1987년 7월 5일, 연세대 앞 시위 중 사망한 그는 당시 스물두 살이었고 ‘만화사랑’ 동아리 회원이었다. 내가 그들의 묘지 앞에 당도했을 때 해설가 아가씨는 참배객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참이었다. 인사말이 오가는 중에 내가 이한열 씨 어머님이 지금도 생존해 계신지를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면서 어제도 다녀갔고 오늘도 아마 오실 거라고 대답했다. 나는 오래 전 그 어머니와 마주친 적이 있다. 아들의 무덤 옆에 소복 차림으로 앉아 가제 수건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찍어 내던 그때 그 어머니는 중년 여인이었다. 지금 그 아들의 상석에는 흰 국화 한 송이와 불 꺼진 담배 세 개비가 놓여 있고, 상석 옆에 놓인 유리 상자 안에서 그 아들이 웃고 있다. 이제는 노파가 됐을 그 어머니를 다시 마주친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뜨기로 했다. 지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춘하추동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을 오간 그 어머니와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아들의 무덤 곁에 선 유리 상자를 알뜰히 닦은 뒤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는 내 소설의 주인공 아낙네와 같이 나는 두 청년의 무덤 앞에서 돌아섰다. 내가 <망월>에서 16년이라는 시간과 열엿새 날의 만월을 강조한 이유는 15년이라는 법률적 공소시효 때문이었다. 그만한 시간이면 슬픔도 분도도 원한도 잊을 수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법률가들은 공소시효라는 간극을 정해 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망월동 제3묘역에 서면 우리를 불행으로 빠뜨리는 악의 위세와 그로 인한 상흔은 시간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치게 된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그 어머니가 평생 눈물 흘려야 하는 세상이라면 그곳엔 악이 존재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니 우리는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악이라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더라도 비판적 분석 능력을 잃어버리면 타인에게 가해지는 악에 공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단순한 진부함이라고 그녀는 결론짓는다.
누군가는 자신 앞에 나타난 악을 외면하면서 그 이유를 더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더럽다는 심리적 판단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고 그러한 심리 상태는 곧 회피와 체념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회피와 체념은 자학으로 변하고, 자학은 반드시 자기연민으로 변해 종국에는 악의 편에 가담하는 바탕이 된다. 탐욕이나 퇴폐와 같이 악도 습관처럼 서서히 물들어 온다. 나중에는 그러한 상태가 편하고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더럽다는 체념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부끄럽다는 내부적 반성 또한 악과 맞닥뜨리면 변질되기 쉬운 태도다. 더럽다고 피해서도 안 되지만 부끄럽다며 자기연민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행위’를 불러오는 ‘생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타인의 입장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며 외부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바로 정치적 사유인 것이다. 나는 이틀 동안 오랫동안 방치하고자 했던 ‘생각’을 끄집어내 먼지를 털고 모양을 바로잡았다. <사월의 동행>전에 참여한 미술인들과 <당신은 아는가? 5·18, 그 위대한 연대>전에 귀한 기록물을 남긴 그들 덕분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들이 시대의 아픈 기억을 저장해 미래로 전달하고자 한 목적은 정치적이다.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낙관적 답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