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 해협을 넘어
오사카한국문화원(원장 김혜수)에서 한국 미술 특별전 <Timeless Heritage: 시간을 잇다>(4. 12~5. 31)가 열렸다. 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개막에 맞춰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예술경영지원센터가 후원하는 전시다. 전시 기획자는 김미라(아이안피앤케이 대표). 전시 취지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세대별, 장르별 대표 작가의 작품을 통해 한국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다. 초대 작가는 이우환, 박대성, 신미경, 박제성, 하준수 5인. 회화, 조각,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장르로 전시를 꾸몄다. 개막식에는 진창수 오사카 총영사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우환은 일본 모노하(物派) 운동의 이론적 리더였으며, 국제 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온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창작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이론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시에는 대표작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조응>을 선보였다. 그의 회화는 동양 필획 미학의 현대적 번안이라 해석할 수 있다. 박대성은 전통수묵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삼릉비경>을 출품했다. 대형 신작으로 소나무 숲에 거대한 보름달이 떠있는 휘황찬란한 밤 풍경이다. 또 자신의 창작 거처인 경주 풍경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 <청룡>, <화우>, <분황탑>도 선보였다.
신미경은 비누 조각을 통해 역사 유물의 예술적, 문화적 문맥을 ‘번역(translation)’하는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번 전시에는 <번역-백자>를 출품했다. 달항아리는 품위, 격조, 순수 등 조선의 이상과 가치를 품은 민족 유산으로 평가받지만, 작가는 역사와 예술의 절대적 권위에 질문을 던진다. 관람객은 예술적 번역의 즐거움을 누리며 비누 특유의 질감과 향기에 흠뻑 빠진다. 박제성은 인공 지능(AI)이 활용하는 데이터의 시간성에 주목해 공동체의 기억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AI를 협업자로 정의한다. 작가는 직관과 감정을 바탕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이를 언어화하여 시를 짓는다. 이후 추상화를 그리는 과정이 담긴 영상에서 AI 이미지 생성 모델이 시에 의미를 덧입힌다. 출품작 <기억색(30803202)>은 시와 드로잉, 기억과 경험의 예술적 해석을 AI와 나눈 과정을 영상화한 것이다. 포스트휴먼시대에 걸맞은 작품이다.
하준수는 영상과 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콘텐츠를 탐구한다. 미디어아트, 다큐멘터리, 몰입형 실감 콘텐츠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른다. 이번 전시에는 <이중섭, 그리움의 이름까지도>를 선보였다. ‘국민 화가’ 이중섭의 가족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와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이별의 아픔, 애틋한 그리움을 가족 그림과 편지를 활용해 미디어아트에 담아냈다.
4월 12일에는 학술 행사 <해협을 넘어: 한일 현대미술의 교차점>이 열렸다. 아티스트 토크에는 신미경과 박제성이 참여했다. 신미경은 ‘사라져가는 흔적은 예술에서 어떤 의미를 띠는가’, 박제성은 ‘기술이 예술을 기억하는 방법’을 주제로 작품 프레젠테이션을 곁들였다. 조각과 미디어라는 매체를 활용하고 있는 두 작가는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어떻게 뛰어넘는가. 물질성과 시간성이라는 테마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현지의 미술학도와 작가들의 질의가 이어져 열기를 더했다.
이어서 컨퍼런스가 열렸다. 양국 미술전문가 5인이 한일 현대미술 교류의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전망하는 자리다. 각 분야에서의 체험담을 토대로 21세기의 지속 가능성을 모색했다.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가 모더레이터를 맡고, 시마 아츠히코(島敦彦)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장, 우에다 유조(上田雄三) 갤러리Q 대표, 김선희 독립큐레이터, 조은정 고려대 초빙 교수가 발제자로 나섰다. 시마 관장은 ‘일본 미술관에서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수교 이후 일본에서 열린 한국의 현대미술 전시를 개괄했다. 우에다 대표는 ‘나의 한일 미술 교류 프로젝트 1973-2025’를 발표했다. 곽인식, 이우환과의 각별한 인연과 미술계 입문, 90여 회에 이르는 한국 미술가의 전시 기획 등 ‘한국통’으로서 체험을 소개했다. 두 사람의 발표에 덧붙여 김복기 대표는 일본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전 중에서 대표적인 전시의 관련 자료와 작품 경향을 소개했다. 또 일본 발제자에게 타자의 시선에서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묻는 논의를 이어갔다.
김선희 큐레이터의 발표 주제는 ‘나의 일본 미술 교류’. 모리미술관 큐레이터, 상하이 히말라야센터 예술감독, 대구미술관장, 부산미술관장을 역임하면서 기획한 일본 미술가들의 전시를 소개했다. 쿠사마 야요이, 시오타 치하루 등 대가들과의 인간적 교류와 전시 이면을 소개했다. 조은정 교수는 ‘아시아 미술, 한일 21세기 미술의 역학’을 주제로 내세웠다. 서구 열강의 시선에 의해 형성된 오리엔탈리즘은 아시아 미술을 해석하는 잘못된 잣대로 활용되고 있다. 21세기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아시아 미술에 대한 서구의 편견과 몰이해를 솔로몬구겐하임 소장품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서구라는 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아시아 미술의 진정한 세계화 노력을 제안했다. 김복기 대표는 아시아 내부의 아시아 미술 담론을 시대별로 조망했다. 1980년대-아시아 미술의 구심점, 1990년대-다문화주의 수용, 2000년대-수평적 커뮤니케이션. 또 김 대표는 “아시아 미술 담론에서 ‘아시아’는 하나의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 미술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가설’에 가깝다. 그럼에도 미술에서 아시아는 하나의 담론의 ‘통로(passage)’로 존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번 오사카한국문화원 행사는 한일 미술이 ‘해협(2007년 NHK의 3부작 드라마. 식민지 시절 한국에서 성장한 일본 여성과 한국 남성의 애절한 사랑을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다)’을 두고 펼쳤던 미술의 주고받기 역사를 조망하는 자리였다. 양국 국교 수교 60년의 시의에 적절한 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