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의 ‘마음’을 읽다

올해 발간된 아티스트 에세이 다섯 권을 소개한다. 에세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활자로 표현된 예술세계다. 작가의 일상과 철학, 작품의 막전막후는 예술가의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 향한다. 우리는 전시장에서 창작의 결과물과 만나지만, 때 빼고 광낸 작품에는 때 묻고 거무죽죽한 제작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창작은 전시장보다 훨씬 먼 곳에서 시작된다. 스튜디오, 연구실, 도서관, 산책로, 주점, 안방까지. 아티스트에게 영감은 장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작품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전시장 밖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야 한다.

이우환 <Dialogue>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0cm 2020
이우환의 작품이 끊임없이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 결과라면, 문인화가 김병종은 길 위에서 영감을 좇는다. 작가는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국내외 예술가와 교류하며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국내와 남미, 아프리카, 파리의 예술을 기록했던 작가가 『시화기행 2』에 담은 장소는 뉴욕이다. 김병종은 뉴욕 아티스트의 작품은 물론, 그들이 재능을 키워간 환경에도 초점을 맞춘다. 누가 뉴욕을 예술도시로 만들었는지, 또 뉴욕은 어떻게 예술가를 성장시켰는지 퍼즐을 하나씩 끼워나간다.
김병종이 뉴욕에 빠져든 이유는 이 도시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가에게 뉴욕은 “지옥이자 사막이고 그래서 매료되는” 장소다. 뉴욕에서 예술가가 탄생하는 까닭은 예술 없이는 도시가 너무나 척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늘 ‘야생화’를 마음속에 품어온 까닭을 알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사랑에는 아픔이 따른다.” 작가는 “살 비비고 손 흔들어줄 이 없는 곳에서 서성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뉴욕에서 배운다. “습기 찬 지하에서 만들었다가 햇빛 좋은 날 들고 나오는 그것.” 작가에게 예술은 거친 들판에 핀 야생화다. 뉴욕의 화려함이 그늘에서 시작되듯, 화가가 그린 야생화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 뿌리가 아픔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박혜수 <꿈의 먼지> 분쇄한 설문지(<당신이 버린 꿈>), 분쇄기, 타자기, 형광등 외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1
박혜수 예술세계의 주요 화두는 ‘상실’이다. 작가는 우리 삶에서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 묻고, 사람들의 답변과 사연, 관련 물품을 수집해 작품으로 만들어왔다. 『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에는 그 여정과 작업을 진행하며 떠올렸던 생각을 작가 노트 형식으로 담았다. 박혜수가 던지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어릴 적 포기한 꿈은 무엇인가, 헤어진 연인은 어떤 존재였는가, 첫사랑은 어땠는가, 지나간 젊음과 찾아올 노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다른 이에게 어떤 사람인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파진다. 그러나 현대인의 마음의 병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을 묻지 못하고, 듣고 싶은 것을 듣지 못하여, 지레짐작하면서 혼자 병들고” 있기에 생긴다. 작가는 사람들이 ‘묻지 않은 질문’을 대신 묻고, ‘듣지 못한 대답’을 대신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동안 박혜수의 작품에서 주요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이들은 구로공단 노동자, 코로나19 사망 유가족, 요양원 직원, 화장시설 장례사, 병동 의료진 등 스포트라이트 뒤편에서 사회를 지탱해 온 얼굴들이다.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작가는 더욱 귀 기울였다. 이번 책에 ‘사회학적 에세이’라는 평가가 뒤따르는 이유다. 책의 시작과 끝엔 “당신은 당신을 좋아하나요?”라는 동일한 문장을 적었다. 이제 독자가 답해야 할 때. 책을 읽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다 읽은 후에는 자신 있게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오민 개인전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전경 2022 일민미술관
『포스트텍스처』는 설치작가 오민의 고유한 작업론을 소개한다. ‘포스트텍스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는 오민의 글 세 편과 이를 다각도로 비평한 연구자 6인의 글이 함께 실렸다. 작품을 뒷받침하는 이론을 작가에게 직접 듣는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민은 동시대음악이 선율은 사라지고 덩어리만 남은 상태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는 멜로디 중심의 음악적 위계가 무너지고 선율 아래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난 결과다.
“분명 다수의 소리가 함께 울렸는데 하나의 선으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소리 사이에 부여된 위계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덩어리적 감각은 “비위계적 관계를 지향”하고, “주변이라 여겨진 것들을 내부로 흡수”하며,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운동”한다. 비선형적 서사의 대두, 내러티브의 실종은 이미 동시대예술의 자연스러운 특징이다. 그러나 오민은 그 실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더 깊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미 모종의 답을 얻었더라도, 오늘 얻은 답이 내일 역시 여전히 답이라 확신할 수 없”으니 “매일매일 달라지는 그 답을 찾는 것.” 그것이 오민의 작가론이다.

영화 <모어> 스틸컷
『털 난 물고기 모어』는 드랙퀸 아티스트 모지민의 수필집이다. ‘모어(毛魚)’는 사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털 난 물고기’를 지칭한다. 남들과 다른 정체성에 불안했던 어린 날에서 출발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며 꿋꿋이 삶을 지켜온 한 인간의 삶을 생생히 펼친다. 이태원의 지하 클럽 트랜스에서 뉴욕 전위예술의 메카 라마마 극장 무대에 우뚝 서기까지, 작가가 거쳐야 했던 가시밭길 여정을 특유의 발랄함과 유머를 곁들여 풀어냈다. 모지민은 때때로 “나는 어쩌자고 태어났을까”라고 묻기도 하지만, 그는 기어코 “아름다운 집이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고 아름다운 영화가 있는데 뭐가 그리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을까요. 어쩌겠어요. 이번 생이 이 팔자라면 그 개 같은 운명에 백기를 들고 순리로서 살아가야지요”라는 긍정의 답을 내놓는다. 독자는 문장을 이렇게 고쳐 읽는다. ‘아름다운 사랑이 있고 아름다운 영화가 있고 아름다운 모지민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