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순수미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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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ild Me Up Buttercup> 수집한 농구공, 리퀴드 플라스틱, 스틸, 에폭시 111.8×137.2cm 2022
타이럴 윈스턴(Tyrrell Winston)은 ‘쓰레기 수집가’다. 십여 년간 길거리에서 모은 쓰레기로 예술작품을 제작해 왔다. 작업 초기에 그는 목이 긴 쓰레받기와 빗자루로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쓸어 담았다. 5cm 내외의 담배꽁초를 일일이 분류해 거무스름한 하양과 빛바랜 노랑의 회화를 만들었다. 빨간 립스틱 자국이 ‘포인트’로 들어간 대형 추상화였다. 이제 그는 다른 걸 수집한다. 작업의 출발점은 여전히 ‘길거리’. 그의 레이더에 들어온 새 재료는 바로 ‘농구공과 농구 골대’다. 꽁초를 줍기 위해 바닥을 보고 걷던 그의 시선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넓어진 시야만큼 훌쩍 확장된 작업의 스펙트럼을 펼친다. 최근 작가는 회화, 조각, 오브제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고 있다. 타이럴 윈스턴이 가나아트 보광에서 국내 첫 개인전 <Stealing Signs>(2. 1~26)를 열었다. 작가는 전시명으로 자신이 누군가의 서명을 ‘훔쳤다’고 자백한다. 난데없이 서명을 도둑맞은 이들은 바로 현대미술사의 거장. 그는 마르셀 뒤샹, 사이 톰블리, 데이비드 해먼스 등의 예술적 ‘시그니처’를 차용해 물질과 명성에 집착하는 미국 사회를 꼬집는다.
정말로 ‘훌륭한’ 미국인
윈스턴이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모으기 시작한 사연은 꽤 서글프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출신의 작가는 목사 아버지, 고등학교 미술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평범한 어린아이로 과거를 회상한다. 예술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2006년 뉴욕 와그너컬리지에 입학한 이후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그릴 줄도 몰랐고,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였다. 시간제 근무직을 구하는 일조차 실패했던 윈스턴은 문득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고. 작가가 무작정 브루클린과 맨해튼 거리로 나서 누군가 버린 물건을 하나둘 주워 담기 시작한 계기는 바로 ‘자책’이었다. 그래서 윈스턴은 ‘버려진 쓰레기’에 멜랑콜리한 애착을 가진다. 꾸겨진 담배꽁초에서는 이름 모를 이의 한숨과 웃음을 보고, 폭삭 주저앉은 농구공에서는 어느 청년의 환호와 함성을 듣는다. 윈스턴은 이를 쓰레기에 ‘간직된 역사(embedded history)’라고 부른다. “나는 쓰레기를 바라볼 때의 묘한 감정을 ‘간직된 역사’라고 일컫고 싶다. 이 물건을 거친 수많은 손과 사연들···. 나는 쓰레기를 부활시킨다.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고장 나고 잊힌 물건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거다.” 지금도 작가는 거리를 배회한다. 대도시의 거리를 헤매는 시간이 작업의 중요한 일부다. 특히 주변에 널브러진 누군가의 사연을 포착하기 위해 ‘보는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작업을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는 덴 딱히 정해진 프로세스가 없지만, 쓰레기를 ‘재료’로 알아차리는 일이 내 작업의 첫 단추임은 확실하다. 어떤 맥락에 가져다 두느냐에 따라 뭐든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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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There A Dolphin With This Tuna?> 수집한 농구 골대 그물, 금철봉, 철물 가변크기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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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king Donuts> 수집한 농구공, 레진, 실리콘, 담뱃갑, 책 25.4×27.9×22.9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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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king Donuts> 수집한 농구공, 레진, 실리콘, 담뱃갑, 책 25.4×27.9×22.9cm(부분) 2022
쓰레기로 만들었다고 해서 녹슨 표면, 끈적한 이음새, 퀴퀴한 냄새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윈스턴 작품에는 화이트큐브 공간과 잘 융화하는 세련된 ‘조형미’가 있다. 여기서 작가가 스리슬쩍 가져온 거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뒤샹의 레디메이드 조각 <자전거 바퀴>(1913)를 오마주해 <Trace Elements>(2022)를 제작했다. 자전거 바퀴 대신 어느 한 공원에서 수거해 온 오래된 농구 골대가 의자 위에 놓였다. (정확히는 낡은 골대를 새 걸로 교체해 가져왔다.) 이 작품은 ‘파운드 오브제’ 개념으로 예술과 일상에 가교를 놓은 뒤샹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예술은 ‘발견되는 것’이기에 무엇이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뒤샹식 패러다임 전환이 없었다면, 윈스턴은 아티스트가 될 수 없었을 테니. 한편, 윈스턴은 미국의 흑인 작가 데이비드 해먼스의 작품도 참조해 왔다. 그의 대표 조각 <무제(Night Train)>(1989)의 형태를 따와 담뱃갑, 농구공, 도록을 아상블라주한 <Those Are Some Big Holes in Your Underwear>(2022)를 만들었다. 또한 하얗게 탈색한 성조기를 갈기갈기 찢은 <White Trash>(2022)는 해먼스의 <African-American Flag>(1990), <Oh Say Can You See>(2017) 등과 상통한다. 해먼스가 성조기로 흑인의 ‘정체성’을 화두 삼았다면, 윈스턴은 방향을 살짝 비틀어 미국 사회를 ‘하얀 쓰레기’로 자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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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e Elements> 농구 골대, 나무 탁자 50.8×50.8×138.4cm 2022
그의 작업에는 항상 ‘미국맛’이 묻어난다. 새로 시도하는 <Punishment Paintings> 회화 연작은 타이거 우즈,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오타니 쇼헤이 등 유명 스포츠 스타의 서명을 반복해 쓰고 지운 작품이다. 사이 톰블리의 조형 언어를 연상시키는 이 시리즈로, 윈스턴은 유명인의 서명을 애지중지 받드는 미국식 셀러브리티 ‘숭배 문화’를 비판한다. 미국 사회를 이러한 분위기로 몰아가는 데 일조한 ‘잡지’도 저격 대상이다. “잡지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롤링스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더 소스』, 『트레셔』 등을 읽으며 컸다. 한때 잡지 광고에서 ‘마이클 조던처럼 되라’는 문구가 유행이었다. 미국에선 유명인이 되어 이름을 남기는 게 미덕처럼 여겨진다.” 윈스턴은 잡지 커버에 하얀 페인트를 칠해 자극적인 문구만 남기거나(<One-Man Gang>(2022), <Cowboy In Trouble>(2022)) 표지를 장식한 셀럽 사진에 자신의 셀피를 부착한다(<Bastard Child>(2022), <All Bite, No Bark>(2022)). 미국 사회가 그토록 선망하는 ‘유명인’의 자리를 점유하고, 환한 ‘자본주의’ 미소 대신 자욱한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그리고는 관객에게 묻는 듯하다. ‘나는 정말 훌륭한 미국인이지?’ 윈스턴은 미술사에서 ‘승인된’ 형식을 변주해 동시대 사회의 모순을 냉소적으로 비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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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럴 윈스턴 / 1985년 캘리포니아 출생. 뉴욕 와그너컬리지 졸업. 디트로이트 크랜브룩미술관 (2022), 벨기에 스템스갤러리(2021), 도쿄 히다리진가로(2019), 파리 라시떼(2019) 등에서 개인전 개최. (홍콩 WOAW갤러리 2021), (브뤼셀 스템스갤러리 2021), <1988>(시카고 안토니갤러리 2020), (뉴욕 에릭파이어스톤갤러리 2019) 등의 단체전 참여. 현재 디트로이트에서 거주 및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