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발굴, 소환의 윤리

부산현대미술관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전을 보고
2025 / 10 / 01

스웨덴 출신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는 일찍이 영적 에너지를 추상적 필치로 그려냈다. 지금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 <적절한 소환>(7. 19~10. 26)이 열리고 있다. 아프 클린트의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를 포함한 총 139점을 선보인다. 필자는 아프 클린트에게 따라붙는 ‘최초의 추상화가’ 타이틀의 모순을 짚고, 이번 전시를 통해 대안적 비평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

개인전 <미래에 남긴 그림> 전경 2018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Photo: David Heald. © 2018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힐마 아프 클린트는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부터 신지학에 관심을 가졌고, 스톡홀름 왕립예술학교의 정규 미술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아프 클린트는 생전 몇 차례 전시에 참여했다. 그러나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고, 신지학에서 출발해 인지학을 창안한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조차 그의 작업을 낮게 평가했다. 이후 아프 클린트는 작품을 외부에 드러내는 일을 멈추고 미래를 기다렸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20년 후에 작품을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작품이 다시 소개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2018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미래에 남긴 그림>(2018. 10. 12~4. 23)이 6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아프 클린트를 동시대에 완전히 소환했다.

이 전시에 많은 이가 주목한 이유로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프레임이 효과적으로 작동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프 클린트가 칸딘스키보다 앞선 시기에 추상회화를 선보였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와 전시로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아프 클린트는 오랜 시간 미술사에서 배제되어 왔다. 이 점에서 2018년 회고전은 작가가 왜 ‘잊힌 선구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했다. 당시 스웨덴 사회의 문화적 조건, 보수적인 구조의 미술제도, 그리고 미술사적 서술에서 드러나는 성별 편향이 그 배경으로 제시되었다. 또한 전시는 미술관 건축인 상승 동선을 따라 작가의 대형 회화를 차례로 배치해, 아프 클린트의 선구성을 드라마틱하게 담아냈다. 이런 연출은 ‘숨겨진 역사의 발굴’이라는 언론 보도, 관객 후기와 결합해 전시가 대중적 호소력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힘을 보탰다.

<진화> 캔버스에 유채 99×130cm 1908

최초의 추상화가, 그 발견과 소비

그러나 이 사례처럼 아프 클린트를 둘러싼 발굴 서사가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정작 작품 자체에 대한 경험과 기억은 축소될 우려가 있다. 관객은 작품의 조형적 실험이나 고유한 상징 체계보다는 서사적 프레임을 먼저 소비하며, 그 결과 작품 세계 자체에 대한 유의미한 관심은 점차 약화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작품 관람 경험을 단순화하고, 때로 작품을 다각적이고 다층적으로 해석하려는 학술적 논의마저 특정 관점에 종속할 위험을 수반한다.

한편,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프 클린트를 정말로 ‘최초의 추상화가’로 명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미 모순을 내포한다. 아프 클린트가 선구적인 추상화가임에도 오랫동안 비가시화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통적인 미술사가 남성 중심적이고 선형적이며, 계보학적인 서술 방식을 채택해 왔기 때문이다. 아프 클린트를 ‘최초’로 복권하는 시도는 작가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존의 남성 중심적이고 선형적인 미술사를 반복하는 일에 가깝다. 이는 지연된 인식의 문제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당대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다른 예술가에게까지 동일한 서술 패턴을 적용하게 만든다. 특히 오늘날 여성주의가 화두인 맥락에서는 단지 여성이라 재평가되는 것 아니냐는 폄하적 의심이 뒤따르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 비평가 힐튼 크래머(Hilton Kramer)는 아프 클린트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과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 말하며 이런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결국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도 진정한 복권이란 미술사 서술 구조를 끊임없이 재고하는, 객관적이고 정밀한 비평 속에서 가능해 보인다.

또한, 지금까지 미술사 내부에서 추상은 대체로 인간 주체가 수행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아프 클린트의 추상은 인간 주체의 창조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연이나 영적 존재 같은 비인간적 차원과의 접속을 회화 언어로 전환한 사례였다. 이는 근대적 인간 중심주의가 지배해 온 미술사적 틀에 균열을 가할 가능성을 보여주며, 오늘날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사물, 물질, 자연, 비인간 존재가 지닌 능동성을 인정하는 신유물론적 사유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지금은 선후 관계에 치우친 평가보다는 대안적 비평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개인전 <적절한 소환>전 전경 2025 부산현대미술관_전시장 일부 가벽에 창을 뚫고, 건너편 작품을 노출하는 유기적인 전시디자인을 선보였다. 작가의 주요 작품 세계인 신지학의 ‘보이지 않는 흐름’을 시각화했다. Photo by 노루페인트

지금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프 클린트의 대규모 회고전은 우리가 작가를 어떻게 다시 불러내야 하는가의 질문을 동반한다. 제목 ‘적절한 소환’이 그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미술관은 “적절한(proper)이라는 단어가 현재 그의 이름이 지나치게 호출되고 소비되는 현상을 비판하며, 보다 신중하고 책임 있는 호출이 필요함을 강조한다”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적절한 소환’이란 화려한 복권이 아니라 조용히 불러내어 응시하고, 순환하며, 천천히 판독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상승의 서사를 따라가기보다는 동일한 고도에서 작품을 교차한 전시 동선이 이런 태도를 공간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중요한 건 관객이 전시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응시를 수행하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따라서 관람객 수 같은 양적 성과를 넘어, 이러한 반응을 포착할 수 있는 정성적 평가 기준 역시 요구된다.

뉴욕 전시 이후, 그리고 부산 전시 이전에는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더 비욘드>(3. 4~6. 15)라는 회고전이 진행됐다. 전시는 아프 클린트의 작품 세계를 질서 있게 배열하는 데 주력했다. 이처럼 뉴욕, 도쿄, 부산으로 이어진 각 전시는 모두 같은 작가를 다루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이름을 부르며 나름대로의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는 아프 클린트를 다시 불러내는 일이 미술사의 활자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전시’라는 사건에서 기획자와 작품, 관객이 상호 작용하며 전개되는 다층적 실천임을 보여준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다음 호출은 어디서,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그 과정은 특정한 의도대로만 쓰이지 않을 것이며, 예측 불가능한 궤적 속에서 미술사를 새롭게 서술하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은 바로 그 불확실성과 가능성에 꾸준히 주목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