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뉴비전] 파이널리스트 미션 ③자유주제 평론
2012 / 11 / 12
art in culture 주최 신진평론가 발굴 프로젝트 New Vision. 그 6회 당선자를 다음달 art in culture 12월호 지면에 발표한다. 지난 8월 예심 심사를 통해 선정된 3인의 파이널리스트 강정호 김용진 안소연은 3개월간 3차례의 본선 프로그램을 거쳤다. artWA에도 소개한 바 있는 ①전시리뷰 ②작가인터뷰에 이어서 이번에는 마지막 본선 프로그램인 ③자유주제 평론을 공개한다. 강정호는 지난 2차 본선에서 정택용 작가와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더 깊이 파고들어간다. 예술이 제도화된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소외된 계층까지 끌어들여 '현장미술'로 확장하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김용진 역시 지난 작가인터뷰에 함께 한 권오상의 작업세계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 권오상을 비롯한 최수앙 김혜진 등 젊은 작가들이 '몸'에 주목하고 있는 현상을 조명한다. 안소연 또한 이불 김수자 안규철 세 작가가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부분에 초점을 두고있다. 각 작가가 현대미술계의 주된 관심사인 장소와 관계를 다루는 데 '도시'를 활용하는 이유를 살펴본다.
예술이 ‘삶의 조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제도권을 벗어난 현장미술의 가능성
글 | 강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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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용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아래>(부분) 2011
정택용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그의 사진에 담긴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간동이나 청담동 혹은 한남동에 자리잡은 전시 공간을 찾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그 공간과 그 사람들 양쪽 모두에게 모욕이 될 불협화음만 일으킬 뿐, 도무지 현실감 있는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그 사람들과 그 공간을 분리시키는 가시적인 장애물은 전혀 없었지만, 그 사람들이 그 공간 속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광경은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그 공간이 나타내고 있는 예술 세계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듯 서로에 대해 이질적이었다.
현실 세계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위협받는 이들은 어쩌면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과 공감과 연대를 꾀하기 위해 누구보다 절실히 ‘예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고립된 처지를 남의 일로 전락시키지 않고 동등한 인간의 입장에서 우리의 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은 사실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정택용은 그러한 ‘예술’에 대한 요구에 소명의식을 느끼고 카메라를 들게 된 것일 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택용은 자신의 ‘예술’ 행위를 예술이라 명명하기를 꺼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예술’의 영역으로 호출해 내었던 그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요구마저 부정하고 있다. 그러한 태도 속에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예술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있고 자신이 행하고 있는 ‘예술’, 즉 인간답게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예술’ 혹은 인간답게 먹고 살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예술’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자, 오히려 그러한 ‘예술’을 배격하는 예술이라는 서늘한 자각이 잠재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그러한 자각은 이 사회에 당연한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다. 분명 사간동이나 청담동, 혹은 한남동에서 향유되는 예술은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된 이후의 예술이지,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예술’은 아니다. 그 곳에서 향유되는 예술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의 품격을 일일이 따지듯, 도도하고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곳을 찾은 사람들은 작품을 감상하기에 앞서서, 구질구질한 일상의 때를 말끔하게 제거하는 전시 공간의 검역을 거쳐야 한다. 마치 자신의 가난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 백화점 명품관을 앞에 두고 ‘이 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지’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발길을 돌리듯이, 먹고 사는 데에 찌들어 미적인 취향을 가질 여유가 없는 사람들 또한 무균질의 화이트 큐브 앞에 금세 주눅이 들어 걸음을 망설이게 된다. 아마 정택용의 사진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러한 검역을 통과하지 못해 작품 한번 제대로 접해 보지 못하고 전시장을 떠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발길을 돌리게 된다 해서 크게 실망할 일은 없다. 그들은 애초에 그 곳에서 자신들의 고립된 처지를 반영할 수 있는 무엇을 찾으리라는 일말의 기대조차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균질의 화이트 큐브는 먹고 살 걱정 없이 배부른 사람들이나 드나들 수 있는 별세계일 따름이다.
‘아트 월드’라는 별세계, 이 사회의 ‘을’과는 무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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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아트 월드’라는 말로서 통용되는 이 별세계는 멸균된 공간을 필요로 하는 신생아처럼 화이트 큐브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별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 작가 예술이론 기획자 평론가, 예술 전문지 등은 아직 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해서 인위적인 보호가 있어야만 연명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별세계가 갑을 관계의 ‘갑’이 되어, 먹고 사는 문제와 부대끼며 고통스레 이 사회를 떠받히고 있는 사람들을 ‘을’ 취급하며 외면할 수 있는 까닭은 별세계를 뒷받침하는 진짜 ‘갑’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사간동과 청담동, 그리고 한남동에 있는 고급스러운 화이트 큐브들을 막대한 자금을 들여 건립하고, 유지해 주는 후견인이 바로 그러한 ‘갑’이다. 그런 까닭에 별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이 그러한 ‘갑’을 위한 예술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정택용과 같이 이 사회의 ‘을’을 위하여 ‘예술’을 하는 사람이 예술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레 회피하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정택용과 인터뷰를 하면서 줄곧 내 마음이 쓰라렸던 까닭은 그러한 별세계의 내부, 즉 ‘아트 월드’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이 사회의 ‘을’을 위한 공감과 연대의 ‘예술’이 가능하다고 막연하게 믿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쓸쓸히 되돌아보았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지만, 오늘날 한국의 ‘아트 월드’에는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다름없이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스스로 ‘아트 월드’의 일원으로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아마 이 글의 필자도 그 축에 속하는 인물일 테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회의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 자각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는 대도시의 무산자들로서, 대개는 아등바등 알바하며 대학 다니고 인턴 생활을 거쳐 취업하여도 비정규직 임금 노동자의 불안정한 처지를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눈앞에 빤히 예정되어 있는 사회적 차등과 소외를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아트 월드’라는 별세계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들은 개별 존재의 미적인 자기실현과 소외된 자아의 회복을 본질로 삼는 ‘예술’ 속에서 자신들을 끈질기게 옥죄는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획득된 미적인 결과물을 타인과 공유하여 해방의 경험을 확대고자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일들이 ‘아트 월드’속에서 가능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별다른 실효성을 갖지 못한 채 좌절되기 십상이다. 그들이 몸을 의탁한 ‘아트 월드’엔 개별 존재의 미적인 자기실현과 소외된 자아의 회복이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 확대되는 그런 ‘예술’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차등과 독점의 세계가 더욱 선명하게 구현되는 곳이 한국의 ‘아트 월드’ 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얼마 동안의 혼란스러운 적응 기간을 거친 후, 한국의 ‘아트 월드’를 구성하고 있는 인적 물적 인프라가 대부분 재벌기업 정부기관 보수언론과 같은 거대한 ‘갑’에 의해 관리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갑’이 ‘아트 월드’를 운영하는 방식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예컨대 뉴욕 런던 베를린 파리와 같이 자본 축적이 최고도로 이루어지는 세계 체제의 중심 도시에 자리 잡은 예술을 전범으로 삼는 선진화 전략, 베니스비엔날레나 카셀도쿠멘타 같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예술 행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거기에서 성적을 내고자 하는 욕구, 경쟁력 있는 소수의 엘리트를 육성하여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자 하는 대외 지향적인 발전 모델 등, 한국의 ‘아트 월드’를 추동하는 주요한 가치는 신자유주의 이념에 기반을 둔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과도한 신뢰, 세계화에 대한 강박,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일상화 등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가위 누르는 병증 또한 다를 바 없이 한국의 ‘아트 월드’를 가로지른다. 이와 같은 여건 속에서 사간동이나 청담동, 혹은 한남동에 자리 잡은 정갈한 화이트 큐브에서 ‘갑’에 해당하는 귀빈들을 맞이할 수 있는 예술가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고민하며 자기 해방을 꾀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에 적합한 예술가는 뉴욕 런던 베를린 파리와 같은 도시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세계 예술의 트렌드 변화를 숙지하고 있으며, 세계 예술시장의 유통망에 접속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경로를 확보하고 있는 유능한 사업가일 것이다. 그러한 예술은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된 이후에 추구되는 ‘갑’을 위한 예술이지, 먹고 사는 것의 최소 조건부터 문제 삼는 ‘을’을 위한 ‘예술’이 아니다.
결국 ‘예술’을 도피처로 삼아 자기해방을 시도했던 무산자들은 ‘아트 월드’ 속에서도 소외된 들러리로서 남는다. 하지만 그들은 한사코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을 치장하여 사간동이나 청담동 혹은 한남동의 전시 공간에 부지런히 발을 딛는다. 그들은 여전히 ‘아트 월드’의 예술 속에 자신을 해방시켜 줄 ‘예술’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묵묵히 작품 수를 늘린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난해한 어휘를 즐기는 ‘아트 월드’의 노련한 시장주의자들 가운데 그러한 ‘예술’을 들추어 볼 사람은 거의 없다. 타인의 곤궁과 관계하는 일만큼 비효율적이고 몰취미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어떠한 후원자나 기획자도 그들을 찾지 않으며, 어떠한 화이트 큐브도 그들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립된 그들을 방문하는 사람은 단지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비슷한 ‘예술’을 행하는 동료들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도시의 무산자들이 항시 그러하듯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 쪽수만 많을 뿐 그저 무력할 따름이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극도의 소외와 가난을 견디며 ‘아트 월드’의 언저리에 누추하게 머물거나, ‘예술’을 포기하고 ‘아트 월드’를 떠나는 길 밖에 없다.
예술이 성립하는 요소, ‘해방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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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용 <우리는 일하고 싶다>전(부산 민주공원) 전경 2009
물론 이와 같은 바깥의 ‘예술’을 정식화시켜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정택용의 블로그에 수록된 사진첩에는 이러한 ‘예술’이 소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간간히 포착되어 있다. 그러한 사진 속에는 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자들이 자연스런 노동자의 모습 그대로 그림을 감상하고 조각과 함께 있으며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있는 광경이 담겨 있다. 랑시에르가 언급한 ‘해방된 관객’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은 이러한 광경에서 신자유주의의 조종(弔鐘)이 울린 2010년대의 새로운 ‘예술 세계’가 조용히 빗장을 열기를 기대한다.
몸의 사건
권오상 최수앙 김혜진을 통해 본 젊은 작가의 ‘몸 담론’
글 | 김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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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밴드 킨(Keane)의 앨범자켓을 위한 권오상의 <데오드란트 타입>(2008) 제작 과정
몸을 정신의 하위라 여겼던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적 사고는 의식의 관여 없이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신체의 감각적 소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몸이 없어져도 정신은 남는다는 극단의 결론으로 미끄러지면서, 사유의 기초가 되는 감각 자료를 소거한다. 그 결과로 인식 주체는 객체들에 관한 정보가 갱신되지 않는 자기소급의 무한 굴레에 빠지게 된다. 플라톤 또한 ‘죽음만이 영혼이 몸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이라며, 정신의 인식 작용이 시작되는 단초이자 세계와 가장 긴밀하게 맞닿아 조응하고 있는 감각의 최전선인 몸을 폄하하고 소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추락시킨다. 신체보다 우위에 군림하고 있는 정신의 영역은 불안정한 직관적 감성에 의존하기보다는 객관적 판단이 개입하는 이성의 지각에 얽매이고자 한다.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전시대의 인문적 관심이 정신사적인 범주 안에 갇혀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철학적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가 전복되고, 해체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이성주의는 정신과 몸의 경계를 와해시키면서 관심의 패러다임을 ‘몸’에 관한 것으로 돌려놓는다.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왼손을 만지는 오른손의 예를 들면서 지각의 대상과 지각의 주체가 둘 다 몸인 까닭에 객체와 주체의 구분이 명확히 일어나지 않는 ‘몸의 사건’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더불어 퐁티는 ‘행동은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며, 사유 역시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다. 인식의 궁극적인 완성은 몸의 지각을 통해 이뤄진다’며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이것은 곧 몸이 획득한 감각의 내용이 지각의 단계를 거처 판단과 재규정의 정신적 활동에 관여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내용이 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아직 심신이원론의 인식론적 현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퐁티의 지각(Perception)개념을 비판하며 몸이 직접적으로 기록하는 감각(Sensation)이야 말로 진정으로 ‘순수한’ 존재론적 사건이라 말한다. 드디어 몸은 생활세계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기반이자 존재의 근거로서 그 지위가 격상된다.
정신이 지배했던 모더니즘의 시대에서 몸이 다시 관심을 받게 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 과정을 다시 살핀 이유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언술하고 있는 주된 작업의 내용이 공교롭게도 몸에 관한 것으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몸에 관한 이들의 태도는 단순히 화제로 간주되는 오브제 그 이상의 갈망을 은닉하고 있는 까닭이다.
일상의 증거를 담은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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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상 <데오드란트 타입>(부분) 2008
조각가 권오상의 작업 재료는 일상적이고 사변(Speculation)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는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마리아와 예수라는 신성성의 절정을 집약시킨 것이었지만, 권오상의 〈피에타〉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을 불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몸의 구석구석을 카메라 렌즈로 훑어 낸 사진 이미지들은 조각의 물성을 가볍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피사체가 되었던 몸의 외피를 살피는 뷰파인더의 관음을 상기하게 한다. 조각의 외피를 덮고 있는 조금씩 상이한 이미지들의 분절은 오히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간 관람자의 시선을 교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신체의 부분에 이끌리게 한다. 미켈란젤로가 그의 피에타에서 고통 가운데 주검이 된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어머니의 비극을 아가페의 상태로 만들고자 했다면, 젊은 한 여인이 힘없이 늘어진 또 따른 젊은 여인을 부축하는 권오상의 피에타에서는 신성성과는 상반되는 동성애적 코드를 감춘 세속의 에로스가 호출된다.
하지만 어차피 권오상의 관심은 에로스가 깃든 세속이며 세속은 곧 일상이기 때문에, 일상을 채운 몸이 욕망하는 내용들이야 말로 인위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순전한 존재의 증상이자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권오상의 조각난 이미지들은 감각에 의해 체득된 몸의 정황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기록지다. 권오상이 자신의 작업을 좀 더 정치한 이미지들로 완성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남자가 샴쌍둥이처럼 얽혀 바닥에 뒹굴며 한바탕 힘겨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권오상의 또 다른 작품 〈뒤엉킨 480장의 진술서〉는 부여된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 파편화된 이미지의 이어붙이기가 몸의 정황을 설명하는 행위임을 작가 스스로가 의식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물증이 된다. 권오상에게 있어 몸이 기술하려 하는 것은 실체가 불분명한 마음의 아우라가 아니라 존재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일상’이다.
몸은 ‘심리적’ 사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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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앙 <The Heroine> 레진, 유채 60×52×95cm 2009
작업의 스펙트럼 자체가 몸에 관한 병리학적 기록인 조각가 최수앙은 몸이 유추하고자 하는 권력 관계를 다양한 신체적 변이를 통해 제시한다. 〈과대망상증(Megalomania)〉 연작에선 다분히 정신의 사건들인 소통 절망 소외 등을 몸에 일어난 물리적 사건으로 치환해 등장시킨다. 뚜껑이 열린 듯 선혈이 붉은 뇌를 고스란히 외부로 드러낸 두상, 갈라진 배 위로 내부 장기가 솟아오른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각각 〈Open Mind〉와 〈Open Heart〉라는 긍정의 심리 상태를 제목으로 갖는다. 사실에 가깝게 표현된 신체의 끔찍한 도발은 뜻밖에도 심리의 상태를 명확하게 짚어 내고 상징한다.
사람들은 감정의 흐름이 몸의 미묘한 변화에 의해 가시화된 상태로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내용을 불가시한 마음에서 찾는다. 최수앙의 작업은 이제 더 이상 감정을 찾기 위해 마음이라고 하는 환영에서 헤매지 말고 사건의 구체적 장소인 몸에서 살피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수앙은 〈식물인간상태(Vegetative State)〉라는 주제와 이름을 같이 하는 작품에선 무기력한 상태로 속절없이 바닥에 드러누운 남자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를 자라게 하고, 〈가려움증(Pruritus)〉 연작에선 사실에 가깝게 묘사된 나신의 여주인공 등에 가죽구두의 줄을 깁듯 감아 올려 신체의 변용을 통해 인간의 신체들에 부여 되어 있었던 의미들이 어떻게 사회적인 담론으로 수용되는가를 탐색한다. 최수앙은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 몸의 물리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신체의 변용에 심리적 언어를 담지하게 해 신체를 시공간의 속박으로부터 탈출 시키고자한다.
최수앙의 〈아스퍼거의 섬(Islets of Aspergers)〉 연작에 이르면 정신의 사건들이 육체에 고스란히 드러난 정황을 한꺼번에 만나게 된다. 고립이 독특한 진화를 가능하게 한 갈라파고스 군도의 동물들처럼 괴물과도 같이 기이한 신체를 지닌 채 유폐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일군의 부족이 사는 아스퍼거의 섬. 이들은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입이 뭉개진 상태로 서식한다. 필연적으로 소통불가를 잉태하는 몸의 풍경들은 이성적 사고를 결박당한 채 울부짖는 원시의 상태를 노정하게 되는데, 동물적인 본성만 남아 있는 몸에서 인간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다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신체의 기관이나 흔적을 통해 한때 인간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유추만 가능할 뿐이다. 아스퍼거라고 하는 자폐 상태의 증후군 역시 다분히 정신적인 장애다. 특이하게도 자폐의 증상은 정신과 길항상태에 있는 몸의 곳곳에 두드러기처럼 발진에 있다. 최수앙의 작업이 몸을 다루는 무수한 조각가들 중에서도 유별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병리학이라는 정신의 사건을 몸이라는 유기체의 사건으로 돌려놓는 독특한 기술 방법 때문이다.
몸을 둘러싼 윤리적 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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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Moment-자기만의방> 캔버스에 유채 259×194cm 2009
복사꽃이 곱게 핀 공간 속 자신의 방으로 보이는 흐트러진 침대 위에 속옷을 걸친 채 나른하게 누워 있는 한 여성의 몸이 보인다. 얼굴의 윤곽은 중첩된 공간 이미지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눈을 돌리는 반대편에는 숲 속에서 자신의 상의를 머리끝까지 벗어 올려 가슴을 드러낸 여성의 몸이 보인다. 얼굴은 벗어 올린 옷 속에 가려져 있다.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려진 얼굴로 인해 캔버스에 드러난 여성의 몸은 관람자에게 더 주목을 받는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몸의 중요한 부위를 드러내는 방식은 몸의 노출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으려는 성도착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는 예사롭게 전개되지 않는다.
김혜진은 자신의 작업노트에서 “우리는 가리는 하나의 습관적인 착용이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노출함으로써 드러나는 수치심을 가려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박, 훈련된 무의식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래지어는 혼자 있을 때도 입고 있음으로서 정신적인, 사실은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는 편안함을 준다. 그렇지만 몸은 브래지어를 벗음으로써 진정한 편안함을 느낀다”라고 말하면서 캔버스를 통해 작가 자신의 벗은 몸을 드러내는 논리를 합리화하고자 한다.
여성의 나신을 회화를 통해 보게 되는 시각적 경험이 별반 새로울 것이 없는 상황에서 김혜진의 작업이 특별했던 것은 자신의 몸을 화제로 삼아 여성의 벌거벗은 몸이 타자의 시선에 의해 ‘드러냄’의 해방을 어떻게 훼방 받게 되는지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김혜진은 정물이 되어버린 ‘누드’로서의 몸이 아니라 우리가 여태껏 믿고 따라왔었던 모더니즘 시대의 몸에 관한 윤리적 규범을 재규정하게 하는 ‘나체’로서의 몸을 의도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로 관심의 중요도가 비등하고 있는 개인의 신체적 검열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 받게 한다. 캔버스의 이미지로 등장한 김혜진의 노출된 몸은 몸의 상황이 처한 사적 사건들을 유추하게 하는 시간의 편린들을 끌어 모은다. 모여진 시간들은 김혜진에 관한 존재를 입증하는 기술 그 자체가 된다.
다시 ‘몸 담론’, 인간의 존엄성 회복하기
생명의 물리적인 영위를 가능케 하는 몸을 배제하고서 생활세계 속 인간을 구체적으로 설명 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로 인식되고 있다. 현대미술에 있어 치열한 화두라 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의 성 즉, 젠더(Gender)의 문제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이른바 ‘권력 관계’의 경우 모두 몸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몸에 관한 담론의 수위는 수그러들지 않고 민감하게 증폭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 안에서 소비되고 있는 이미지의 주된 출처가 인간의 몸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볼 때, 적어도 우리의 몸이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의미 지워지고 작동되고 있는지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확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삶의 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갈등 상황을 천착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시각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미술 작업의 특성이기 때문에 미술 작품을 매개로 ‘몸’에 관한 예술가들의 접근 방식을 공유하는 것은 몸이 처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권오상과 최수앙 그리고 김혜진이라는 3명의 작가를 통해 발견하려고 했던 세 가지. 즉, 몸은 일상의 내용을 표징 하는 증거이며, 심리적 사건이 드러나는 사건 현장이며, 공적인 규범과 사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이라는 것은 객체화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몸이 주체적인 지위로 다시 복권되는 계기를 제기하고자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모두는 전 시대에선 간과 당하거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욕구와 욕망이 충돌하는 가치 혼돈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선 그 해결의 구체적인 대상과 방안으로 몸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몸을 주목하고 기술한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상정하고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양상을 추적하는 것이라기보다 몸의 위기를 통해 위협 받는 인간의 존엄을 복원하려는 지극히 실존적인 궁리라 할 수 있다.
미술가, 이 ‘도시’를 걷다
이불 김수자 안규철 작품과 미술의 장소적 관심
글 | 안소연
미술가들에게 있어서 ‘도시’는 상당히 매력적인 공간임에 틀림없다.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적인 ‘신화’로 작용할 수도 있고, 정치(都)와 경제(市) 메커니즘에 의해 구조화된 ‘체계’로써 기능하기도 한다. 게다가 도시는 익명의 다수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긴밀한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를 기준으로, 수많은 미술가들이 ‘장소’ 혹은 ‘공간’에 대하여 물리적 접근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으며, 이 때 도시 공간은 매우 실험적인 무대로 제시되곤 했다. 그러한 주제는 현대미술의 굵직한 담론과 맞물려 중요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해왔다. 결과적으로 개념 과정 신체 등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기여했던 다양한 화두가 미술가를 일상의 도시로 유인해 냈다. 이젠 더 이상 신선한 매력을 어필하기엔 진부한 감도 없지 않지만, 도시를 순회하는 미술가들의 행렬은 여전히 도전적이다. 그들은 왜 이토록 도시를 열망하는가?
도시-‘전복’을 향한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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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욕망> 야외 퍼포먼스 1989 PKM갤러리, BB&M 제공
1990년 당시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젊은 조각가 이불이 도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줄 아냐?〉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퍼포먼스를 수행하기 위해 무려 12일 간 도시를 활보했다. 이불은 김포공항을 출발지로, 일본 나리타공항을 도착지로 입력하고 예측불가능한 시공간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그는 장식적이지만 기괴하고, 부드럽지만 만지기엔 혐오스러우며,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듯하지만 과도한 공격성으로 이내 터져버릴 것 같은 봉제 옷을 직접 지어 입고, 수일 간 도쿄 시내를 걸었다. 1960년대 후반, 서구에서 포스트미니멀리즘 경향으로 범주화됐던 에바 헤세, 야요이 쿠사마, 루이스 부르주아 등 대표적인 여성작가들이 신체적인 재료로 부각시켰던 부드럽고 가변적인 재료는 전통적인 매체를 전복시킬만한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그들의 유산은 이불에게도 상속되었는데, 그는 그 유산을 도시가 갖고 있는 상징적인 신화에 대한 전복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실제로 괴물과 같은 복장을 한 여성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질서정연하고 안정적인 도시의 모습을 순간 낯설게 뒤흔든다.
이 퍼포먼스가 수행되었던 1990년은 국내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이듬해다. 그것은 사회가 통제했던 경계의 와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자크 엘룰(Jacques Ellul)은 그의 저서 《도시의 의미(The Meaning of the City)》(1970)에서 ‘도시는 광야와 유목생활에 대한 배반’이라는 극단적인 시각을 서술했다. 그의 표현대로 ‘도시 문명의 적은 유목’이다. 자크 엘룰의 시각을 그대로 빌려보자면, 이불의 행위는 도시가 이룩한 거대한 신화에 대한 모종의 배반이자 전복인 셈이다. 국가와 국가, 도시와 도시의 경계를 유랑하는 작가의 행보는 도시의 이상화된 유토피아 환상을 위협한다. 그는 철저히 도시에 대항하는 적군의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질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epetition)》(1968)에서 언급한 ‘노마드’의 모습과도 닮았다. 도시를 이루며 사는 정주민들의 체계와 질서를 위협하는 유목민의 삶은 보편성과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요컨대 1990년 김포공항을 출발한 이불은 지극히 유목민적 사유에 충실했다. 그는 도시 혹은 국가를 구분하는 울타리 안에 정박하지 않고 울타리 바깥, 도시의 바깥, 역사의 바깥에서 자신을 질서와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유목민의 모습으로 풀어 놓았다.
도시-‘소통’의 철학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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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뭄바이: 빨래터> 4채널 비디오, 사운드 10분 25초 2008 국제갤러리, 김수자스튜디오 제공
1997년 김수자는 트럭을 타고 도시를 떠도는 퍼포먼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개의 보따리를 트럭에 싣고 11일 동안 전국을 달리는 퍼포먼스다. 그 기록을 담은 결과물이 〈떠도는 도시들-2727km 보따리 트럭〉이라는 영상이다. 그녀는 도시를 떠도는 트럭 짐칸에 마치 보따리처럼 올라탔다. 초기에 오브제로써의 천(이불보)과 바느질에 열중했던 김수자는 이 무렵부터 천과 바늘이 함축하고 있는 ‘치유’와 ‘연결’이라는 철학적 사유에 주목했다. 그래서 이 천 보따리를 트럭에 지고, 공동의 기억을 내포하고 있는 도시들을 떠돌면서 ‘화해’의 의식을 치루는 듯하다. 김수자는 이러한 생각을 가시적으로 확장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1999년에 시작한 〈바늘 여인〉 연작이다. 그녀는 인파로 북적이는 세계의 도시 각처를 순례했다. 도쿄 카이로 델리 라고스 런던 멕시코시티 뉴욕 상하이의 도시 한복판에서 침묵하고 홀로 서있는 작가의 뒷모습은 실존적인 소통의 방법을 암시한다. 도시인들의 반응은 저마다 다르고, ‘작가의 현존’은 현장에서의 경험을 차별화시킨다.
장소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 예사롭지 않던 1990년대 후반에 미술사학자 권미원은 장소특정적 미술의 ‘계보’를 작성했다. 1997년 《옥토버(October)》에 실렸던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One Place after Another)〉가 바로 그것이다. 그 논의 중에서 ‘순회하는 작가들’이라는 소제목은 김수자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해 준다. 그 논의에 따르면, ‘담론적 설명으로서 장소를 이동하면서 담론적 서사를 만드는 장소 지향적 실천들에 대한 미술 기관들의 관심이 증대하면서 작가들에게는 전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신체를 이동시키는 집약적인 신체적 움직임이 요구되고 있다.’ 이때 미술가는 ‘미술 작품을 생산해 내는 신체가 아니라, 미적인 용역을 제공하는 신체로 변신’을 꾀해야 한다. 다소 회의적인 이 논의는 김수자가 세계의 도시를 순회하는데 있어서 그 정당성을 지지해줄 수도 있고, 아니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도 있다.
무려 8개의 세계적인 도시를 거닐면서 제작한 〈바늘 여인〉 연작에서는 한결같이 침묵하고 서 있는 김수자의 뒷모습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저 도시가 작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 관람자인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정작 저 도시와 이 도시의 중개자로 서 있는 작가는 아무런 말이 없다. 작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뗐을 때, 그 신체를 가로질러 익명의 사람들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 영상은 자신의 신체를 매개로 하여 보편화된 인간으로서 나와 타인, 나와 세계의 관계를 엮고자 하는 김수자의 철학적 사유가 가장 극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신체가 ‘고통’과 ‘연합’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바늘’이 된다는 명제를 붙들고, 일련의 작품들을 통하여 도시의 역사와 문화와 삶의 차이를 봉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차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장소 고유의 특수성에 주목함으로써 그 역동적인 차이를 모두 유지한 채 보따리에 싸는 행위라는 데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 긴장과 차이를 모두 포섭했기에 치유로 결론지을 수 있겠지만, 그 차이가 드러내는 긴장은 바늘의 끝처럼 고통스럽기도 한 것이다.
도시-‘관계’를 조직하는 오늘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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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그들이 떠난 곳에서>(부분) 2012 제9회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된 안규철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도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떠난 곳에서〉는 1990년대 이후 미술계에 일어난 ‘체험’과 ‘관계’ 위주의 프로젝트성 미술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전시공간에 놓여진 여러 가지 미술적인 형태들을 집요하게 쫓던 관람자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작가의 모습이 담긴 영상에 머물렀을 때, 뜻밖의 ‘레시피’를 얻게 된다. 작가가 나지막이 설명하는 작품의 제작과정을 다 듣고 나면, 더 이상 미완의 캔버스와 흉물스러운 조각덩어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가가 제공한 레시피가 그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안규철이 제시한 이 작품에 대한 레시피는 오늘날의 미술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던져주는데, 특히 그가 광주라는 도시를 거닐면서 고민하고 문제제기 했던 그 화두는(가) 니콜라 부리오 식의 ‘관계미학’을 둘러싼 동시대미술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1997년 부리오가 쓴 《관계의 미학(Esthétique Rélationnel)》은 프로젝트에 기반을 두고 관람자의 체험에 의해 진행형으로 제시되는 1990년대 미술의 특징을 서술한 책이다. 이러한 관계 미술은 오직 작품이 처한 상황과 관람자들이 일시적으로 형성해 내는 공동체의 민주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때문에 이 때 제시되는 그 어떤 미술의 형태도 사회적 ‘관계’를 위해 시중드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작업의 표면적인 형태, 즉 외양에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단지 그것을 이웃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주된 관심으로 작동된다.
다시 안규철의 레시피로 돌아가 본다. 그는 이 전시를 위해 먼저 광주라는 도시를 찾았다. 그 도시가 지닌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장소성’을 탐색한 작가는 먼저 매체에 충실한 회화와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여러 개의 조각으로 파괴한 후, 다시 도시로 나왔다. 그는 작품의 파편들에 일련번호를 기입하고 그것을 간단한 메시지와 함께 도시 곳곳에 흩어 놓았다. 수일동안 그는 작품 파편들을 들고 도시를 걸었고, 도시인들에게 메시지를 송출했다. 그것은 이 작품의 파편들을 습득하게 될 익명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작가의 레시피에 따라 다시 그 조각난 작품들을 반송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전시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도시로 흩어졌던 작품의 파편들은 하나 둘 반송되어 돌아왔고, 그 결과가 진행형의 모습으로 전시장에 진열됐다. 이 프로젝트에 대하여 부리오의 시각을 빌리자면, 작품의 조각들을 우연히 습득해서 작가의 의뢰대로 자신의 흔적들을 남긴 익명의 도시인들은 이 전시를 통해 일시적인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관계’를 생산해 내는 작품의 치명적인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종류의 예술 작품이 구조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생산해 낸다(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친절한 레시피가 담긴 안규철의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작가의 목소리가 독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디에서도 공동체의 모습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답답한 독백을 쏟아 내며 도시를 걷고 있는 작가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이것이 부리오가 말한 민주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공동체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일까? 적어도 안규철의 이 전시는 그것을 살짝 비껴가 있다. 언뜻 이상적이고 안일하게 상호 연결된 이 익명의 공동체가 소통을 체험하기 위해서 이 미학적인 관계에 우연히 들어온 것 같지만, 이 관계는 마치 조각난 작품의 파편들처럼 ‘충돌’과 ‘붕괴’로 인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클레어 비숍이 부리오의 관계미학에 맞서 제시했던 ‘적대(antagonism)’라는 개념이 일견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숍의 주장 근저에는 민주적인 사회, 그것이 양산해 내고 있는 관계가 끊임없이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지속된다는 발상이 자리 잡고 있다. 안규철의 작품은 관람자 혹은 공동체의 역할에만 주목한 여타의 관계미학의 낭만에 빠져들지 않고, 그 관계에서 형성되는 사회의 숨은 이데올로기, 미술작품의 가치 생성 과정, 그리고 미술작품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 그 갈등과 적대의 현장이 바로 그가 선택한 도시였으며, 그는 그 도시를 하염없이 걸으면서 불안정한 갈등과의 관계를 지속시켜 나갔다.
이렇듯 도시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개방되어 있고, 복잡한 관계망을 조직한다. 이 살아 있는 공간은 그래서 갈등과 반목을 태생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그 도시를 강박적으로 기억해 낸다. 이불은 이방인 혹은 유목민의 신분으로 도시의 경계를 탐색했으며, 김수자는 문화와 관습에 의해 함구된 도시의 이면을 들춰 보고자 했다. 그리고 안규철은 절제된 걸음으로 도시를 걸으며 그 속에 은폐된 논쟁과 갈등의 주제를 환기시켰다. 이들의 실천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관계-지향적인 미술의 홍수 속에서 그것이 구축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질문한다. 적대의 땅, 이 도시를 걸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