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한 ‘원나잇’
‘게이 크루징’을 주제로 한 기획전 <어둠 아래 우리는 각자>(10. 8~30 YPC스페이스)가 열렸다. 기획자 권정현은 게이 섹슈얼리티를 테마로 작업하는 작가 김재원, 이정식, 허호를 초대했다. 게이 크루징은 동성애자가 화장실, 극장, 공원 등 공공장소를 돌아다니며 즉흥으로 데이트 상대를 찾는 행위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디지털 기기가 발달하지 않았던 1970~80년대에 성행했다. 세 작가는 모두 그 시절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 대면성, 일시성, 익명성이 특징인 당대 크루징을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김재원 <흔적 없는 몸들> 종이에 인쇄, 다채널 비디오 사운드 가변크기 2024
김재원 <흔적 없는 몸들> 종이에 인쇄, 다채널 비디오 사운드 가변크기 2024
1970~80년대 게이 문화의 재해석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작품은 김재원(1991년생)의 <흔적 없는 몸들>(2024)이다. 눈높이보다 조금 높게 설치된 스마트폰에는 수풀을 배경으로 비눗방울이 퍼져 나가는 흑백 영상이, 바닥에 놓인 모니터에는 새까만 배경에서 불티가 흩날리는 영상이 나온다. 여기서 ‘흔적 없는 몸’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일시성이다. 눈앞에 나타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비눗방울과 불티는 하룻밤이 지나면 없던 일이 되는 게이들의 즉흥 만남과 닮았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크루징의 흔적이다. 크루징이 활발히 일어나던 시기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종로 탑골공원이나 파고다극장 등 상징적인 장소는 퇴색되거나 없어졌다. 작가는 크루징의 역사를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로 생생히 전달한다.
이정식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7분 30초 2024
이정식(1987년생)의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2024)는 서울의 대표적인 게이 크루징 장소인 종묘공원을 배경으로 한 영상이다. 하룻밤 사랑을 위해 한밤중 공원을 찾은 게이들이 상대를 물색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들은 아침이 밝아오기 전까지 공중화장실 앞과 나무 기둥, 벤치 등을 서성인다. 영상 속 등장인물의 움직임은 다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절제되어 있는데, 이는 인물 간 정서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은밀한 눈빛 교환,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초조함, 스킨십의 흥분이 공존하는 장면에 심장 박동 소리를 더해 게이 크루징의 특수한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허호 <어둠 아래 우리는 각자의 준비를 위한 드로잉> 종이에 색연필 가변크기(부분) 2024
마지막으로 허호(1993년생)는 크루징 후 게이들의 신체 접촉을 그린 회화 5점과 드로잉 7점을 선보였다. 그의 그림에는 성관계 후에도 마치 연인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있거나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어차피 잊겠지만 허무한 행위로 끝나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와 같이 드로잉 주변에 적힌 메모는 즉흥 만남이 지닌 낭만적 면모와 정서적 교류를 부각한다. 게이 크루징은 사회의 그늘에서, 조용한 어둠에서 꽃피운 문화이자 은밀한 공동체이다. ‘어둠 아래 우리’는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우리’이면서, 다른 삶의 배경을 지닌 ‘각자’이다. 따로 또 함께 연결된 순간만큼 자유로운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