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 AI, 예술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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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픽 아나돌 개인전 <Unsupervised> 전경 2022 뉴욕현대미술관
390인치에 달하는 초대형 디스플레이에서 ‘색의 파도’가 겹물결을 이루며 굽이친다. 얼핏 평범한 미디어아트처럼 보이지만, 영상은 후반부에 도표와 수식을 내보이며 이 이미지가 AI로 제작한 것임을 밝힌다. 레픽 아나돌(Refik Anadol) 개인전 <Unsupervised>(2022. 11. 19~4. 15 뉴욕현대미술관)에 출품된 동명 작품의 이야기다. 작가는 미술관이 소장한 근현대 작품 13만 8,151점을 AI에 학습시켰고, AI는 이를 자유롭게 재해석해 시각화했다. 미술관 로비에 이 작품이 전시되자, 미술계 안팎에선 AI가 만든 작품을 예술로 받아들인 전환점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아나돌 작품의 의의는 전시 제목이 지시하는 것처럼 작품이 ‘비지도(unsupervised)’, 즉 통제 없이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작가는 AI를 학습시켰을 뿐 제작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머신 러닝 이후에 미디어아트를 만든 것은 오로지 AI의 독자적인 프로세스다. AI 스스로 작업을 만드는 방식은, 우리가 AI를 자의식이 있는 ‘유사 인간’으로 느끼게 한다. 만약 AI가 인간처럼 학습을 통해 그림을 배우고 제작한다면 AI의 예술이 인간의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AI의 작업은 제네레이터의 것인가 혹은 명령어를 입력한 유저의 것인가. 또 AI가 다른 작가의 화풍을 도용한다면 저작권 침해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새로움과 정동, 작품성의 기준
일련의 물음은 작품성과 소유권, 저작권 등 총 세 가지 쟁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작품성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인간의 예술조차 작품 평가에 대한 객관적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AI예술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다. 동시대미술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독창성, 즉 ‘새로움’이다. 이를 잣대로 보면, AI예술의 작품성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AI의 작품은 아나돌이 그랬듯 천문학적 규모의 머신 러닝 결과일 뿐이다. 프로그램은 기성 작품을 데이터화하는 과정을 통해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형상을 선택하고 조합해 내놓는다. AI회화가 대부분 기시감을 일으키는 이유는 기존의 패턴과 스타일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반론도 가능하다. 인간 예술가의 ‘새로움’ 역시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 진공 상태에 사는 미술가는 없다. 오늘날 미술사가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작가는 적어도 사회가 ‘아트’라고 규정한 테두리 안에서 작업을 이어간다. 설령 미술사에 존재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기존 작품을 참조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AI화가의 재구성 또한 ‘새로움’을 위한 변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정동(情動)을 기준으로 작품성을 평가할 수도 있다. 작품이 지닌 정서는 작가의 생애나 작가관이 녹아든 표현에서 발현된다. AI는 표현을 따라할 순 있어도, 인간 작가의 인생을 흉내 내진 못한다. 결핍이나 상처를 지닌 인간은 의도적인 표현뿐 아니라, 비의도적인 불완전함과 모순을 통해서도 내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AI의 모든 표현은 철두철미한 계산에 의해 완성된다. AI의 액션 페인팅엔 우연이 존재하지 않으며, 수묵의 농담 또한 우발적인 번짐이 아니라 고정 값일 뿐이다. 프로그래밍된 완벽함엔 감정이 이입될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점 역시 의문은 남는다. 인간의 욕망을 분석해 생성한 선정적 AI아트가 포르노 사업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인간 감정에 대한 이해가 고도화된다면 인공 지능은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작품 역시 만들어낼 수 있다.
다음은 소유권에 관한 쟁점이다. 이는 현대미술의 저자성과도 관련된다. AI아트는 유저의 명령어에 따라 생성된다. 스타일, 대상, 주제 등 원하는 그림을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제너레이터에 문장을 입력하면 AI는 그다음부터 유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작품을 완성한다. 커미션 작업과 유사하다. 이 경우 결과물은 누구의 것일까. 유저의 저작물임을 주장하는 쪽은 작품의 ‘시발점’에 주목한다. 바우하우스의 모홀리-나기가 전화로 색상과 좌표를 주문해 그림을 제작하거나, 앤디 워홀이 공장을 차려놓고 어시스턴트에게 작품을 지시한 것처럼, 예술은 과정보다 그 시작인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제너레이터의 소유를 주장하는 쪽은 명령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린 ‘구성’에 주목한다. 단 한 어절만 입력해도 AI는 그것을 능가하는 작업을 쉽게 완성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유저가 상상하지 못했던 것에 가깝다. 시작과 끝.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론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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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제너레이터 ‘미드저니’로 기자가 직접 제작한 그림. 알렉스 카츠 스타일로 자화상을 그려달라 요청했다. AI가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프로그램이 제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만큼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AI 기술은 기존의 데이터를 재구성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마지막 쟁점은 저작권이다. AI의 학습에 도용되는 작품의 저작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 표면적으로 이 문제는 빠르게 합의에 도달하리라 보인다. 오픈AI와 같은 AI 개발 기업은 셔터스톡 등의 이미지 사이트와 제휴를 맺고, 사용료 지불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게 결론이 나지는 않는다. 애초에 모든 이미지를 라이선스화하는 것도, 또 무분별하게 데이터를 수집하는 AI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다. 게다가 인간의 표절 문제도 가려내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원본과 거리가 먼 그림이 AI에게서 나올 경우 이를 도용으로 입증하는 것 역시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AI의 표절 여부조차 AI에게 맡겨야 할지 모른다. AI의 창작 과정에서 불거지는 이슈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낙관론이든 비관론이든 앞으로 AI예술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숙명이다. / 조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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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출신의 게임 디자이너 제이슨 앨런이 미드저니로 만든 <Theatre D’opera Spatial>(2022). 콜로라도주립박람회가 개최한 미술대회에서 디지털아트 부문 1등에 올라 논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