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시공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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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자작나무 합판에 유채 40×40×2.8cm 2023
유지영은 동시대회화의 조건을 탐구하는 젊은 작가다. 내용과 형식, 이미지와 프레임, 그림과 지지체의 관계를 주제로 페인팅, 설치, 오브제를 제작해 왔다. 최근 갤러리기체에서 그의 다섯 번째 개인전 <사이-횡단(Traverse In Between)>(6. 22~7. 22)이 열렸다. 이제까지의 예술세계를 심화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신작 27점을 공개했다. 이번 전시를 자세히 살피기 전, 작가의 주요 작업 개념을 간단하게 되돌아보자.
홍익대 회화과 학사와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슬레이드미술대학 회화과 석사를 졸업한 유지영은 2018년 한국에서 첫 개인전 <엎지른 물>(레인보우큐브)을 개최했다. 당시 작가는 다양한 품종의 새 머리와 새알을 소재로 회화작업을 선보였는데, 그 형태가 마치 장난감 스티커나 프라모델의 런너처럼 독특했다. 새의 얼굴, 알의 무늬 등 주요 이미지가 묘사된 부분은 캔버스에서 오려내 가지런히 진열하고, 그 옆에는 핵심 부품이 떨어져 나간 자투리 틀을 함께 세워두었다. 전시장에 멀뚱히 박제된 새 모양 오브제와 그 오브제의 테두리를 따라 구멍이 숭숭 뚫린 캔버스. 작가는 그림과 지지체가 분리되어 모두가 불완전해진 상황을 ‘구멍 난 컵과 엎질러진 물’에 비유했다.
“물은 컵이라는 물리적 기반에 담겨있음으로써 존재하고, 컵은 물이라는 내용물을 통해 사용 가치를 얻는다. 그렇다면 바닥에 구멍이 뚫린 채 물이 가득 담긴 컵이 테이블에 놓여있고, 그 앞에 앉은 사용자가 목이 마른 상황을 가정해 보자. 사용자가 들어올린 순간 컵을 빠져나가는 물은 자신의 본성을 제약하는 틀에서 벗어나지만, 그와 동시에 지반을 잃고 금방 증발될 위기에 처한다. 유용성에 종속되는 투명한 사물이었던 컵은 구멍이라는 비효용성을 통해 내용물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사용자를 좌절시킨다.” 유지영은 이미지가 프레임을 채우지 않고 프레임이 이미지를 지지하지 않을 때 회화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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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Morning, Good Night> 자작나무 합판에 아크릴릭 61×68×80cm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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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C-7> 체리나무, 체인고리 105.7×97.7×2.2 cm 2023
물과 컵, 내용과 형식
이후 작가는 2019년 <One After Another>(전시공간), 2021년 <Cupboard>(디스위켄드룸) 개인전을 잇따라 열며 관심사를 현실 세계로 연장해 갔다. 먼저 <One After Another>에서는 달력, 원고지, 계란판 등 그리드의 특성이 두드러지는 사물을 모티프 삼아 ‘회화의 틀’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내용과 형식의 양가적 관계를 연구했다면, 이때부터는 내용의 ‘배열 체계’에 더 흥미를 느꼈다. 숫자, 문자, 계란이라는 내용물이 각각 달력, 원고지, 계란판이라는 격자 구조에 칸칸이 채워지는 현상을 유심히 살폈다. 이때의 배열이란 단순히 사물을 나열하는 반복 행위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 진행되는 순서, 규칙, 관습까지로 넓혀볼 수 있다. 즉 글씨로 가득한 원고지를 엮어 한 권의 책을 만들듯, 붓질로 채운 회화를 모으면 하나의 전시가 탄생한다는 것.
<Cupboard>전에서는 이 배열 체계를 ‘집’이라는 주거 공간으로 도입하고, 회화를 ‘수납장’에 빗댔다. 수납장에 물건을 차곡차곡 보관하는 것처럼 프레임에 회화의 구성 요소를 배치한다면 그 순서는 무엇일지 질문을 던졌다.
2022년 유지영은 또 한 번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리움미술관이 20~30대 아티스트를 위해 최초로 마련한 개인전 프로그램 ‘룸 프로젝트(ROOM Project)’에 첫 번째 작가로 선발된 것. 그는 이 전시에 ‘시간들의 서랍’이라는 제목을 달고 서랍과 시계 형상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기존 테마인 ‘배열’에서 최근의 관심사 ‘시간’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과도기이기도 했다. 유지영은 보이는 이미지를 넘어 시간, 생각, 상상 등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작업의 범위를 점차 확장해 갔다. <사이-횡단>은 유지영이 본격적으로 시간을 키워드 삼은 전시다. 작가는 ‘1시간은 왜 60분이며 1년은 365일일까’라는 작은 궁금증에서 시작해 오늘날 인간의 생활 양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근대의 시간 개념으로 뻗어갔다. “세상의 여러 인위적 질서 중 인류가 고안한 시스템으로서 ‘시간의 틀’을 ‘구획화’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 규정된 시간의 덩어리 사이를 횡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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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Hours 20 Minutes> 자작나무 합판에 유채, 아크릴릭 28.6×30×2.8cm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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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영 개인전 <사이-횡단> 전경 2023 갤러리기체
그중 <Time Zone Panels>는 ‘표준 시간대’에서 출발한 시리즈다. 19세기 중반까지 각 도시는 저마다 다른 시간대를 가졌으나 철도가 발달하고 지역 간 이동이 늘어나면서 국제적 시간 기준이 필요해졌다. 유지영은 땅의 자연스러운 굴곡이 협정 세계시(UTC)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는 현상에 착안해 같은 시간대에 속한 지형을 패널로 옮겨왔다. UTC+0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짙은 색 수종을 사용하거나 제스모나이트의 철가루 비율을 높이고, 서로 다른 패널의 틈을 경첩, 클램프, 자물쇠로 연결해 인위적인 경계를 강조했다.
반면 <Day-Hour-Minute>과 <Long-Distance Relationship> 연작은 보다 개인적인 시간에 주목했다. 작가는 12진법이 적용된 시간 단위가 지구의 360도를 분절한 결과라는 사실에 영감을 얻어 캔버스를 원형의 타임라인으로 상정했다. 여기에 그가 하루 중 이동한 공간을 기준으로 원의 각도를 나누고, 그 구분선 위에 알록달록 물감을 뒤덮어 시간의 틈새를 무화했다. 전시장 벽에 부착된 <Day-Hour-Minute>이 한 사람의 시간을 대변한다면, 바닥에 설치된 입체작품 <Long Distance Relationship>은 두 시간대의 충돌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교류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이번 전시는 유지영이 또 하나의 도약을 시도한 뜻깊은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활동상을 미루어봤을 때 전혀 낯설거나 이질적인 변화는 아니다. 그는 시간이라는 사회 시스템을 중심으로 내용과 형식의 관계에 새로운 렌즈로 접근한다. 흘러가는 이미지를 붙잡는 회화 프레임에서 우리의 일상을 체계화하는 사회적 틀로. 그가 앞으로 우리에게 보여줄 더 풍부한 ‘물’, 더 다양한 ‘컵’이 기대된다. / 이현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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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영 / 1991년 서울 출생. 홍익대 회화과 및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슬레이드미술대학 회화과 석사 졸업. 리움미술관(2022), 디스위켄드룸(2021), 전시공간(2019), 레인보우큐브(2018) 등에서 개인전 개최. 금천예술공장(2021) 입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