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남한의 미디어 풍경과 불경스런 징후들
<<art in culture 2012년 6월호 -암흑물질(http://www.artinculture.kr/)>>
삐라, 반공, 주술
역사적 트라우마는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강박적으로 재생산되는가? 필자는 해부칼을 든 의사처럼 남한의 곪아터진 기억과 망각의 상처를 도려낸다. 역사적 정신적 외상의 기원과 풍경들이 굿판처럼 펼쳐진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전쟁기념관의 밀랍인형, 박정희 독재 정권과 압축 근대화, 반공만화의 주인공들, 개신교와 무속 샤머니즘, 1990년대 ‘X-세대’,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IMF사태…. 숨차게 그려 놓은 ‘기억의 습작’에, 우리의 민얼굴이 점선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너무 커버린 내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망각에 찬사를 보낸다는 것, 그것은 기억을 비방한다는 것, 더더욱 추억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망각의 작업을 인정하고 추억 안에서 그것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은 어떤 의미로는 삶이나 죽음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막 오제(Marc Auge), 《망각의 형태》, p. 17.
2010년은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그리고 이듬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자연재해부터 정치외교 관계에 대한 식민후기적 증후와 잉여의 원한들이 온라인상에 날 것의 담론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센다이 시 앞바다에 리히터 규모 9.0의 강진이 발생하여 1만여 명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었다. 잇따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불행은 남한인들에게 스펙터클한 광경을 목도하는 관객으로서의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인 동시에 역사적 인과응보의 자연적 징계로 독해되었다. 한국-베트남 수교 20주년을 앞두고 쯔엉떤상 베트남 국가주석의 남한 방문을 통해 양국이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됨을 재확인하는 공동성명과 양해각서를 11월 9일 체결함으로써, 1968년 파병된 한국군이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닛에 대규모의 민간학살을 자행한 역사적 사실들이 망각되었다. 그리고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9월 3일에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분신자결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조합단체 운동가로 활약했던 이소선 여사가, 12월 30일에는 유신군사독재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김근태 의원이 사망했다. 2011년은 이렇게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남한, 고통과 균열의 경합장
21세기 남한의 담론공간은 우세한 담론이 자신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반면 종속적 담론, 이를테면 일탈적 하위문화의 언어는 우세 담론과 교섭하거나 통제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담화적 이질언어의 장(heteroglossia)이었다. 시장경제에 지배당한 자들의 담론은 늘 고통의 경합장이다. 그래서 사이버공간의 담론장은,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경직된 우세 담론과는 상반되는 대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사회의 기억과 상흔의 현실이 더욱 또렷이 부각되었다. 앞서 언급한 2011년에 발생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사이버공간에서 한 세기 동안 중층적 식민경험을 겪은 피식민지자의 이중적 정체성들이, 예언과 종말론, 주술과 민간신앙의 논리, 일본의 전쟁 과오들이 자연재해로 응징되고 있다는 인과응보의 민족주의적 카타르시스로 재접합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 국가 속에서 서로 다른 자본주의적 수혜를 받고 자라난 세대 간의 균열을 가속화하는 경합의 터전이 되었다.
해방 전후, 일본과 북한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반식민 민족 담론과 반공 교육을 통해 자기 분열을 겪으며 식민 경험을 대리 경험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일본의 자연재해와 북한인들의 서러운 울음은 그저 물화된 슬픔과 비이성적 애도에 지나지 않았다. 스펙터클 속 타인의 고통은 남한인의 영속된 집단 트라우마와의 알레고리적 연계를 통해 더욱 물신화되고 특권화된 전 역사적 희생자 의식의 보상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남성적 민족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감염된 남한에서 연속되고 있는 트라우마들의 추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왜 특정 역사 기술들은 항상 이중적 시간과 장소로서, 우리 내부에 잠재된 민족주의와 미시적 파시즘이라는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일까?
기억의 얼굴성
망각의 목소리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굿판
흥미롭게도 이용주 감독의 장편데뷔작 〈불신지옥〉(2009)은 이런 포스트 IMF세대의 히스테리아를 호러의 은유로 풀어 낸다. 〈불신지옥〉은 한국 근현대사를 재단해 온 복잡다단한 정치사회 문제들에 헐겁게 끼워진 미국 지향적 압축 근대성의 구조, 해방 이래 조국 근대화에 매달려 온 중산층 소시민의 무의식적 불안감 그리고 그 속에 중첩되어 있는 기복신앙적 욕망의 충돌을 그려 내고 있다.
1994년 부실공사로 다리가 내려앉아 32명의 사망자를 낸 성수대교 사건과 그 이듬해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502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새마을운동으로 촉발된 산업화사회의 조국근대화와 총력적 국민 동원, 그에 대한 무자각적 대중 추수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음을 뼈저리게 각성시켜 주는 시각적 증거물이 되었다. 야만에 맞서 생성된 문명의 끝이 결국 야만으로 귀결되는 아도르노식 회귀성은 삼풍백화점 자리에 새로 들어선 주상복합 아크로비스타의 지하에 유령이 출몰하고, 1989년 12월 개장 이후 강남구 서초동에서 남한 고도성장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삼풍백화점 터가 원래 조선시대 상궁들의 무덤 터였다는 흉흉한 괴소문으로 반복 회자된다.
박정희식 비이성적 압축 근대화
아쉴 음벰베(Achille mbembe)는 미셸 푸코, 칼 슈미트, 조르조 아감벤의 생체정치, 근대적 규율 권력과 주권이론을 전유해 국가는 언제든 국민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짐으로써 그들의 삶을 통제하고 굴복시킨다는 의미로, 근대 국가 권력을 네크로폴리틱스(Necropolitics)라 명명했다. 국가 권력에 부여된 ‘살인면허’를 통해 1948년 제주도 양민학살이나 거창 양민학살 등 후식민적 기억을 몸소 체현한 세대들에 있어 근대란, 반드시 달성해야 할 염원인 동시에 끊임없이 후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소진’해야 하는 상흔의 장소로 작동된다. 따라서 한국인의 베트남 참전이라는, 다분히 제국(미국 혹은 일본)에의 의태적 모방은, 총력전기 건강한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보내고 죽음으로 천황에게 보답하라며 세닌바리를 한땀한땀 떴던 총후 부인의 서사를 그대로 답습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권력을 잡은 직후 경제개발을 국가의 ‘총력’ 목표로 삼고, 그 일환으로 1965년 8월 일본과 외교 정상화를 맺었다.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경제 군사적 원조를 받는다는 내용의 밀약인 ‘브라운 메모렌덤(Brown Memorandum)’을 체결하며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약 3만여 명이 넘는 건장한 한국남성들을 베트남의 정글로 떠밀어 넣었다. 전후 일본은 패망과 미군 점령의 트라우마 그리고 다시는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헌법 제9조를 통한 재남성화(remasculinization)의 불가능성을 통해 인격 분열을 겪었다. 그러나 전후 남한의 집단 트라우마는 전제정치의 시퍼런 서슬 아래 미국과의 자발적 동맹을 통해, 노동자의 욕망을 억압하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남근적 자본주의 가해자의 탈을 쓴 채 식민자를 모방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전후 한국의 후식민적 근대국가 건설과정서 국가통제형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배태할 수밖에 없는 비합리성과 광기를 낳는 계기가 된다.
치유의 근대성으로
이용우 코넬대 아시아학과와 인문사회연구소(Society for the Humanities)에서 비판적 미디어 문화연구, 동아시아 소리문화, 후식민적 역사 서술방식과 번역 문제, 집단 무의식과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 및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동아시아 대중음악으로 식민의식의 연속성과 근대성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함께 살펴볼 《Voices between Empires》를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