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죽은 별’의 실험실

프랑스 작가 로르 프루보, 베를린 크라프트베르크 개인전
2025 / 05 / 01

로르 프루보(Laure Prouvost)는 사실과 허구, 현실과 가상을 뒤섞어 몰입형 공간 설치작업을 제작해 왔다. 그가 최근 ‘양자 역학’을 주제로 베를린 크라프트베르크에서 개인전 <우리는 별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2. 21~5. 4)를 열었다. 필자는 시각적 스펙터클과 과학적 개념의 괴리에서 예술과 기술의 관계를 묻는다. /

<The Beginning> 혼합재료 가변크기 2025_여섯 갈래의 천이 공간을 가르는 대형 키네틱 설치작품. 과거 공업 기계로 들어찼던 폐공장을 부드럽고 연약한 재료가 채웠다. 산업화 시대의 잔해를 초현실적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양자 역학을 좋아하세요?” 우연히 시청한 데이팅 프로그램에서 상대를 처음 마주한 한 참가자가 묻는다. 서로 양자 역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두 사람은 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어간다. 한때 물리학자의 전유물이었던 양자 역학은 이제 지적 대화의 소재로, 또는 서로의 취향을 가늠하는 척도로 등장할 만큼 현대 사회에서 친숙해졌다. 시각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올해로 정립 100주년을 맞은 양자 역학 이론의 핵심 개념들은 예술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한 개체가 동시에 두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양자 중첩의 개념이나,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떨어진 입자들이 즉각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양자 얽힘의 개념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현실의 경계를 재정의하려는 예술가의 실험적 사유를 자극해 왔다. 이러한 이론적 개념은 작품에서 단순한 은유적 차용을 넘어, 기술과 감각의 직접적인 결합으로 재해석된다. 현재 크라프트베르크에서 선보이고 있는 로르 프루보 개인전은 이러한 과학적 사고를 감각적으로 전환하는 데서 출발한다.

<We Felt a Star Dying> 싱글채널 비디오, 사운드 26분 2025 전경

<우리는 별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전은 양자 역학, 그중에서도 양자 얽힘의 개념을 현대미술의 언어로 탐구한다. 작가는 철학자 토비아스 리스와 과학자 하르트무트 네벤과 지난 2년간 공동 연구한 끝에, 일상에서 감지할 수 없는 이 개념을 가시적이고 체험 가능한 방식으로 변환하고자 했다. 전시 제목 역시 주변의 작은 변화에도 반응하는 양자 컴퓨터의 예민함을 “별이 죽어가는 것조차 감지할 수 있는” 감수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옛 발전소 건물로서, 에너지의 흐름과 변환이라는 역사적 내러티브를 간직한 크라프트베르크도 보이지 않는 세계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한다는 이번 전시의 주제 의식과 긴밀히 조응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광활한 공간을 감싸는 푸른 천이 시선을 사로잡으며 우주의 심연을 연상시킨다. 이 천은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유기적으로 반응하도록 설계됐다. 관객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양자 상태를 ‘붕괴’시키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끌어들인다. 간헐적으로 송출되는 사운드가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유성처럼 천장에 매달린 오브제들은 층고 높은 공간을 오르내린다. 헬멧 같은 독특한 조형물 <Cute Bit>는 양자 컴퓨터의 계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제 데이터를 사운드로 변환해 송출한다. 관객은 그 내부에 들어가 가청 범위를 넘나드는 주파수를 경험하게 된다. 이 소리는 양자 세계의 미세한 감각을 직접적인 물리적 진동으로 전달한다.

2013년 터너상을 수상한 프루보는 일관적으로 언어와 번역의 한계, 기억의 왜곡, 감각적 체험을 통한 현실 인식의 확장이라는 주제를 탐구해 왔다. 이번에도 프루보는 현실 인식의 경계를 허무는 몰입적 환경을 선보이며, 양자 물리학의 중첩, 얽힘, 비국소성 같은 난해한 원리를 감각적 체험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OGR토리노와 전시를 공동 기획한 LAS아트파운데이션 디렉터 베티나 카메스는 “이번 전시는 단순한 기술 실험을 넘어 관점의 전환을 꾀한다. 앞으로도 ‘센싱 콴툼(Sensing Quantum)’ 프로그램으로 과학과 예술의 접점을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야심 찬 포부와 달리, 이번 전시는 시각적 화려함과 개념적 전달력 사이의 불균형 속에서 오히려 과학과 예술의 간극을 부각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과학과 예술의 불협화음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텐트 구조물 <The Beginning>은 촉수처럼 뻗어나가는 푸른 천과 천장에 설치된 원형 스크린으로 전시 공간에서 압도적인 중심축을 이룬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은 양자 잡음을 AI 알고리즘으로 변환한 것으로, 새의 발톱, 안구 등 미시적 세계부터 콘크리트 입자 같은 물질의 표면까지 확대한 이미지들을 몽환적으로 중첩시킨다. 관객은 바닥에 누워 천장에 펼쳐지는 감각적인 파노라마 영상에 온전히 몰입한다. 그러나 시각과 청각, 촉각을 동시다발적으로 자극하는 연출임에도, 전시가 표방하는 양자적 특성이 작품에서 설득력 있게 구현되지 못했다.

<We Felt a Star Dying> 싱글채널 비디오, 사운드 26분 2025 스틸_프루보는 드론, 현미경, 열화상 카메라 다양한 촬영 장비로 실험적 영상설치를 시도한다. 시퀀스를 무작위로 배치해 예측 불가능한 양자의 세계를 시각화했다.
<We Felt a Star Dying> 싱글채널 비디오, 사운드 26분 2025 스틸

전시장을 감싸는 천의 움직임은 관객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단순한 인과 관계를 보여줄 뿐, 양자 역학의 비결정성이나 중첩 상태의 복잡성과는 거리가 있다. 천장에 매달린 오브제 역시 부연 설명 없이는 양자 컴퓨터의 환경적 민감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양자 데이터를 변환했다는 사운드작업 또한 실제로 양자적 특성을 청각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단지 데이터의 청각화에 그친 것인지 구분이 모호했다. 더욱이 영상작업 <The Beginning>은 ‘양자 컴퓨터 데이터’라는 설명 없이는 일반 생성형 AI 작품과 구별할 수 없었고, 작가가 강조한 ‘양자 잡음의 시각화’라는 기술적 특성이 시각적 독창성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양자’라는 용어가 작품의 개념적 깊이를 더하기보다는, 복잡한 개념을 단순화해 감각적 자극을 전달하는 데 머물렀다는 인상이다. 물론 과학적 개념을 예술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핵심이 희석되거나 단편화되는 현상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작품은 그 자체로 미학적 독창성과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양자 현상을 ‘직접 마주하도록’ 기획된 프루보의 작품들은 오히려 양자 시스템의 고유한 특성이 작품의 미학적 깊이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는지, 혹은 ‘양자’라는 접두어가 단지 기술적 새로움을 내세우는 데 그쳤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했다. 기술 가속화 시대에 예술은 과학의 언어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기술적 프로세스는 어떻게 예술적 표현으로 변환되는가? 프루보의 이번 전시는 스펙터클한 시청각적 경험 너머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과 대면하게 한다.

‘죽은 별’의 실험실 • ART IN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