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앨리슨놀즈의‘플럭서스이벤트’

2014/02/04

Alison Knowles(http://www.aknowles.com/)

2013. 11. 12 시카고아트클럽(The Arts Club of Chicago)(http://www.artsclubchicago.org/Home.aspx)

앨리슨 놀즈(왼쪽)가 퍼포머로 참여한 일리즈 아키아즈(오른쪽)에게 종이옷을 만들어 입히고 있다. Photo by Joey Carr 시카고아트클럽 2013. 11. 12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뉴욕을 중심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앨리슨 놀즈(Alison Knowles)가 시카고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놀즈는 현존하는 몇 안 되는 플럭서스(Fluxus) 그룹 창립 멤버이며, 반세기가 넘는 활동경력 중에서도 ‘플럭서스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다. 플럭서스 특유의 실험성과 유머, 소박함이 강조된 ‘플럭서스 이벤트’를 공연, 개발, 홍보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 왔다.

종이와 각종 콩으로 만든 ‘소리 나는 오브제’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Photo by Casey Puccini 시카고아트클럽 2013. 11. 12

초기 플럭서스 작가들은 자신들의 행위예술을 ‘퍼포먼스’라 부르지 않고 ‘이벤트’라 불렀다. ‘퍼포먼스’는 연극 등 기존 공연예술계에서 이미 익숙한 단어인 반면,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은 무대나 관객 없이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상상력이나 일상의 물건만을 이용해 행할 수 있는, 작지만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는 <플루트 솔로: 분해하기 조립하기>, <단어 이벤트: 나가시오> 같이 간단하거나 추상적인 ‘이벤트 스코어’(event scores)’를 엽서나 카드에 써서 친구들에게 우편으로 부치곤 했다. 받는 이가 그것을 실행에 옮기든 말든 그 여부와 관계없이 이 스코어를 쓰고 또 우편으로 보내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이벤트’로 간주되었다. 플럭서스 멤버였던 오노 요코가 남편 존 레논과 함께 1960년대 말 도시 내 빌보드판에 <평화를 상상하시오(Imagine Peace)>라고 커다랗게 써 붙인 경우는 플럭서스 이벤트 스코어의 대형화/대중화의 일례로 볼 수 있다.

앨리슨 놀즈(오른쪽에서 세 번째)의 대표작 <샐러드를 만드시오(Make a Salad)> 퍼포먼스의 한 장면. Photo by Liz Ligon 뉴욕 하이라인(The High Line) 2012. 4. 22 사진 출처: http://art.thehighline.org/project/alisonknowles

플럭서스 작가들은 이벤트 스코어 쓰는 일을 ‘작시’ 혹은 ‘작곡’(composition)이라고 칭했는데, 실제 주요 멤버의 상당수가 뮤지션이거나 글 쓰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백남준은 일본과 독일에서 작곡과 음악사를 공부했고, 조지 브레히트, 딕 히긴스, 라 몬테 영, 잭슨 맬로 등은 뉴욕에서 아방가르드 작곡가이자 이론가 존 케이지에게서 수학했다.) 플럭서스는 새로운 철학,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통해서 1960~1970년대 예술과 일상, 작가와 관객의 경계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시, 연극 등 예술 내 전통적 벽을 허무는데도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플럭서스 작품이 극히 ‘평범’하고 의도적으로 반(反)스펙터클적이다보니 많은 경우 관객의 이목을 빗겨가고 역사에도 묻히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샐러드를 만드시오> 퍼포먼스의 한 장면. Photo by Liz Ligon 뉴욕 하이라인 2012. 4. 22 사진 출처: http://art.thehighline.org/project/alisonknowles

최근 미술/공연계가 ‘푸드 아트(food art)’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놀즈의 작업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관계미학을 바탕으로 음식을 매개로 한 퍼포먼스가 각종 매체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데, 이 ‘푸드 아트’의 시작점에 놀즈가 있다. 1962년 런던에서 초연한 <샐러드를 만드시오(Make a Salad)>에서 그녀는 무대 위에 올라 100인분 샐러드를 만들고 관객에게 나누어주는, 요리 프로그램 같기도 하고 디너파티 같기도 한 이벤트를 벌였다. 또 다른 대표작 <똑같은 점심(The Identical Lunch)>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자신이 거의 매일 점심에 참치샌드위치를 먹는다는 것을 인식한 놀즈는 친구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점심을 먹고 그 경험에 대해 글을 써 보내주기를 권하였다. 이렇게 모인 글들은 1971년 <The Journal of the Identical Lunch>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놀즈는 이처럼 음식 관련 작업으로 잘 알려졌지만 이번 시카고아트클럽 공연에서는 ‘종이’를 주제로 혹은 주재료로 한 ‘플럭서스 이벤트’ 5편을 선보였다. 반(反)예술적 행위로 시작된 푸드 아트의 주류화/유행화, 그리고 ‘흐름’을 활동지침으로 삼았던 플럭서스의 이론화/역사화에 반항하듯(‘플럭서스’는 ‘flow’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차용), ‘종이’라는 가장 소소하고 평범한 물건을 이용해 가장 플럭서스다운 공연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퍼포먼스 <셔플(Shuffle)>이 시작되고 있다. Photo by Joey Carr 시카고아트클럽 2013. 11. 12

무대에는 종이 스크랩을 쌓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놀즈는 무대에 올라 종이더미 사이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훑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종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마이크의 힘을 받아 크게 울렸고, 이는 관객에게 시각, 청각뿐만 아니라 촉각의 감각까지 함께 활용하라는 신호 같았다. 작가는 종이더미 안에서 긴 리본을 한 줄 찾아 꺼내어 <2인치(Two Inches)>라는 이벤트를 선보였다. 동료 플럭서스 작가 밥 와츠(Bob Watts)가 쓴 이 ‘이벤트 스코어’는 2인치(약 5cm) 길이의 리본을 길거리에서 가로로 펼쳐 “교통을 막아라(Stop traffic)”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놀즈는 상황에 맞게 조금 변화를 주어, 2미터도 훨씬 넘어 보이는 긴 리본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인 후 그 중앙을 가위로 자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셔플> 진행 중. Photo by SooJin Lee 시카고아트클럽 2013. 11. 12

두 번째 이벤트는 일리노이주립대의 일리즈 아키아즈(Elise Archias) 미술사 교수와 협업했다. 아키아즈가 허수아비처럼 팔다리를 쭉 뻗고 무대 중앙에 서 있으면 놀즈가 큰 종이 조각을 둥그렇게 말아 소매, 조끼, 바지통 같이 만들어 그에게 입히는 내용이었다. 종이 움직임에 따른 다양한 소리와 더불어 무대 배경을 가득 메운 아키아즈의 실루엣 변화가 드라마틱한 광경을 연출했다. ‘옷’이 다 입혀진 아키아즈는 놀즈의 안내를 받아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을 돌아 뒷문으로 퇴장했다. 종이옷을 펄럭이며 여전히 팔다리는 편 채로 어정쩡하게 걷는 모습에 관객 여기저기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셔플> 진행 중 한 관객의 모습. Photo by SooJin Lee 시카고아트클럽 2013. 11. 12

다음으로 놀즈는 직접 만든 ‘소리 나는 오브제(sounding objects)’ 서너 개를 가지고 무대에 올라와 관객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작가는 2000년부터 구하기 쉬운 재료를 이용해 자신만의 ‘악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 선보인 <Bean Turners>라는 연작은 두꺼운 종이로 만든 딱딱한 주머니 안에 각종 콩이 들어있어 타악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장난감 같은 물건들을 작품으로 봐야하는 건 물론, 작가가 무대 위에서 이 물건들을 설명하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플럭서스 ‘이벤트’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놀즈는 이미 “자신이 지금 신고 있는 신발 혹은 다른 신발 한 켤레를 설명하시오.”라고 명하는 <당신이 선택한 신발(Shoes of Your Choice)>(1963)에서 ‘설명하기’를 창조적 제스처로 제안한 바 있다.

네 번째 무대는 일리노이주립대와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학생 5명과 협업한 <페이퍼 피스(Paper Piece)>라는 이벤트로 꾸며졌다. 1960년 벤 패터슨(Ben Patterson)이 초연한 이후 다른 작가에 의해 자주 공연되고 있는 플럭서스 스코어다. 학생들은 나란히 서서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각기 다른 언어의 신문을 동시에 읽어 내려갔다. 놀즈의 지휘에 따라 각자 목소리의 볼륨과 템포도 바꾸며 ‘합창’을 만들어나갔다. 관객은 퍼포머가 소리 내는 신문의 모든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글자가 소리가 되고, 뉴스가 노래가 되고, 다른 여러 언어의 소리가 모아져 하나의 작품(composition)이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앨리슨 놀즈 공연의 한 장면. Photo by SooJin Lee 시카고아트클럽 2013. 11. 12

피날레 이벤트 <셔플(Shuffle)>은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놀즈와 학생들은 종이를 구기고 뭉쳐 관객석으로 보내기 시작했고, 관객들도 곧 참여하면서 공연장은 순식간에 ‘놀이터’가 되었다. 모두 아이처럼 종이뭉치를 서로에게 토스하며 깔깔거렸고, 가만히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노는 장면을 구경만 하다가 종이뭉치 더미에 묻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종이는 흰색, 분홍색, 갈색 등 여러 색상이었고 질감도 다양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사람들은 길게 인간기차를 만들어 흥겹게 공연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것으로 공연은 끝이 났지만 모두 남아 종이뭉치 치우는 것을 도왔는데, 마치 포스트-공연 ‘이벤트’ 같았다.

이 공연이 열렸던 시카고아트클럽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클럽’으로, 주로 미스 반 데 로에, 피카소, 파울 클레, 헨리 무어 등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나 그 영향권 아래 있는 추상미술 작품을 수집/전시한다. 이런 중후한 곳에서 종이뭉치를 던지며 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퍼포머와 관객이 기차놀이를 하며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Photo by SooJin Lee 시카고아트클럽 2013. 11. 12

앨리슨 놀즈(Alison Knowles) 1933년 미국 뉴욕 출생. 1956년 프랫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졸업. 아돌프 고틀리브(Adolph Gottlieb)와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에게서 추상회화를 수학했으나, 실험예술에 눈을 돌리면서, 1959년 그림 그리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1962년 남편 딕 히긴스(Dick Higgins)와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 등과 함께 작업하면서 자연스레 플럭서스 그룹을 결성했다. 이후 꾸준히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수많은 공연, 전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여러 대안공간뿐만 아니라 뉴욕 휘트니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디아미술재단, 뉴욕현대미술관, LA현대미술관, 1983년 베니스비엔날레 등 영향력 있는 미술기관 및 행사에서 전시/공연했다.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2024.11.01~)
[만료]고흥군청(2024.11.01~2025.01.08)
[만료]한솔제지(2024.11.13~2025.01.08)
아트프라이스(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