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인식의 ‘해부학’
조각가 최수앙은 극사실적 인체 조각으로 이름을 날려왔다. 인간 신체를 소름 끼치도록 똑같이 재현하거나, 언캐니하게 변형해 조각의 전능한 ‘창조주’로 임한다. 2018년 작가는 외과 수술과 재활 치료를 계기로 몸을 ‘갈아넣는’ 방식을 재고했다. 이번 개인전 <플루리버스>(2022. 12. 1~28 갤러리SP)는 그 변화의 연장선. 해부학에서 따온 작은 조각을 조합해 미스터리한 ‘유기체’를 제작했다. 작업 과정을 은유하는 수채화 드로잉도 함께 출품했다. ‘전환기’를 걷고 있는 그에게 조각의 의미를 물었다. / 김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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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emblage C1> 혼합재료 48×48×108cm 2022
— ‘최수앙 조각’이라고 하면 극사실적으로 과잉 재현된 인체가 먼저 떠오른다. 이번 개인전에는 구체적인 인체 형상이 사라졌다. 지난 개인전 <언폴드>(학고재갤러리 2021)까지만 해도 피부를 벗긴 듯한 인체 조각이 있었는데 말이다. Choi 지난 개인전에서는 대부분 조각보다 평면에 가까운 작업으로 전시를 구성해 ‘맥락 있는 변화’를 꾀했다. 당시 신작이던 <조각가들>은 변화의 ‘연결 지점’을 확인하려던 작업이었다. 이번 개인전은 직접적인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유연한 조각적 태도를 따랐다고 할까. 박지형 큐레이터의 도움도 컸고, 갤러리SP의 공간도 전시 구상에 영향을 줬다.
사건으로서의 가능성
― 전시명 <플루리버스>는 복수의 우주라는 뜻이다. 서문에는 “작가가 조형적인 의사 결정을 하는 데 있어 절대자의 위치에 있기를 내려놓았다”라고 표현했던데, 태도의 변화가 있었는가?
Choi ‘절대자’라는 말을 내가 한 건 아니지만···, 그건 아무래도 과정 전반을 컨트롤하는 존재가 아닐까. ‘플루리버스’는 전시 준비 막바지에 기획자가 제안한 단어다. 그가 “다중의 우주와 세계의 가능성”이라는 설명을 덧붙여 줬는데, 그 내용이 내 작업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작업 방향을 바꾸면서 생긴 주된 관심사는 견고한 인식이 예술을 통해 ‘말랑한 상태’로 전이되는 과정 자체였다. 수년 전부터 작업이라는 게 작가와 함께 살아가지 않고, 서로를 소진시킨다고 느꼈다. 작업 결과물이 주는 견고한 명징함과 노동 집약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이 한계 같았다. 조각가로서 무언갈 관찰하고, 생각하고, 만들어내되, 의미에 집착하지 않고 조각과 감응하는 내 자신을 작업의 중심에 두려 했다.
―작은 유기체 같기도 한 <Assemblage> 시리즈가 궁금하다. 이것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쏟아진 듯한 <Blueprint>도 세트처럼 보인다.
Choi <Assemblage>는 열린 방식으로 시도한 조각작업이다. 세부 조각을 조합해 최종 형상을 결정하지만, 그것을 재구성하는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Blueprint>는 <Assemblage>처럼 조합하기 이전의 파편 조각을 늘어놓은 작업이다.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사건’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조각의 제작 과정은?
Choi 구성을 위한 소재를 만드는 과정에 가장 공들였다. 부분이 있어야 그걸 조합하든 절단하든 늘어놓든 등의 방식이 가능하니깐. 우선 작은 조각의 형태를 신체의 해부학 요소에서 빌려왔으니 그 자료를 찾아 정리했다. 기존의 물리적인 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신축적인 덩어리 형태와, 그걸 새롭게 조합하는 상상을 하며 드로잉했다. 마지막으로는 드로잉을 참고해 알루미늄 망과 종이 죽으로 조각을 만들고 구조적으로 조합했다. 주안점을 둔 부분은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가기 위해 따박따박 과정을 수용하는 태도였다. 익숙한 재료나 방법을 사용하면 예상 결과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가능한 여러 작업을 동시에 벌이고 열린 형태에 반응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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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print> 종이에 폴리우레탄 니스, 혼응지, 안료, 알루미늄 철망 가변크기 2022
― 조각들이 ‘추상화’되었다고 해도 좋을까?
Choi 세부 조각은 근육, 인대, 연골 등 해부학에서 빌려왔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완전한 추상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각 요소를 직관적이고 모호하게 재구성했기 때문에 그 과정이 추상의 성격을 닮은 듯하다.
― 빨강, 파랑, 연두···. 조각의 ‘색’도 눈에 들어온다.
Choi 사실 색은 하나의 방편이다. 색과 물성이 개입하는 정도는 특정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거나, 전체 형상이 유기적으로 한눈에 보이기 위한 ‘수단’이다.
―함께 제작한 수채 드로잉의 역할은 무엇인가?
Choi 조각이 작가의 손을 떠나 관객과 마주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생겨난다. 그것이 중첩되면 기억은 왜곡되고 의도는 흐릿해지며 경험은 복잡해진다. 그래서 의도와 경험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기록하기 위해 드로잉을 병행했다.
―최근 ‘조각’이 한국 동시대미술계의 화두가 됐다. Art는 2021년 9월호에 동시대조각을 주제로 특집을 기획했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은 <조각충동> (2022)전을 열었다. 당신에게 조각은 어떤 의미인가?
Choi 조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의구심 없이 넘긴 문제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몸을 써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이 촉각을 자극해 경험의 폭을 넓힌다. 조각은 인식과 사유가 주변의 사람, 사물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시공간에 조금 더 머무르게 하는 매개다. 조각의 잠재성을 고민하고 있다. 조각하기 좋은 때다.
―향후 작업 계획은?
Choi 2년 연속 개인전을 하니 여러모로 소진한 상태다. 당분간은 작업 과정에서 괄호로 남은 부분이나 어지럽게 널린 것을 채우고 정리할 예정이다. 앞으로의 작업 방향은 ‘추상’과 사회적 ‘실천’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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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ern Pace 3> 종이에 수채 77×58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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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앙 / 1975년생. 서울대 조소 전공 및 동대학원 석사 졸업. 학고재갤러리(2021), 대구 봉산문화회관(2019), 두산갤러리(뉴욕 2017, 서울 2010), 스페이스캔 베이징(2014), 안셈부르크미술관(2013), 성곡미술관(2011) 등에서 개인전 개최. <기적과 잠꾸러기>(두남재아트센터 2022), <더 센시스>(토탈미술관 2019), <별 헤는 날>(국립현대미술관 청주 2018), (오덴세 브란츠미술관 2016) 등 그룹전 참여. 경기도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