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뉴비전] 파이널리스트 미션 ① 전시 리뷰
2012 / 10 / 23
올해로 6회를 맞은 art in culture 주최 신진평론가 발굴 육성 프로젝트 New Vision. 지난 8월 예심 심사를 거처 탄생한 3인의 파이널리스트 강정호, 김용진, 안소연은 오는 11월 어느덧 마지막 미션을 앞두고 있다. 최종 1인의 당선자 선정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들이 지난 2달간 아트인컬처를 통해 발표한 글을 ①전시리뷰 ②작가 인터뷰 편으로 나누어 차례로 소개한다. 이들은 첫번째 미션 전시리뷰에서 각자 근래 화제를 모았던 전시 하나를 선정했다. 강정호는 젊은 작가 윤향로의 개인전을 택했다. 전시 연출의 분열적 공간 개념을 경제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2010년대 삶을 지배하는 불안한 정서와 연관시켜 해석했다. 김용진은 한국미술의 중진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기획전 <히든 트랙>을 개별 작품의 분석을 넘어 '전시 기획 방법론'의 이슈로 확장시켰다. 안소연은 <플레이그라운드>전을 통해 보편적인 삶의 이면에 자리한 심리적 공포에 접근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평론을 향한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세 편의 원고를 통해 곧 탄생할 최종 1인의 당선자를 함께 점쳐보자.
두 가지 현실 사이
윤향로展 7. 25~ 8. 13 갤러리175(http://gallery175.egloos.com/)
글│강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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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향로 <intermission> 네온, 실크 커텐 270x4332cm(curtain), 100x30cm(neon) 2012
윤향로의 <숏 컷>은 세계 공황에 대한 우려가 초조하게 번지는 2010년대의 삶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전시이다. 지금까지 몇 번의 고비를 넘겼지만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거대한 기계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는 삶의 이면에 파국이 잠재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들의 삶은 겉으로 보았을 땐 기업 홍보 광고의 이미지처럼 조화롭지만, 그들의 내면은 내리막의 경제 체제가 일상에 풀어놓는 갖가지 쇼크에 실험실의 동물처럼 조건 반사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처럼 시시각각 찾아오는 충격과 그에 따른 내면의 분열을 다스리기 위해 사람들은 여가가 날 때마다 강박적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운동을 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느낌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생활감정은 아직까지 마음의 외곽을 스쳐지나가는 어렴풋한 분위기나 까닭모를 불안감으로 느껴질 따름이지, 아직 눈앞에서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교묘히 작용하는 터부가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하지만, 이 세계가 여전히 잘 기능하고 있다는 믿음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좀 더 앞선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러한 믿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이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준비할 때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유지할 수 없다'는 대답이 현실화 된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마 먹고살기와 관련된 일들이 정신없이 요동을 칠 것이고, 그러는 틈새에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적인 태도도 바뀔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 어떨지 예견해 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1) 눈앞에 전개되고 있던 조화롭고 완결된 세계의 이미지가 갑자기 정지할 것이다. (2) 시선의 가장자리에서 넘실거렸던 불길한 흐름들이 일시에 범람하며 시선의 중심을 접수할 것이다. (3) 시선을 장악한 불길한 흐름이 그동안 은폐되었던 낯선 생활의 질서를 사람들의 ‘먹고살기’에 강요할 것이다. (4) 이미 해체된 기존의 세계의 조각들이 낯설고 기괴한 형태로 회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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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향로 <untitled(do not)> 합판에 아클릴릭 120x160cm 2012
뜬금없이 일련번호를 붙여가며 질문에 대답한 까닭은 이것이 필자가 <숏 컷>에 나타난 윤향로의 개별 작품들을 연상하면서 내린 답이기 때문이다. <숏 컷>은 2010년대 사람들의 일상의 이면을 휩쓸고 있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열된 삶의 광기를 드러낸다. 언제나 의식의 사각지대로 도망치는 광기어린 생활 감정을 붙잡기 위해, 작가는 정신병원에 감금된 분열증 환자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고 있는 일상인을 찾는다. 그리하여 <숏 컷>에서 여가 생활은 2010년대의 광기가 서식하는 사각지대로 지목되는 동시에 관객을 유도하는 시점이 된다. 작가는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에게 (1)영화관을 찾은 사람, (2)만화방을 찾은 사람, (3)연극을 관람하는 사람, (4)자신의 방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의 시점에 설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별다른 장치가 심어져 있지 않았지만 무난히 받아들여진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만큼 여가를 채우는 대중문화의 형식에 익숙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윤향로는 여가 생활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점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광기의 발단을 찾는다. (1) 영화관을 찾았던 사람은 한창 재미있게 진행되던 영화가 아무런 맥락 없이 끊기고, INTERMISSION(막간) 이라는 단어가 시선 한 가운데에 불현듯 나타나는 상황을 맞이한다. (2) 만화방에 있었던 사람은 만화책에서 인물과 풍경과 대사와 말풍선까지 사라지고, 몸짓이나 동작을 나타내는 실선만이 남는 광경을 경험한다. (3) 연극을 보러 갔던 사람은 극본에만 기입되어 있는 배우들의 연기 지시문이 무대 배경 위에 투명하게 배어 나와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상황을 목격한다. (4) 자기 방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은 일관된 흘러가던 영화의 장면들이 갑자기 잘려나가 서로 뒤섞여, 전혀 연관성 없는 장면들이 2~3초 간격으로 연속되는 기괴한 느낌의 영상으로 재편집되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열거된 광경은 고딕 호러처럼 낯설고 공포스럽다. 윤향로는 이 광경을 전시장의 네 벽면에 구현시킨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벽면’이라는 소재가 지니고 있는 시각적, 심리적 요인을 비범한 기량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 벽면이 서로 맞물리면서 형성하는 공간감 속에 그동안 ‘어렴풋한 분위기’나 ‘까닭모를 불안감’으로 관객의 일상을 맴돌았던 불길한 생활감정을 들추어 증폭시킨다. 특히, 벽면에서 배어나오는 만화책의 실선이 외상적( traumatic)으로 와 닿는 (2)의 광경과, 벽면으로 스며들어가는 투명한 연극의 지시문이 무의식의 잠재된 층위를 환기시키는 (3)의 광경은 이번 전시의 인상 깊은 두 축을 이루며, 관객이 품고 있는 광기의 사각지대에 쉽게 피할 수 없는 그물코를 건다.
윤향로가 <숏 컷>에 배치해 두었던 이 그물코는 관객의 내면에 작동할 수도 있고,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작동한다면, 관객은 앞서 언급하였던 ‘이 세계가 계속 지금처럼 유지 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부정적인 대답이 현실화되는 세계상을 체험하게 된다. 그 광경 속에 주체를 가진 이는 자발성을 잃고 외부의 광폭한 힘에 발작하듯 반응하는 자동인형과 같은 모습이 된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해체시키고 종속시키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공포를 일상화시킨다. 아마 지금이 1990년대나 2000년대였다면, 이런 체험을 ‘가상현실’ 쯤으로 여기고 즐길 수 있었겠지만, 2008년의 경제위기를 겪고 난 이후인 2010년대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것은 실제로 작동하는 ‘객관현실’일 수 있다. 윤향로의 <숏 컷>은 백지 한 장 차이 일 수 있는 ‘이 차이’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그의 전시에서 표현된 광기를 ‘가상’이라 하기엔 너무 쓰라리긴 하지만 말이다.
'의외의 순간'에서 발견한 한국미술의 두 가지 모멘트
SeMA 중간허리 2012 : 히든 트랙展 6. 19~8. 26 서울시립미술관(http://www.seoulmoa.org/)
글│김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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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불완전한 비행> 스트로폼에 아크릴릭 150x50x220cm(부분) 2012
어떤 한 주제에 입각해 다수의 작가가 참여함으로써 진행되는 전시의 미덕은 특정한 주제에 반응하는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한 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초빙 큐레이터로 국립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인 김성원을 선임해 기획한<SeMA 중간허리 2012 : 히든 트랙>전 또한 주제전이 갖는 미덕을 충실이 수행한다. 19명에 이르는 한국현대미술사의 중진들을 호출해 한국미술의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그들의 작업방식과 관점들을 펼쳐 놓게 한다. 자칫 의례적인 통사적 전시로 흐를 뻔한 <히든 트랙>전이 여타의 연대기적 흐름을 더듬는 전시들과 대별되는 분명한 차이점은 한국현대미술의 중간세대가 갖는 작업의 특질과 궤적을 관성화 된 기존의 입장에서 찾지 않고, 작가의 작업 레퍼토리 가운데 유폐되었던 작업을 새롭게 복원하면서 그 과정에서 도출되는 작가들의 새로운 긴장감을 특질과 궤적으로 기술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전시구성의 내용을 처음부터 기획자가 한정짓지 않고 기초적인 실마리만 던진 채 전시의 구성을 해당 작가에게 열어 두었다는 것이다.
특히, 기획자가 제시한 네 가지의 질문「한국 미술계에서 5-60대 세대 작가들과 그 작업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90년대 이후 한국미술계 현장의 변화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이신지, 또 어떻게 반응해 오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일반적으로 작가에게 ‘히든 트랙’은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번 전시에 제안한 각자의 ‘히든 트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는 참여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 속에 끌어 들여왔던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context)을 복기 하면서, 기존 작업의 매너리즘을 스스로 검열하게 한다. 작가들의 ‘히든 트랙’이 불완전한 완성 혹은 욕망의 결과물이라 해도 작업의 자기 소급-정형화 되어 버린 작업 패턴-과 자기 복제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반성적 사유를 가능케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히든 트랙>전을 구성한 두 사람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바로 초빙 큐레이터 김성원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신임 관장 김홍희다. 김성원이 기획한 <히든 트랙>전은 전시를 풀어내는 방식이 그가 2010년 국제갤러리에서 선보여 화제가 되었던 <우회전략(Oblique Strategies)>전과 상당히 닮아있다. ‘우회전략’이라는 용어는 1975년 음악가 이자 시각예술가인 브라이언 이노와 피터 슈미트가 생각이 막힌 절박한 순간에 돌파구를 찾기 위한 시도로 고안된 방법을 일컫는다. 내용인즉 여러 장의 카드에서 임의의 카드를 뽑아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들어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뜻밖의 우연에 기댄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당시 ‘우회전략’展에 참여한 작가들은 3, 40대의 주목 받는 젊은 작가들이었지만 이들 또한 자기 세계관이 굳어 가면서 겪게 되는 작업의 매너리즘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임의의 카드 같은 일상 현실에서 수용 된 재료들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 스펙트럼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회전략’展은 평단과 관람객 모두로부터 호평을 이끌어 냈었다. ‘히든 트랙’이 작가의 작업 영역을 확장시키거나 미완의 작업이 새로운 작업으로의 갈망을 유발한다는 기대 역시 또 다른 이름의 ‘우회전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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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균 <스타 클럽> 설치 740x1060x430cm 2012 <히든트랙>전 전경
이러한 김성원의 전시기획 이력은 큐레이터의 역량을 높여 전시의 질을 담보하려는 김홍희 관장의 서울시립미술관 운영 방침에도 크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김홍희 관장이 경기도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선보였던 <창작해부학>전(2008)과 <언니가 돌아왔다>전(2008)은 각각 예술이 어떻게 구체화 되어 삶에 관여하는 작품으로 이행되는지를 전시 현장 안에서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전시가 되기를 희망하고, 한국사회 속에서 직조되고 있는 여성주의의 상황을 미술이 어떻게 품고 있는가를 여러 실험적인 방식으로 확인 하고자 한 전시였다. 두 전시 역시 큐레이터의 기획 역량과 깊은 관련을 맺는 시도였다. 앞서의 전시와 <히든 트랙>전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김홍희 관장이 전시가 포용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를 실험하는 일관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테이트모던의 관장 니콜라스 세로타(Nicolas Serota)는 전시를 풀어내는 방식을 관람객들에게 전시를 해석해 줄 것인가와 전시를 경험하게 할 것인가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런 구분의 방식에서 본다면 김성원 큐레이터와 김홍희 관장의 의도는 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관람객이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놓이게 될 전시 공간과 작품, 관람객 간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관계를 미리부터 재단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기획자의 친절한 ‘해석’이 관람객의 ‘경험’이 가져 올 다층적 의미를 축소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 초입을 장식한 ‘끝 THE END'이라는 타이포 작품과 사람 형상을 풍선에 매단 ‘불완전한 비행’ 작품은 오디오가이드의 설명을 받지 못했더라면 언어에 관한 개념적인 작업을 퍼포먼스와 설치 등으로 수행 해온 안규철의 작업이라 인식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른 두번의 이사에 관한 생의 기억을 박스에 드로잉과 글쓰기로 기록 해 천정 높이로 쌓은 강홍구의 설치작품 ‘이사’ 역시 사진작업을 주로 해온 작가의 이력을 놓고 볼 때 네임택의 캡션으로 새겨진 작가이름을 확인하기 전까진 눈치 챌 수 없었다. 물론, 고낙범의 경우처럼 그의 컬러 컴포지션이 무채색으로 바뀌었다 할지라도 작가가 견지하는 독특한 작업방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어떻게 해도 고낙범의 작업임을 의심할 수 없는 작업도 있었다.
무질서한 듯 보이는 전시장의 작품 배치는 오히려 일관된 작업방식에서 벗어나 있는 ‘히 든 트랙’의 향연처럼 보였다. 기획자의 의도였는지 아님 미술관 전시 운영팀의 배려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히든 트랙>전의 이해를 돕는 도록을 펼쳤을 때 그 치밀함에 무릎을 쳤었다. 도록은 겹으로 붙어 있던 페이지를 떼어내면 참여 작가들의 기존 작업들이 나타나게 해 <히든 트랙>전에 출품 된 작업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고안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기존의 작업들을 오히려 ‘히든 트랙’처럼 만들어 기존의 작업이 언제든지 ‘히든 트랙’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묘하게 은유하는 듯 했다.
<히든 트랙>전은 한국 현대미술의 치열한 내적 진동을 충실히 조망해 볼 수 있는 기획자의 저력을 보여준 보기 드믄 전시이자 동시에 치밀한 기획 속에서 한국 미술사의 중간세대가 갖는 깊은 내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흔치않은 기획이라 할 수 있다.
놀이터 혹은 현대인의 불안한 은신처
플레이그라운드展 8. 17~9. 28 아르코미술관(http://arkoartcenter.or.kr/)
글│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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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앙 <The Speaker 와 The Listener> 설치 2012
최근 린 램지(Lynne Ramsay) 감독의 영화 <We need to talk about Kevin>(2011)이 국내에 소개된 후, 조용한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여러 가지 감각적인 영화 장치들과 섬세한 시나리오를 걷어내고 나면, 영화는 대중의 심리 근저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일깨운다. 무심한 일상 속에 내재해있는 낯설고 불편한 두려움, 실체 없는 대상에 대한 무의미한 분노, 죽음에까지 몰고 간 상실감과 극복할 수 없는 멜랑콜리... 영화는 그렇듯 인간에 내재한 병리학적 심리를 허구(fiction)의 언어로 묘사했다.
그리고 여기, 이 수수께끼 같은 ‘불안’의 개념을 ‘동시대 미술의 주제’로 끌어낸 전시가 있다. <2012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 플레이그라운드>는 “잠재되어 있던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한국사회의 불안”에 주목했다. 9명의 작가들은 ‘놀이터(playground)’로 정의된 공간에서 불안의 징후들을 탐구한다. 놀이터는 공공의 놀이 공간이다. 그렇다보니 공공의 규칙과 질서가 수반지만, 그 이면에서는 위계, 차별, 소외, 폭력 등의 갈등이 조장되기도 한다. <플레이그라운드>는 이렇듯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공간의 특성을 ‘불안’이라는 심리적 상태와 연결시켜 기획된 전시다.
전시장 입구의 긴 복도 끝에는 최수앙의 <화자 The Speaker>와 <청자 The Listener>가 거리를 두고 마주하고 있다. 언뜻 극사실적 조각에 가까운 그의 인체는 과장과 강조로 인해 사실상 해부학적 실재와는 차이가 있다. 낮은 채도 탓인지 전체적으로 초점이 빗나간 듯한 인물들은 극도의 불안과 무력함을 지닌 병리적 상태로 묘사됐다. 사실적 재현에 가까운 인체를 통하여 봉인된 심리적 기재를 표상하는 것은 현대 극사실조각의 매력적인 수법이기도 하다. 최수앙은 두 인물 간의 어긋난 시선과 부유하는 표정에서 소통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타자와의 ‘소통의 부재’, 현대인의 ‘내적 소외’는 임선이의 작업을 특징짓는 화두이기도 하다. <도시의 은신처>는 당시 서울의 반지하방에 거주하던 작가 자신의 외로움과 단절감을 투영한 작품이다. 자신이 키우던 실제 선인장 화분을 실리콘으로 떠내 시멘트로 반복하여 캐스팅함으로써 기계적 반복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멘트가 뜯겨져 나간 흔적, 쓰러져 파손된 화분, 매끈하지 못한 표면처리 등은 관람자에게 충동적인 불안을 떠넘긴다. 게다가 무채색 시멘트 덩어리에 스스로를 은폐시킨 선인장은 가시도, 색도, 생명력도 모두 제거된 채 불안한 은신처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만의 세상을 기념하며>에서 작가는, 위치가 역전된 듯 녹슨 좌대 위에 브론즈로 캐스팅한 두 마리의 도둑고양이를 올려놓음으로써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지 못한 채 이 도시 어딘가에 스스로를 숨긴 채 살아가는 소수자의 모습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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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 <태극기 그리고 나> 멀티채널 비디오 9분 37초 2009
사물을 바라보는 강박적 시선은 정주하의 사진이나, 공성훈의 회화에서도 쉽게 파악된다. 정주하의 사진 연작 <불안, 불-안>은 관습화된 시선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사회 도처에서 증식하고 있는 공포와 위협도 때론 관습적 묵인으로 인해 더 이상 지각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사진이란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한 대로 ‘한 때 거기 있었음’을 지각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증명이자 알리바이다. 때문에 영광원자력발전소 일대의 풍경을 담은 그의 사진은 불안과 평화가 뒤섞여 있는 모호한 공간에 대한 확실한 증거물이 된다. 해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을 에워싼 송전탑과 육중한 원자력발전소 앞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 정주하의 사진은 이러한 이중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은 공성훈의 풍경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과도하게 번들거리는 캔버스 표면 위로 불편한 여가를 즐기는 도시의 풍경이 재현된다. 조악한 인공폭포와 한적한 교외의 야경을 수놓은 모텔의 네온사인은 현실에선 매우 익숙하고도 상투적인 풍경이지만, 사진 찍듯 담아낸 그의 풍경화에서는 다소 기괴하고 이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김상돈의 영상과 노충현의 회화 역시 이중적인 양가감정(ambivalence)이 혼재한 작업이다. <4분간 숨을 참아라 2008>(2008)은 김상돈이 동두천이라는 지역공동체에 기반해서 제작한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수성과 미국 군사 주둔지라는 사회․문화적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는 동두천은 오랜 기간 동안 정치, 권력, 사회, 문화의 간섭에 의해 왜곡되고 소외되어 왔던 지역이다. 4분의 영상에 작가가 채집해 넣은 동두천의 풍경은 평화롭다 못해 적막하지만, 수백 구에 해당하는 무연고자의 무덤, 미군기지의 흔적 등과 오버랩 되면서 복잡한 한국현대사의 고통과 불안이 폭로된다. 반면 노충현의 회화에서 목격된 공간은 텅 빈 곳으로, 모든 내용이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게 닫힌 문에 둘러싸인 텅 빈 복도, 과거 기무사 지하의 고급 장교 숙소,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등 폐쇄된 밀실들은 범죄 장소에 대한 거대한 공포를 환기시키기에 여전히 유효하다. 요컨대 김상돈과 노충현은 ‘지역’과 ‘공간’이 지닌 불안정한 징후들을 그 속에 내재한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진단하고 있다.
다시 전시장 입구로 돌아간다. 왜 ‘플레이그라운드’인가? 공공의 일상적 유희와 보이지 않는 공포의 권력이 혼재한 이중적 공간으로 기획자는 놀이터를 설정했다. 그리고 9명의 작가들은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에 공생하는 근원적인 공포에 대한 목격자가 됐다. 동시대 한국사회에 대한 이들 작가의 사유는 공통적으로 갈등과 모순에서 오는 ‘불안’으로 귀결됐다. 일찍이 프로이트가 “특정 대상이나 상황과 연결되어 다양하고 특이한 형태로 나타나는 병적인 공포증”과 연결시켜 설명한 이 ‘불안’의 개념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출몰한다. 그것은 현대인의 내적소외와 소통의 부재에서, 혹은 현대사회의 모순에 대한 암묵적 용인에서, 그리고 역사와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왜곡된 현실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또한 현실이라고 하는 얇은 스크린에 봉인된 채 끊임없이 뚫고 나오려는 그 ‘어떤 것’으로서, 앞서 언급한 영화 제목의 역설적인 의미처럼 ‘말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9명의 작가들은 정의할 수 없는 모순적인 공간 ‘플레이그라운드’에, 애초에 상징화 할 수 없었던 현실사회의 불안에 대한 표상들을 늘어놓음으로써, 실제 현실과 어긋난 ‘분열적 리얼리티(schizoid reality)’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