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어디에나 있다
신미경 / 1967년생. 코리아나미술관&코리아나화장박물관(2023), 레이우아르던 프린세스호프도자박물관(2021), 아르코미술관(2018) 등에서 개인전. 서울예술상 최우수상(2024), 하인두예술상(2023) 등 수상. 서울과 런던에서 거주 및 활동.
‘비누 조각가’ 신미경. 작가는 비누를 주재료로 고전미술과 역사적 유물을 재현한다. 그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개인전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6. 4~2025. 5. 5)을 열었다. 기독교미술에 등장하는 ‘천사’를 모티프 삼아 조각과 회화, 드로잉 등 100여 점을 선보였다. 신미경은 비누를 매개로 존재와 소멸에 동시에 가닿는다. 사용과 폐기는 모든 사물이 겪는 과정이지만, 그중에서도 비누는 특별하다. 마모되고 사라지는 과정이 즉각 보인다. “눈앞에 있어도 ‘곧 없어질 것’ 같은 느낌. 결국 사라질 대상에 섬세한 손길을 건네는” 모순된 운명은 이번 전시에서 천사라는 허구를 만나 또 한 번 선명해진다.
이번 전시는 신미경이 우연히 ‘엔젤’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접하면서 시작됐다. 천사는 실재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대상이다. 본 적 없는 존재에 미술이 형상을 부여해 왔고, 조향사는 그 내음을 상상해 향수를 제작한다. 여기서 작가는 천사와 비누의 논리를 겹친다. 양자는 현존과 부재 사이를 횡단한다는 점에서 같다. 천사는 허구와 사실을, 비누는 쓰임과 폐기를 오간다. 그러나 공통점은 ‘정황’에 불과하다. 정황만으로는 예술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건 이에 대응하는 인간의 태도다. 천사는 증명할 수 없지만 믿음의 대상이 되고, 비누는 일시적이지만 향과 모양을 만드는 데 지난한 노동과 창작이 따른다.
<엔젤 시리즈>(2024)는 고전미술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천사의 모습을 캐스팅한 조각 연작이다. 단단한 대리석으로 구성된 천사가 투명하고 향기 나는 비누로 모습을 드러낸다. 재료가 바뀌면 의미도 변한다. 안드레 세라노는 <오줌 예수>(1987)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간성으로 변화시켰다. 핏빛 오줌에 담긴 ‘인간’ 예수는 신에겐 없는 고통을 드러낸다. 비극으로 극대화된 희생은 원작엔 존재하지 않는 메시지다. 한편 비누로 된 천사에서 신격은 일상으로 재해석된다. <엔젤 시리즈>의 천사는 거룩한 천상이 아니라 평범한 삶에 내려온 성령이다. 천사는 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러 이곳에 왔다.
대리석 천사가 드러내는 것은 통념적으로 소비되는 고급스러움이다. 고귀한 대상은 고가의 재료로 제작되어야 한다. 천사는 종교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가치 있기 때문에 조각으로 빚어졌다. 우아한 대리석은 기독교의 권위와 건축을 지시했을 경제력, 정치권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신미경의 천사는 그러한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엔젤 시리즈>는 권위와 권력 없이 자발적으로 창작되며, 조각을 이루는 물질은 값싸고 흔한 비누다. 이때 비누로 강조되는 가치는 대가 없는 순수, 나아가 헌신이다. 그리고 비누 천사는 또 하나의 사실을 증명한다. 평범한 존재도 고귀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사소한 일상도 특별하고 귀중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다.
<엔젤 시리즈 DR> 비누, 안료, 향유 25×35×66cm 2024
<세 천사 향유 드로잉 시리즈 006> 종이에 향유, 수채 색연필 19×19cm 2024
비누 천사, 일상의 세례
그러나 <엔젤 시리즈>가 원작의 의미를 허무는 것은 아니다. 신미경은 전통미술 본연의 가치를 동시대 언어로 재구성해 왔다. “예술은 창조된 그 순간, 동시대의 산물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엔젤 시리즈>의 일부는 화장실 세면대에 배치됐다. 관객은 천사의 머리와 팔, 몸을 만지면서 손에 비누를 묻힌다. 기독교의 세례는 고백과 용서의 과정이며 이는 ‘씻김’으로 은유된다. 오늘날 세례는 특정한 공간과 예식이 필요하지만, 그리스도에게 성찰은 조건 없이 어디서든 실천해야 하는 보편의 윤리였다. 비누 천사는 조각이 본래 표현하려 했던 기독교적 이상을 일상에 뿌리내린다.
<페인팅 시리즈>(2024)와 <세 천사: 향유 드로잉 시리즈>(2024)는 천사를 고전미술의 전형적인 모습 대신 추상으로 표현한 연작이다. 천사가 기독교적 가치에 형태를 부여한 화신(化身)이라면, 작가는 반대로 이를 본래의 비정형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비누의 물성이 반영되어서일까. 그의 작품은 어딘가 익숙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든다. 빛 구름 하늘 먼지 잎사귀 꽃가루 물방울…. 작가는 끓여서 녹인 비누에 물감을 섞고, 이 용액을 틀에 응고시켰다. 비누가 딱딱하게 굳기까지, 안료는 자연의 색과 모양으로 흐르고 스며들었다. 일상을 닮은 천사와 천사를 닮은 일상. 관객은 이제 평범한 사물에서도 천사를 발견해 낼지 모른다.
조각이 머금은 엔젤 향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체취는 길과 창문을 따라 미술관에서 주변의 공원으로 퍼져 나간다. 그 내음은 조각을 문질렀던 손은 물론 몸에도 내려앉아, 미술관보다 더 먼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그렇게 천사는 어디에나 있다. 천사의 향기가 사라진다 해도, 그것에 매달렸던 작가의 창작과 관객의 기억은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