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모스크바비엔날레
More Light
2013. 9. 19~10. 20 모스크바 마네지중앙전시장(Manege Central Exhibition Hall)(http://5th.moscowbiennale.ru/en/)
파나마렌코(Panamarenko) <The Aeromodeller> 혼합재료 풍선2700×600cm/곤돌라200×600×300cm 1969
지난 10월 20일 제5회 모스크바비엔날레가 한 달 간의 장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올해 행사의 메인 전시는 <더 많은 빛(More light/ Больше света)>이라는 제목으로 모스크바 중심가에 있는 9,000평방미터 크기의 마네지(Manege) 중앙전시장에서 열렸다. 이 외에도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와 케이트 파울(Kate Fowle)이 공동 기획한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전을 포함한 6개의 특별 초대전과 모스크바 전역의 미술관 및 갤러리가 참여하는 46개의 특별전으로 구성된 초대형 미술행사였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인 <더 많은 빛>은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본전시 큐레이터인 캐서린 데 제거(Catherine de Zegher)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번 비엔날레는 현대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비활성(We have ‘no time’, ‘non-places’)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빛’은 시각 정보를 전달하는 물리적 파장으로서의 빛인 동시에,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비활성을 ‘활성’으로 바꾸는 창조적 에너지로서의 빛을 말한다. 우리가 지각(知覺)하고 사고(思考)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빛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지각하며 궁극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깨우칠 수 있다. 빛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근원적인 에너지임은 물론이고, 우리가 무언가에 몰두할 때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지적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에너지는 공유 가능하며, 그 에너지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매체로서의 미술이 이번 전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러한 미술은 관념과 상상에만 머물러 정체돼 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일부 컬렉터의 이윤 창출을 위한 현대미술과도 구분된다.
하르샤(N. S. Harsha) <Punarapi Jananam, Punarapi Maranam(Again Birth, Again Death)> 캔버스에 아크릴릭, 대나무 381×2423cm 2013
비엔날레 본전시에는 40개국에서 온 72인(팀)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출품작 중 30여 점이 이번 비엔날레를 위해 특별히 새로 제작됐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현대미술행사지만 러시아 작가의 작품은 전체의 15%를 넘지 않는다. 참여 작가의 작품 대다수는 관습적인 공간인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며 시간의 다양한 상대적 흐름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로, 요나 프리드만(Yona Friedman)의 비정형 건축모델 작품인 <Moebian Structures>, 지하철에서는 시간개념이 공간적 개념으로 치환된다는 주제를 다룬 드미트리 벤코프(Dmitri Venkov)의 비디오 작품 <In a Different Time>, 100여 년 전에 제작되어 지금은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썰매와 러시아인이 기부한 썰매/스키를 사용해 ‘여행, 이민, 주거’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역동적으로 형상화한 필리핀계 호주 작가 알프레도&이자벨 아킬리잔(Alfredo and Isabel Aquilizan)의 <In habit: Project Another Country> 등이 있다.
알프레도&이자벨 아킬리잔(Alfredo and Isabel Aquilizan) <In habit: Project Another Country> 썰매, 스키, 화물운반대, 끈, 널빤지 2013
전시 공간은 지상층과 지하층으로 나뉘었다. 지하층에는 비디오 작품과 조명효과를 강하게 필요로 하는 설치작품을 주로 전시했으며 지상층에는 대형 설치, 회화, 조각 작품 등이 주를 이뤘다. 복잡한 구조의 설치작품이 전체 전시 공간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지만, 전시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구성됐다는 인상을 줬다. 지난 제4회 비엔날레 때 아트플레이(Artplay) 디자인센터와 중앙백화점(ЦУМ)의 다층건물을 전시공간으로 택해 계단을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했던 경우와 비교하면 진일보한 모습이다. 특히 지하층 전시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마네지 중앙전시장은 자연조명이 강한 지상층과 채광이 안 되는 지하층으로 이뤄져 있어 거의 모든 비디오 작품을 지하층에 배치했지만, 헤드폰과 칸막이를 활용해 작품간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효율적이고 직관적인 동선 배치를 통해 대작뿐만 아니라 소품들도 같은 수준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큐레이터가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또한 모든 비디오 작품에 영어/러시아어 자막을 함께 제공해 관객의 편의를 도왔다.
영국에 거주 중인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 모나 하툼(Mona Hatoum)은 지하 전시장에 거대한 금속 그물을 설치했다. 그물에는 직접 제작한 크리스털 공들을 매달아 놓았는데, 이는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방울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작품은 이슬방울이 맺혀 있는 거미줄을 확대하여 제작한 것이다. 이는 언뜻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공공미술작품들과 같은 맥락으로 보이지만 훨씬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모든 사람이 월드와이드웹이라는 거미줄로 연결되어 있고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세계화라는 명목 하에 하나로 묶여 획일화 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간 거대한 거미가 점심식사를 위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모나 하툼(Mona Hatoum) <Web> 크리스털 공, 와이어 400×500cm 2006
일본 작가 마야 오노다(Maya Onoda)의 작품 <만화경(Kaleidoscope)>은 관객이 작품 주변을 거닐면서 발견할 수 있는 형태와 색채의 우연한 조합을 통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가는 최근 커피를 직접 내리는 일에 푹 빠져있는데, 작품에 사용된 종이는 작가가 실제 사용하고 난 여과지이다. 작가는 여과지에 남은 얼룩에 채색을 하거나 형태를 덧그리고 구멍을 뚫는 등 예술을 위한 소재로 자신의 일상을 사용한다.
마야 오노다(Maya Onoda) <Kaleidoscope> 종이, 커피 얼룩, 수채화, 잉크, 끈 가변크기 2012
마크 리카리(Mark Licari), 리카르도 란자리니(Ricardo Lanzarini), 안드레아 비안코니(Andrea Bianconi)는 지하 전시장 벽면에 150미터가 넘는 길이의 대형 작품 <빛나는 대화(Dialogo Illuminato)>를 제작했다. 세 작가는 실험적인 공동 작업을 거쳐 환경과 에너지, 엔트로피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란자리니에 따르면, 그들의 협업은 잭 케루악(Jack Kerouac)의 소설 《길 위에서(On the Road)》를 연상시킨다. 비안코니는 이 작업을 “창조와 붕괴, 조합과 해체가 공존하는 연극”이라고 표현했다. 세 작가가 한 공간에 만들어내는 선과 형태, 단어들은 긴밀한 관계 속에 서로 뒤엉키며 시작도 끝도 없이 혼돈스러우면서도 완전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마크 리카리(Mark Licari), 리카르도 란자리니(Ricardo Lanzarini), 안드레아 비안코니(Andrea Bianconi) <빛나는 대화(Dialogo Illuminato)> 혼합재료 가변크기(부분) 2013
마크 리카리(Mark Licari), 리카르도 란자리니(Ricardo Lanzarini), 안드레아 비안코니(Andrea Bianconi) <빛나는 대화(Dialogo Illuminato)> 혼합재료 가변크기(부분) 2013
1층 전시장으로 올라가면 폴란드 출신 미국 작가 아담 츠비야노비치(Adam Cvijanovic)의 대형 회화 작품들이 관객을 반긴다. 창밖으로 히말라야가 보이는 황폐한 콘크리트 건물 내부에 놓인 왕좌, 하늘을 부유하는 18세기 로코코풍의 가건물, 불타고 있는 빙산 등. 그의 회화는 먼저 그 크기로 관객을 압도하며 초현실적 공간감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깊은 관조에 빠져들게 한다.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정치권력의 무상함, 화려한 껍데기뿐인 유토피아적 이상향, 석유기반 산업구조 속 유명무실한 온난화 대비책 등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선이 읽힌다.
아담 츠비야노비치(Adam Cvijanovic) <Interrogation of the Sublime: Safe House> 타이벡에 아크릴릭 (부분) 2013
아담 츠비야노비치(Adam Cvijanovic) <Interrogation of the Sublime: Safe House> 타이벡에 아크릴릭 (부분) 2013
건축가인 요나 프리드만은 1층 전시장에 금속망과 골판지로 이루어진 가로 세로 높이 각 15m의 거대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이 작품은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의 작가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연구하고 있는 ‘환영적(幻影的) 건축’ 또는 ‘비정형(非定型) 건축’에 대한 이론적, 실제적 작업의 결과물이다. 관객은 구름 같은, 그러나 실제로는 엄청난 무게를 지닌 거대한 철망과 그것을 위태롭게 떠받치고 있는, 그러나 실제로는 견고한 건축역학적 설계로 배치된 골판지 기둥 사이를 직접 거닐면서 공간에 대한 모순된 경험을 할 수 있다.
요나 프리드만(Yona Friedman) <Moebian Structures>(시리즈) 판지, 금속 가변크기 1990~2013
이란 출신의 독일 작가 파라스투 포루하르(Parastou Forouhar)는 1층 전시장 한 쪽 칸막이를 형형색색의 나비로 장식해 놓았다. 그러나 나비의 날개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사람이 아닌 감금, 고문 등으로 고통 받고 있거나 목숨을 잃고 무참하게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는 사람이다. 작가는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무해한 것 같은 아름다운 형태 속에 폭력의 속성을 심어 놓았다. 이를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인습적 시각과 고정관념을 재고할 것을 요청한다.
파라스투 포루하르(Parastou Forouhar) <Time of the Butterfly> 디지털 페인팅, 프린트, 벽지 가변크기 2011
파라스투 포루하르(Parastou Forouhar) <Time of the Butterfly> 디지털 페인팅, 프린트, 벽지 가변크기(부분) 2011
포루하르의 나비 앞에는 중국 작가 인시우첸(Yin Xiuzhen)이 쓰촨 성 지진으로 인해 붕괴된 건물 벽돌을 실어와 뿌려놓았다. 벽돌 곳곳에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색색의 천 조각이 박혀있다.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리바(Rebar)> 시리즈와 비슷한 주제다. 인시우첸은 벽돌 외에도 자신의 여행가방 시리즈를 전시했다. 펼쳐진 여행가방 위로 천으로 만든 여러 도시의 전경이 펼쳐진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각 여행가방은 세계화 된 세상의 상징적 아이콘이다. 발달된 교통과 통신 덕분에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늘어 도시의 외양은 점점 서로 닮아가고 있다. 작품은 특정 도시를 미니어처로 재현했다기보다 작가가 일정 시간동안 자신의 삶을 보낸 도시에 대한 종합적 인상을 보여준다.
인시우첸(Yin Xiuzhen) <Temperature> 천 조각, 무너진 건물 잔해 가변크기 2013
인시우첸(Yin Xiuzhen) <Portable Cities> 여행가방 6개, 옷, 사운드 각각148×88×30cm 2008
또 다른 중국 작가인 송동(Song Dong)의 설치작품은 벨기에 작가 파나마렌코의 작품 <The Aeromodeller>와 함께 이번 전시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벼룩시장을 방불케 하는 이 거대한 작품의 주인은 사실 작가가 아닌 그의 어머니다. 유난히 절약정신이 강한 작가의 어머니는 물건을 절대 버리지 않고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며 모아두는 습관이 있었다. 이러한 습관은 작가의 아버지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후 거의 편집증적 강박의 수준으로 발전하여 물건을 버리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장은 필요 없는, 그러나 언젠가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물건을 수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남편을 잃은 심리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10년간 모아온 수집품이 집안을 가득 채웠을 때,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이러한 정신병적 상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이 물건으로 설치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가 늘 하던 말대로 그 물건들은 쓸모를 얻었고 그녀는 행복을 얻었다.
송동(Song Dong) <Waste Not> 혼합재료 가변크기 2005
아일랜드 작가 톰 몰로이(Tom Molloy) 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브로드스키(Alexander Brodsky)의 작품은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모두 매우 “노동집약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톰 몰로이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1,000여 장의 전 세계 시위현장 사진을 모두 일일이 가위로 오리고 세워서 80m 크기의 기다란 시위현장 입체콜라주를 만들었다. 작품은 비교적 최근의 시위뿐만이 아니라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 여성 평등을 위한 시위현장 사진도 포함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브로드스키는 전시장 바로 옆에 있는 러시아 권력의 상징인 크레믈린 궁으로 통하는 지하보도 입구를 제작했다. 별도의 제목을 붙이지 않은 작품 속 지하도 입구는 크레믈린이 지니는 상징성이 무색하게 쓰러지기 직전의 허름한 판자로 지어져 있다. 지하도 입구 주위 바닥은 자원봉사자와 전시 스태프가 3일 동안 구긴 은박지로 가득하다. 원래 은박지 대신 정치 기사가 실린 오래된 신문지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먼지가 많이 발생하는 등 위생상의 문제 때문에 은박지로 대체했다.
톰 몰로이(Tom Molloy) <Protest> 손으로 자른 사진 800×30cm 2012
이번 비엔날레는 관객에게 큰 주목을 받은 위 작품들 외에도 70여 점의 흥미로운 작품을 선보였지만, 아쉽게도 본전시뿐만 아니라 특별전에서도 한국 작가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 작가는 모스크바비엔날레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2009년 제3회 행사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김수자 작가가 비디오 설치 작업 <보따리 트럭-이민자들>을 본전시에 출품했고, 문경원, 전준호, 이용백 작가가 한국 미디어 아트를 주제로 한 특별전에 초청받았다. 제4회 행사의 경우, 오용석 작가의 <샴 몽타주 No.1, No.2>, 이기봉 작가의 <독신자-이중신체>, 진기종 작가의 <걸프만의 노예>, <걸프만의 낭만>을 본전시에서 선보였다. 또한 특별전 중 하나로 모스크바 한국문화원에서 <Love>전이 열렸다. 2010년 한·러 수교 20주년의 일환으로 한국 국제교류재단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 작가들이 모스크바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나, 올해는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가지 못해 큰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행사의 공식 기술지원 파트너 삼성전자가 전시장 입구 한편에 마련한 신형 스마트 TV 대기화면에 이이남 작가의 디지털 산수화를 띄워 놓는 정도가 이번 행사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한국 미술의 흔적이었다. 앞으로 러시아 컨템포러리 아트씬에서도 한국 작가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알렉산드르 브로드스키(Alexander Brodsky) <Untitled> 2013
캐서린 데 제거(Catherine de Zegher) 제5회 모스크바비엔날레 큐레이터. <America: Bride of the Sun. 500 Years of Latin America and the Low Countries>(앤트워프왕립미술관, 1992), <Inside the Visible. An Elliptical Traverse of Twentieth Century Art in, of, and from the Feminine>(보스턴 현대미술연구소, 화이트채플갤러리, 1994~1996), <On Line: Drawing Through the Twentieth Century>(뉴욕현대미술관, 2010) 등의 전시 기획. 1988년부터 1998년까지 벨기에 코트레이크의 카날미술재단(Kanaal Art Foundation) 공동설립자 겸 디렉터로 활동.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갤러리 디렉터 및 뉴욕 드로잉센터 큐레이터/디렉터 역임. 현재 벨기에 겐트미술관 디렉터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