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대우주’를 그리다
‘수(數)’의 작가 미야지마 타츠오(Tatsuo Miyajima). 그는 점멸하는 LED 작업으로 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성 개념을 탐구해 왔다. 갤러리바톤에서 미야지마의 개인전 <무한 숫자(Infinite Numeral)>(3. 2~4. 8)가 열린다. 새로운 회화 시리즈 ‘비즈 페인팅(Beads Painting)’을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다. 대형 캔버스에 1부터 9까지의 숫자 비즈를 붙이고, 비즈가 없는 부분을 색으로 채워 ‘유(有)’와 ‘무(無)’ 사이의 공간을 표현했다. 전시 개막에 앞서 작가에게 신작 제작 배경과 올해 계획을 물었다. / 이현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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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erical Beads Painting-003> 캔버스에 아크릴릭, 숫자 비즈, 연필 각 194×194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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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erical Beads Painting-005> 캔버스에 아크릴릭, 숫자 비즈, 연필 각 194×194cm 2022
― 한국 개인전은 3년 만이다. 소감이 어떤가? 그때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마스크를 벗는 일도 꽤 자연스러워졌다.
Miyajima 2020년에 갤러리바톤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라 오프닝에 참석하지 못해 매우 아쉬웠다. 이제는 상황이 완화되어 직접 한국 관객과 만날 수 있기에 매우 기대되고 설렌다.
― 이번 전시에 신작 회화 시리즈를 선보인다. 1993년 파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숫자 비즈에 영감을 얻었는데, 비즈의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
Miyajima ‘미야지마 타츠오’라고 하면 대부분 LED작업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데뷔 이래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 퍼포먼스나 영상도 있고 지폐, 옷, 거울, 심지어 금속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새로운 형식의 회화를 시도했는데, 사실 학부 시절 유화를 전공해서 캔버스와 물감은 내게 친숙한 재료이다. 숫자 비즈는 30년 전 파리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그곳에서 비즈를 구입해 오랫동안 보관하면서 언젠가 이 비즈를 작업에 사용할 날을 고대했다. 이 숫자 비즈는 아주 작다. 작지만 숫자를 명확히 셀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마치 하나의 ‘소우주’처럼 느껴졌다. 이 ‘축소판 우주’를 엄청난 양으로 활용하면 ‘대우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 거대한 우주를 표현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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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tical Green> LED, 전선, 알루미늄 패널, 집적 회로 3×26×173cm 2022
캔버스에 펼쳐진 ‘유’와 ‘무’
― 캔버스에 2cm 크기의 정방형 그리드를 그린 후, 각 칸에 숫자 비즈를 붙였다. 네모난 캔버스가 그 자체로 하나의 대형 격자처럼 보여, 그리드의 무한 확장 같기도 하다.
Miyajima 먼저, 연필로 격자를 그려 캔버스를 무수히 많은 그리드로 나눴다. 각 사각형에 숫자 비즈를 붙이거나 붙이지 않는 선택은 무작위 알고리즘이 결정한다. 그 결과 ‘유’와 ‘무’의 공간이 생긴다. 사각형은 인간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 공간으로서 ‘체계적인 지침’을 의미한다.
― 당신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기술(technology)보다 기계적인 것(mechanical things)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신작 회화 시리즈는 분명 이전 작품보다 아날로그적이고 수작업의 특성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 인터뷰 답변에 따르면 이번 신작이 당신 예술관에서 그다지 큰 변화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Miyajima 이 작품의 특별한 점은 ‘대화’에 있다. 여기서 대화는 ‘나’와 ‘캔버스에 펼쳐진 유와 무의 공간’ 사이의 소통을 뜻한다. LED 작품은 보통 개념에서 출발해 계획적으로 제작되어 주관적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접근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반면 페인팅은 숫자 비즈를 캔버스에 붙이는 단순하고 이성적인 동작이지만, ‘유와 무’의 관계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공간을 채색하는 순간,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바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그만큼 이 시리즈를 완성하기까지 1년 반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이제 회화의 색을 이야기해 보자.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완성된 화면은 마치 카모플라쥬처럼 보이는데…. 붉은색, 검은색, 금색, 은색 등 각 색깔에 담긴 상징이 있는가?
Miyajima ‘무’와 ‘죽음’의 개념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점을 찍은 듯한 물감 자국이나 숫자 비즈가 있는 영역 외에는 모두 ‘무’를 나타낸다. 무작위로 선택된, 비즈 없이 평평히 물감만 칠해진 그리드는 숫자 ‘0’ 또는 ‘죽음’을 뜻한다. 이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 즉 ‘무’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죽음’을 구분하기 위한 장치다. 색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단지 ‘무’를 의미하는, 기본적이고 원시적인 색상을 사용했다.
― 당신은 사회 현안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대표적으로 나가사키 원폭에서 살아남은 감나무 묘목을 26개국에 심은 <Revive Time: Kaki Tree Project>(1996~2019)가 있다. 바이러스, 경제 불황, 대지진 등 지금도 세계 곳곳엔 재난이 가득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이란?
Miyajima 자연과 현실은 예측할 수 없으며 낯선 사건으로 가득한 곳이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만큼 현대미술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의 사건처럼, 현대미술에 익숙한 이들은 불확실한 사건을 다루는 데에 더 유연할 수도 있다. 현대미술은 흑백 논리가 아니며 정의할 수 없는 독립체와 같다. 무형의 것들과 소통하는 경험은 창의성을 키운다. 이 창의력은 현실에 불확실한 상황이 닥쳤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큰 힘이 되리라.
― 마지막으로 올해 계획을 알려달라.
Miyajima <Sea of Time-TOHOKU>(2017~) 프로젝트를 더욱 발전시킬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는 12년 전 도호쿠의 대지진 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기억을 이어가려 시작되었다. 재해 지역 구호에 관심을 가진 사람 3,000명을 초대해 그 수만큼 LED 디스플레이를 함께 만들었고, 이제 그것을 영구적으로 설치하는 과정에 있다. 도호쿠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미술관을 건립하려 한다. 지금까지의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규모가 될 것이며, 올해는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중요한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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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Loop / Helix no.2> LED, 집적 회로, 스테인리스 스틸 파이프, 테플론 와이어 21×31.5×37c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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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타츠오 / 1957년 도쿄 출생. 도쿄예술대 학사 및 석사 졸업, 런던예술대 명예박사 수여. 도쿄 스카이더배스하우스(2023), 스헤르토헨보스 노르트브라반트미술관(2022), 부퍼탈 발트프리덴 조각공원(2022), 런던 리슨갤러리(2022), 베를린 부흐만갤러리(2022), 갤러리바톤(2020), 산타바바라 미술관(2019), 상하이 민생미술관(2019) 등에서 개인전 개최.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도쿄 모리미술관, 런던 테이트컬렉션 등에서 작품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