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아트, 전설은 계속된다

선구자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비디오아트의 아버지 백남준. 작가의 서거 20주기를 맞아 그의 예술적 유산을 기리는 전시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반세기도 전에 ‘초연결’과 ‘인공지능’을 예견했던 그의 작품 세계는 여전히 오늘날 첨단 기술 사회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APMA캐비닛, 화이트큐브 서울, 호반아트리움이 다시 불러낸 거장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보자.

<TV Bra for Living Sculpture>를 입은 샬롯 무어만(Charlotte Moorman) 1969년 뉴욕 © Nam June Paik Estate

먼저 APMA캐비닛에서는 <백남준: Rewind / Repeat> (4. 1~5. 16)전이 열렸다. 가고시안이 백남준에스테이트(Estate of Nam June Paik)와 협력해 마련한 전시로, 유족 재단이 국내 전시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25년 만이다. 국내 미공개작 10점을 최초로 공개했다. 특히 작곡에서 미디어로 장르를 확장한 초기작 <미디어 샌드위치>(1961~64)가 출품돼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 연작의 후기 버전과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Charlotte Moorman)을 위해 제작한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 등 백남준의 핵심 작품이 총출동했다.

<Gold TV Buddha> CCTV, 컬러, 27인치 모니터, 비디오카메라, 삼각대, 케이블, 금도금 청동 불상에 유성 마커 215.9×66×80cm 2005 © Nam June Paik Estate Photo: Paula Abreu Pita Courtesy the Brooklyn Museum and Gagosian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베이클라이트 로봇>(2002)이 관객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중고 시장에서 수집한 빈티지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로봇으로 재탄생했다. 이어지는 공간에는 실시간으로 촬영된 청동 불상이 모니터에 송출되는 <골드 TV 부처>(2005)가 놓였다. 서양 현대 문명과 동양 전통 종교의 상징을 병치해 매스 미디어에 대한 성찰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음악가이자 전위예술가 무어만을 위해 제작한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다. 플렉시글라스 상자에 담긴 소형 흑백 텔레비전 두 대를 투명 비닐 속옷에 내장했다. 무어만은 1969년 뉴욕 하워드와이즈갤러리에서 열린 <창조적 매체로서의 TV>전 개막 퍼포먼스에서 이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했다. 현의 진동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찌그러트렸다. ‘전자 기기의 인간화’를 꿈꾼 백남준의 전위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테크놀로지를 통한 인간성 회복

호반아트리움에서는 <백남준: STILL LIVE – 살아 있는 시간>(3. 24~5. 31)전이 개막했다. 백남준의 수석디자이너이자 테크니션으로 활동했던 마크 팻츠폴(Mark Patsfall)이 정리한 아카이브를 시작으로 평면작업, 비디오조각, 드로잉은 물론 백남준 예술을 오마주한 설치작품 40여 점을 공개했다. 전시는 인공 지능 시대의 ‘사유 회복’을 주제로 오늘날 백남준 미학의 함의를 조명한다. 전자 매체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성 회복을 추구했던 작가의 시도는, ‘속도와 효율 경쟁’에 얽매인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린다.

전시는 두 개 파트로 나뉜다. 1관에서는 백남준 예술의 타임라인을 살핀다. 먼저 그의 작품 전개를 일본, 독일, 뉴욕 이주와 주요 전시를 기점으로 정리한 연표가 입구에 배치됐다. 그간의 개인전 도록과 기사를 포함해 무어만, 요셉 보이스 등 예술적 동료와의 협업 과정을 촬영한 사진을 함께 공개했다. 이어지는 공간에서는 (1976~78), <부처>(1996) 등 비디오설치로 명상의 상황을 구현한 작품을 선보인다. 당시 현대 문명의 기술적 정수인 텔레비전과 내면 수행의 상징인 부처상을 결합해 기술을 통한 성찰을 시도했다.

2관에서는 일상 사물 전반으로 재료를 확장한 백남준 작품과 이를 오마주한 동시대작가의 신작이 나란히 놓였다. TV 모니터에 네온사인을 삽입한 <네온 TV>(1990) 연작, 미얀마 전통 서랍에 소형 모니터를 부착한 <버마 체스트>(1995) 등은 생활 오브제를 모티프 삼은 비디오조각이다. 한편 미디어작가 서정우의 <분절된 일차(一次)의 목격 실험>(2026)은 백남준의 ‘참여 TV’ 개념을 오마주해 키보드로 화면을 조작하는 인터렉티브 설치작품이다. 참여 TV는 일방향적인 텔레비전 감상자의 관계를 관객 참여형 쌍방 소통으로 역전시킨 백남준의 핵심 미학이다. 그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보이스를 추모하는 설치작 <보이스복스>(1988)도 주목할만 하다. 두 작가가 함께 참여했던 퍼포먼스의 B컷 사진, 보이스를 그리워하는 백남준의 메모 등으로 인간 백남준의 면면을 드러냈다.

<Burma Chest> 2채널 비디오, 나무 서랍, 프로젝터, 스펀지 로봇, 사진 혼합재료 140×183×240cm 1995 호반아트리움 제공
<Beuys Vox> 혼합재료 가변크기 1988 호반아트리움 제공

마지막으로 화이트큐브 서울에서는 백남준과 그리스 출신의 키네틱아티스트 타키스(Takis) 2인전 (5. 2~6. 5)이 개최된다. 타키스의 작품 5점과 백남준의 작품 4점이 공개된다. 전시는 두 작가가 1979년 쾰른 쾰니셔미술협회에서 함께 선보인 라이브 공연에서 영감을 받았다. 음악에 대한 애정과 작품에 기술, 과학을 끌어들였다는 공통점에 주목했다. 특히 타키스는 자기력과 전자기장, 백남준은 비디오 신호와 같이 둘은 ‘보이지 않는 힘’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했다. 타키스의 연작은 안테나가 신호를 수신하는 과정을 조각으로 구현했다. (1960)는 캔버스에 설치한 자석으로 금속 조각을 띄워 전자기장의 존재를 눈앞에 드러낸다. 한편 백남준의 작품으로는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1958~62)이 출품됐다. 클래식 음악, 라디오 소리, 비명, 일상 소음 등을 녹음한 오디오 릴 테이프를 목재 프레임에 넣은 조각이다. 음악에 우연적 요소를 도입한 아방가르드 음악가 존 케이지를 오마주했다.

백남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 오디오 테이프 릴, 목재 프레임 50×36×3cm 1958~62 © Nam June Paik Estate. Photo: Nam June Paik Art Center
타키스 <Signal> 철, 파운드 오브제 16×84×106cm 1967 © Takis Foundation/ADAGP, Paris and DACS, London 2025. Photo © White Cube (Ollie Hammick)

백남준아트센터는 올 초 백남준 서거 20주기를 맞아 작가의 헤리티지를 국제 무대로 확장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백남준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백남준과 접점이 없더라도 그의 정신을 공유하는 작가, 연구자, 기관을 초대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꾸린다. 그 첫번째 무대로 기획전 <불연속의 접점들>(3. 19~6. 14)이 막을 올렸다. 서로 다른 지역과 시대의 예술이 만들어내는 공명에 주목했다. 미디어아트와 개념미술 컬렉션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자그레브현대미술관과 공동 기획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산야 이베코비치, 단 오키 외 총 16인의 작가가 조각, 설치, 비디오, 사진 등 작품 26점을 출품했다. 전시는 크로아티아 미디어아트의 역사적 변천사를 중심축으로 삼았다. 1960년대 전위 미술운동 ‘뉴 텐던시’의 주요 작가부터 2000년대 디지털 환경 속 매체 실험까지 폭넓게 조명한다.

한편 지난 4월 23일에는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국제 학술 심포지엄 ‘백남준 이후의 백남준 Paik After Paik’이 열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백남준아트센터의 첫 공동 학술사업으로, 지난 60년간 국내외에서 진행된 백남준 연구를 한데 모았다. 이숙경(맨체스터대 휘트워스미술관장), 레프 마노비치(뉴욕시립대 교수), 한나 페이셔스(스미소니언미국미술관 ‘백남준 컬렉션’ 코디네이터), 손부경(미술사 연구자) 등이 참여했다. 한나 히긴스(시카고 일리노이대 교수)가 기조 강연을 맡아 1960년대 백남준의 실험을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의 학습과 지식 생산 조건과 연결해 재해석했다. 1부 ‘백남준 연구의 구조적 지형’에서는 큐레이토리얼, 미디어 이론,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연구 방법론 및 성과와 과제를 점검했다. 2부 ‘백남준 아젠다의 동시대적 확장성’은 백남준 미학을 데이터 사이언스, 기계와 노동, 포스트휴먼, 초국가적 문화 실천 등 동시대 담론을 매개로 탐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