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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소스’의비밀

BB&M갤러리,젊은화가우정수개인전<팰린드롬>

202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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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milion2>캔버스에아크릴릭,잉크130×162cm2022

젊은 페인터 우정수가 개인전 <팰린드롬(Palindrome)>(11. 5~12. 17 BB&M갤러리)을 열었다. 전시명은 ‘다들 잠들다’, ‘다 좋은 것은 좋다’처럼 앞부터 읽어도 뒤부터 읽어도 같은 말이 되는 문장이나 단어를 뜻한다. 우정수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도취해 죽음에 이르고 마는 나르키소스를 전시 주제로 삼았다. 나르키소스 신화의 작동 원리인 ‘반사(reflection)’를, 앞뒤가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팰린드롬’의 구성 방식에 겹쳐본 것. 이에 작가는 나르키소스에 관한 도상을 추상적 화면 아래 숨겨두었다. 화사한 패턴 사이로 떠오르는 수선화, 소년, 연못. 작품엔 가느다란 햇볕이 명주실처럼 쏟아지는 물가의 정취가 감돈다. 과거 우정수의 검은 드로잉 연작을 기억하는 혹자라면 ‘그림이 많이 아름다워졌다’라고 말할 법도 하다. 작가도 비슷하게 얘기한다. “거의 처음이네요. 회화의 아름다움에만 집중할 수 있던 게요.”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드디어 회화의 내재율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즘이란 전시의 키워드를 ‘비로소 자기 자신의 회화적 욕망을 비춰본 작가’로 해석할 수 있을까? 그가 자기 자신과 눈 맞춘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곗바늘을 돌려 이전의 행보를 훑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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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sus>캔버스에아크릴릭,잉크116.8×91cm2022

‘아름다움’에 서린 공포와 숭고

우정수는 2015년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에서의 첫 개인전 데뷔와 함께 일찍이 라이징 아티스트로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 아티스트(2014), OCI 영 크리에이티브스 (2015), 서울시립미술관 SeMA 이머징 아티스트(2017), 금호 영 아티스트(2017)까지 착실하게 밟아온 스텝. 한국의 ‘성실한’ 청년 작가로 누빌 수 있는 아트씬은 거의 다 누빈 셈이다. 그는 그때 그 성실함의 원동력을 ‘불안’으로 회상한다. 생존에 허덕이는 또래 집단, 순식간에 잊히는 예술계의 속도감, 눈앞의 욕망에 사로잡혀 오판을 되풀이하는 국가와 사회. 우정수는 불안을 엔진 삼아 분노의 핸들을 돌리고 사회 비판적 ‘이야기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했다. 가령 군부 정권의 이미지를 차용한 <프로파간다> 연작(2010), 주류에서 배제된 존재를 조명하는 <누아르> 연작(2014~15), 변함없는 부조리에 강한 허무와 실망을 드러내는 <책의 무덤> 연작(2015~16) 등이 대표적이다.

초창기 우정수가 사용하던 주요 매체는 ‘종이에 잉크’였다. 컬러, 질감, 스트로크에 구애받지 않고 명징한 선으로 ‘내용’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조합이었던 것. 작가는 잉크가 손의 압력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만큼이나 그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창작자의 의도를 그대로 나르는 예술은 없는 법. 특정 내러티브를 아무리 구체적으로 묘사해도 관객이 각자 살아온 환경이나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 작품을 저마다 다르게 독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작가는 의도가 굴절돼 정확히 가닿지 않을 바에야 의미의 가능성을 증폭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꾼다. “굳이 명확한 내용을 집어넣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구석 모퉁이에 작은 도상만 그려둬도 사람들은 기어코 이야기를 찾아내요. 구상이 가진 힘이죠. 그래픽에 가까울 정도로 잉크를 활용해도 봤고, 어느 선을 넘어서니 ‘회화하는 재미’에 가속도가 붙던데요.” 그렇게 ‘회화적 표현법’이 우정수 작업에 도입되기 시작한다.

2017년 고양레지던시에 입주한 작가는 넓은 작업 공간을 확보하고, 캔버스에 구아슈, 아크릴릭 등의 매체를 손에 익힌다. 이 무렵부터 우정수는 유럽의 중세, 근대판화와 삽화를 레퍼런스로 전면에 드러내는데, 특히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상징’에 주목한다. 요컨대 머리 위 동그란 빛무리를 지우면서 신을 재난에 고통받는 인간으로 파면하거나, 비극의 절체절명에 카툰 말풍선, 스마일 이모티콘을 삽입해 대중문화의 스펙터클로 각색해 낸다. ‘기표와 기호’를 흔들어 “장난을 좀 쳐본 것”. 이때 우정수의 관심사는 ‘이미지’였다. 마치 말레비치가 ‘검은 사각형’을 선점해 ‘검정 네모’라 하면 그를 떠올리게 하듯, 작가에게 이미지란 무수한 변주의 가능성을 품은 ‘비물질 조형’이다. “젊은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전시 기회를 거의 소진하고 나니 막연한 조바심이 들었어요. 그림보다 ‘이미지’에 집중해야겠더라고요. 이미지는 물성에 영향을 덜 받고 더 많이 호출되죠. 예술계에서 다양하게 소비되는 식으로 작가 수명을 연장하고 싶었어요.” 이에 우정수는 굵은 선묘의 드로잉을 시트지로 변형해 유리창에 붙이거나(<Sunset> 연작), 패브릭으로 걸개그림을 만들었다(<Where Is My Voice> 연작). 그에게 ‘이미지’는 회화작품을 새하얀 벽면에서 독립시켜 창문과 공중에서도 자유로이 살 수 있게끔 돕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다. ‘전략’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작가는 활동을 지속하려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작업의 가닥을 다듬어왔다.

다시 <팰린드롬>전으로 돌아와 보자. 우정수는 마침내 회화에 천착했다. 이는 BB&M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은 덕에, 향후 3년간은 ‘다음 목표’에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한층 든든하기 때문이리라. 이제 그의 작업은 이미지로서 ‘외부와의 얽힘’을 일시 중단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내 얘기’란 작가 개인사가 아니라 회화 매체에 내재한 ‘평면의 미학’이다. <팰린드롬>전을 위해 우정수는 롤러, 스퀴즈, 스텐실 등 판화 도구를 사용해 적게는 서너 겹, 많게는 스무 겹 이상의 레이어를 쌓아 올렸다. 평면에 시도할 수 있는 제작법을 풍부하게 활용했다. 이로써 나르키소스의 눈을 홀렸을 어른어른한 물결을 깔고, 마음에 피어났을 풍만한 황홀함을 담아냈다. 바둑판 그리드, 꽃무늬 패턴, 밀리고 쓸린 물감의 흔적···. 회화의 ‘자기애’가 만개한 순간이다. 작가는 판화와 회화, 장식과 예술, 구상과 추상, 서구와 주변 등 현대미술의 첨예한 화두를 조화롭게 펼쳐 회화 실험을 이어나가고 있다. 향후에는 아름다움의 배면에 숨어있는 ‘멜랑콜리’를 심층 연구할 계획이다. 사나운 가시가 돋아있어 장미가 더욱 매혹적이듯, ‘아름다움’에 서린 으스스한 공포와 숭고. 그 반전의 미학을 작가가 앞으로 어떻게 풀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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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ternwithtrees>캔버스에아크릴릭,잉크116.8×91cm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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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수/1986년생.두산갤러리서울및 뉴욕(2020),금호미술관(2018),OCI미술관(2016)등에서개인전개최.제주비엔날레(2022), <젊은모색>(국립현대미술관과천2021), <FortuneTelling:운명상담소>(일민미술관2021),<강박2>(서울시립미술관2019), 광주비엔날레(2018)등의단체전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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