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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과과신,헛바람대잔치

LookBack2022

202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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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은미술·디자인비평가다.지난11월제주비엔날레프레스투어가파도에서.

나는 한국 현대 미술계의 2022년에 '헛바람 대잔치'라고 이름을 붙였다. 연초만해도 미술시장의 호황 덕분에 어딜 가나 NFT 아트 관련 질문을 받곤 했다. "예술적 실험으로서의 성격을 띤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별 의의도 없고 투자 가치는 더더욱 없다"고 답을 하면, 화를 내는 질문자도 있었다. 듣고 싶었던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2월 28일에 심심풀이로 인스타그램에서 여론을 조사해 봤다. "국내 미술시장 버블은 3월 대선까지다 VS 아니다, 9월 2일 프리즈 서울까지 간다. 여러분의 예상은?"이 내용이었다. 대선까지라고 답한 이들이 22%였고, 9월 2일까지 간다고 예측한 이들이 78%였다. 아무튼 버블은 2008년의 전례와 달리, 큰 부작용 없이 잦아든 모습이다. 내년 경제 위기를 딛고 재도약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한데 1929년 대공황 때 뉴욕현대미술관은 문을 열었고, 앨버트 반즈(Albert barnes)는 걸작 수집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2021년 4/4분기부터 이미 한국 현대 미술계의 거의 모든 일정이 프리즈 서울에 맞춘 것처럼 굴러갔기 때문에, 2022년은 프리즈 서울의 해였다고 봐야 옳겠지만, 그래서 정말로 프리즈 서울이 완전히 새로운 판도를 창출했느냐고 물으면, 아직은 답이 '글쎄올시다'일 수 밖에 없는 듯하다. 아트바젤 홍콩에 비하면 약소한 매출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앞으로 4년간 프리즈 서울은 성공적으로 개최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일단 다른 도시로 갈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해외 주요 작가들이 비즈니스를 핑계로 (가족을 동반해) 놀러오고 싶어하는 흥미로운 도시가 현재 서울이니까?

'헛바람 대잔치' 덕분에 한국 현대 미술계에 기이한 활력이 돌며 거의 모두에게 일거리가 베풀어진 것도 나쁘지 않았다(이렇게 말씀하면 일거리가 없어서 고생한 분들은 화를 내시겠지만). 특히 오랜만에 청년 작가들까지 크고 작은 일정에 치어서 바쁜 모습을 뵈니, 일종의 안도감마저 들었다. 프리즈 서울 기간에 1990년대생 작가들이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국제적 기회에 초대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20대를 보내느라 고생한 1980년대생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다 세대별로 팔자라는 게 있다지만, 사실 결과는 더 길게 두고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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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련<세-2-2_27>종이에수채27×21cm 2020

부진했던 실험과 혁신

일 년 내내 미술계에 이슈와 일정이 차고 넘쳤지만, 2021년과는 달랐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초기 충격에 힘입어, 2021년 한해 동안 한국의 현대 미술인들은 여러 문제적 작업과 전시를 일궈냈다. 긴장감과 위기감을 자양분 삼아 재도약의 기세를 일궈낸 2021년은 참으로 특별했다. 하지만 2022년 한 해를 되돌아보면, 문제적 신작이 의외로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획자들이 전시의 얼개를 잘 꾸려놓은 경우에도, 출품작들은 기대에 못 미치곤 했다. 언제나 실험적 문제작은 특정 시기에 몰려서 발표되곤 하는데, 2022년은 특히 청년들의 신작으로 보면 사실상 휴지기에 가까웠다.

그래도, 김해주 전시 감독이 기획한 부산비엔날레는, 과거의 과시적 비엔날레들과 다른 시적 정조의 전시로 호평을 받았다. 국제적 규모의 비엔날레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서도 전시 감독은 '이주, 여성과 여성 노동자, 도시 생태계, 기술의 변화와 로컬리티'라는 네 개 키워드를 바탕으로, 대안적 얼개들을 큰 무리 없이 직조해냈다. 1980년대생 미술인들이 곳곳에서 활약하며 내실 있는 모습의 국제전을 구현해내는 모습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1980년대생 큐레이터들이 국공립미술관계에서 리더십 포지션에 오르게 된다면, 정체된 미술관계에도 분명 새로운 바람이 일 것이다.

2022년 통들어 가장 감명 깊었던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의 승려 장인>(2021. 12. 7~3. 6)과 교체 전시 <화승畫僧-끝나지 않은 이야기>(2. 3~)였다. 화승 집단의 궤적을 추적해 조선의 불교미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해낸 이 기념비적 전시에, 생각보다 관객이 적게 든 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선 시대의 미술을, 백자나 분청 등 도자사로 보거나, 선비의 시서화나 목가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던 한계에서 벗어나는, 나름 감개무량한 자리였고 전통의 기준점을 재사고해야 하는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았었는데. 회화의 조각적 번역에 해당하는 단응의 용문사 목각탱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 전시의 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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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2월말 인스타그램에서진행한미술시장여론조사.

조각의 재창안

2022년의 한국 현대 미술계를 특징 지은 흐름은 조각 재창안의 실험이었다. 2010년대에 화제가 됐던 회화 재창안의 흐름에 뒤이어 설치미술 몰락 이후의 조각이 의제화되는 형국이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개막한 <조각충동>(6. 9~8. 15)전은 포스트-컨템퍼러리 시대의 청년 조각가 17인을 한자리에 소환한 문제적 전시로서, 한 시대를 규정했다고 생각한다. 여성 조각가의 계보를 추적한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6. 10~7. 9 웨스)전이나, 최태훈 개인전 <우드 타입>(7. 6~8. 7 개오망스튜디오), 그리고 곽인탄 개인전 <팔레트>(10. 5~11. 5 공근혜갤러리) 등과 함께 더 폭넓게 논의됐어야 했다. 반드시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조각 비평의 언어를 크게 상실한 한국 현대 미술계는 다소 무능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뵀다.

1990년대생 조각가 17인이 의기투합해 조직한 콜렉티브 OS(OBSERVER: SCULPTURE)가 현재 3부작 전시 <개척자와 부유하는 시>(11. 2~11. 13), <베노몰드(VENOMOLD)>(11. 16~11. 27), <압점시각>(11. 30~12. 11 의외의조합)을 전개하고 있고, 또한 문이삭 개인전 <록&롤>(11. 24~2023. 1. 28 뮤지엄헤드)도 이어지고 있으니, 보다 새로운 각도에서 비평적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반면 준-연예인 조각가 최하늘은 프리즈서울 기간에 맞춰 개인전 <태>(8. 25~10. 1 갤러리2, P21)를 갤러리 두 곳에서 개최하고, 또 신은진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같은 기간 2인전 <나를 닮은 사람>(8. 23~10. 2 일민미술관)까리 치렀다. 과도한 힘자랑에 비해, 숙고의 시간을 거친 작업은 보기 어려웠으니, 데뷔 초기와 달리, 좋게 평가하는 이가 드물었다.

3월에 개관한 민복진미술관도 작은 화제였는데, 미술관 건축은 터무니없는 엉터리라서 빈축을 샀다. 하지만, 헨리 무어의 매스 실험을 토착화하고자 애썼던 조각가의 작업 세계를 일람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감사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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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민경<0시의땅>종이에목탄220×150cm(12점)2022(왼쪽),<동숙의노래>캔버스에목탄193.9×259.1cm2022(오른쪽)

올해의 전시, 올해의 인물

내가 2022년의 작가로 꼽는 인물은 문화인류학자의 자세로 조사하고 연구하는 화가 김혜련이다. 개인전 <그림을 쓰다: 훈민정음>(1. 10~28 한국거래소마켓스퀘어)과 <예술과 암호, 마한의 새>(3. 15~6. 12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삼각산금암미술관)를 통해, 그는 과거 각 시대 각 지역의 유물을 관문 삼아 고대로 연결되는 지도 혹은 지혜의 나무를 그려나간다는 원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과거와 오늘 사이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그의 선묘회화에서 상상한 적 없는 미래가 창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전통을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앞선 세대의 그 어떤 작가와도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독학자 우매진은 개인전 <화성 자동차 공업사의 여인들>(7. 25~8. 14 화성자동차공업사)에서 윌럼 드쿠닝을 재해석한 그림으로 새로운 흥취의 멋을 보여줬다. 에로틱한 붓질로 ‘환영이 되지 않는 형상’과 씨름하는 모습은, 요즘의 미술대학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한편, 화가 전성훈은 개인전 <지구의 비-마법사들(Non-Magiciens de la Terre)>(8. 26~9. 10 이태원로54길13)에서 구세대 타자성 미학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드러냈다. 타자를 대안적 전복성의 채널로 사고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그는, 그리다가 멈춘 듯한 그림을 통해 타자를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반면 서울퀴어콜렉티브로 활동했던 기획자 겸 작가 권욱은 기획전 <유보: 나는 [ ] 대통령을 원한다>(7. 28~8. 7 TINC)를 통해 보다 분명한 퀴어 정치학의 얼개를 제시했다. 김유민 김하늬 김현빈 박주영 산사 아장맨 임윤진 정제이 채다연 허호가 퍼포머로 나선 전시 공간에서, 여러 하위 주체의 정치적 입장과 꿈이 제시되는 장면은 흥미로웠지만, 차별금지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는 엉터리 민주주의의 과정에 대한 비판으로서 실효성을 갖기엔 다소 시적인 행위로 뵀다. 반면에 시적 상상력의 실험으로 보자면 정치적 올바름, 레디컬 페미니즘 등 여타 많은 제약을 과의식하고 있는 듯 뵈기도 했다. 한데 이렇게 잘 계산된 연대의 기획 속에서도 젠더 비순응 정치학은 도드라지지 않았으니, 한국의 특수성이라고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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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링파디<People’s Justice>캔버스에아크릴릭800×1,200cm2002

현대미술은 세계관 싸움

2022년 현재 글로벌 미술계를 규정하는 큰 흐름은, 여성과 소수자의 실권 획득과 환경 정의 구현을 위한 지속 가능성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체칠리아 알레마니가 총감독한 베니스비엔날레 <꿈의 우유>는, 그러한 흐름에 부합하는 기획으로서 널리 상찬받았다. 여성의 관점으로 초현실주의에서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르는 역사를 재구성하고, 그를 통해 젠더 비순응 주체와 페미니스트 사이의 새로운 연합 지점까지 제시했으니, 선언적 구성에 그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반면 콜렉티브 루앙루파가 기획해낸 도쿠멘타15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과 시오니즘을 비판해 보려다가 반유대주의로 낙인찍히며 제도 자체의 몰락을 야기하고 말았다. 나치 전력자가 문화 독일의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마련했던 현대미술 전시 제도가 도쿠멘타다. 전후 미국 중심의 현대미술계에 편승하던 도쿠멘타를 1972년 논쟁적 전시로 개혁해냈던 이가 하랄트 제만이었고, 그 뒤 크고 작은 혁신이 이어졌지만, 이제 더는 기존 제도의 존속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그런데도 국내의 미술지엔 전시를 호평하는 리뷰 기사가 나왔다. 대체 뭘 본 것일까.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올해 ICOM에서 국제 미술관계는 뮤지엄의 새로운 정의를 도출해내기도 했다: “뮤지엄은, 유무형의 유산을 연구하고, 수집하고, 보존하고, 해석하고, 전시하는 사회에 헌신하는 비영리적 영구 기관이다. 대중에게 개방되고, 접근 가능하고, 포괄적이며, 뮤지엄은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그들은 교육, 즐거움, 성찰, 지식 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면서, 윤리적으로, 전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의 참여와 함께, 운영하고 대화를 나눈다.”

지속 가능성은 이제 모든 미술관의 공통 과제가 되고 있다. 뉴욕현대미술관의 경우 작년 ‘자연과 건설된 환경의 공동 연구를 위한 에밀리오 암바즈 연구소(Emilio Ambasz Institute for the Joint Study of the Built and the Natural Environment)’를 출범히며, 대대적인 혁신을 약속했다. 더 늦기 전에, 한국의 주요 미술관와 작가 스튜디오도 탄소 발생 보고 체계와 탄소 상쇄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반드시 실천에 동참해야 한다.

왜 한국의 현대 미술계에선, 여성과 소수자의 실권 획득과 환경 정의 구현을 위한 지속 가능성의 실천이 두드러지지 않을까? 왜 퀴어 미술운동의 흐름에서조차 젠더 비순응 주체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당신은 더 나은 내일을 요구하고 그를 구현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가?

결국 현대미술은 세계관 싸움이다. 만약 누군가 편안한 구태의 세계관으로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가 현대예술과 미래 사회의 적이다. 악은 어디 멀리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실권으로서의 악은, 점잖게 직위를 차지하고 앉아 우리 곁에서 신사적으로 미소짓고 있다.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2024.11.01~)
[만료]고흥군청(2024.11.01~2025.01.08)
[만료]한솔제지(2024.11.13~2025.01.08)
아트프라이스(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