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展
2014 / 10 / 14
2014. 10. 15~11. 9 학고재갤러리(http://hakgojae.com/2009/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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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현
한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정현이 드로잉 작품을 대거 선보인다. 이번 개인전에서 공개한 드로잉 70점에 사용된 재료는 ‘콜타르(coal tar)’. 콜타르는 석탄에서 가스, 코크스 등을 추출해 내고 남은 찌꺼기로 검은색 기름 형태의 물질이다. 그동안 그의 조각 작품에 주로 사용된 침목(枕木), 녹슨 철, 잡석 등처럼 콜타르라는 재료 역시 ‘시련의 집적’ 그 자체다. 작가는 반고체 반액체 상태의 콜타르를 시너 혹은 아세톤과 섞어 그리기 좋도록 묽게 만든다. 그러고 나서 이 희석된 콜타르를 나무껍질, 구긴 종이 뭉텅이, 비정상적으로 조작한 붓, 심지어 고래 아가미 등에 묻혀 종이 위로 가져가 찍어 내고, 뿌리고, 휘갈긴다. 콜타르의 농도에 따라 흑색 밤색 적색 녹색 등 다양한 빛깔이 나오고, 양감 역시 달라진다. 또 붓의 역할을 대신하는 갖가지 사물이 작품에 더욱 다양한 표현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의 드로잉을 유심히 살펴보면 기름 성분인 콜타르가 가진 윤기, 콜타르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덩어리들, 자연스럽게 생긴 그라데이션 등이 어우러져 마치 또 다른 조형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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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Untitled〉 종이에 콜타르 78.5×109.5cm 2014 / 〈Untitled〉 종이에 콜타르와 오일바 50×79cm 2014
정현은 자신의 드로잉이 조각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준비 단계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아름답게 꾸민 작품도 아니라고 일갈했다. 단지 “응축된 감정을 툭 던져놓는 것.” 그는 드로잉에 자신의 최초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노력함으로써 ‘예민한 신경선’과 ‘생명력’을 담아낸다. 부드럽고 자상한 풍모의 작가와 달리 그의 드로잉에는 거칠고 자못 폭력적인 내면의 정서가 응축돼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먼저 보고나서 작가를 만나면 이 작품을 만든 작가가 맞는지 되묻기도 한다고. 이런 질문을 받고 나면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작가는 음악을 전공한 누나, 철학을 공부한 형, 문학도인 동생 틈바구니에서 성장했다. 대학 진학 후 늘 자신의 부족한 역량을 탓하며 개인적 사회적 시련 속에서 균형 감각을 찾고자 노력했고, 그 감정을 작품에 녹여 낸 것. 이러한 폭발적인 감성으로 표현한 대상은 대체로 나무와 사람의 얼굴 형상이다. 산책을 즐겨 하는 작가는 뿌리의 힘과 줄기의 두께를 무시한 채 빛만 향해 경쟁적으로 솟아올라 결국 바람에 꺾여 버린 나무들을 보면서, 자연의 삶 역시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전시장 벽면을 둘러싸고 다닥다닥 붙은 드로잉들이 나무와 얼굴 형상을 교차하듯 보여 주는 것 역시 이러한 삶의 이치를 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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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개인전 전경 2014 학고재갤러리
이번 전시에서는 정현의 조각 작품도 7점도 볼 수 있다. 작가가 새로 주목한 또 하나의 ‘하찮은’ 재료는 파쇄공. 제철소에서 용광로를 거치고 남은 부산물에는 쇠 찌꺼기와 여러 물질이 섞여 있다. 여기서 다시 쇠를 분리해 용광로에 넣기 위해 약 16t에 달하는 쇳덩어리, 바로 파쇄공을 크레인으로 25m 높이까지 들어 올린 뒤 그 위에 떨어뜨리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을 6~7년여 간 거치고 나면 파쇄공의 무게는 절반가량으로 줄어든다. 사실 이 작품은 작가가 5년 전 포항제철을 방문했다가 발견한 파쇄공을 전시장에 가져온 것이다. 그는 이 재료 자체가 더 이상 무엇을 가감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존중할 수밖에 없는 오브제로 보았다. 파쇄공은 전시장 내부에 1개, 외부에 2개가 전시돼 있는데, 특히 외부에 전시된 작품은 자연광의 각도에 따라 딴딴한 쇳덩어리에 가해진 무자비한 힘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혹독한 시련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갉아 먹은 일그러진 파쇄공을 보면, 좋은 시련을 겪은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말했다. 열이 가해지면 검게 변하는 철의 특성상 검은 상처로 온통 뒤덮인 파쇄공은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함축한다. 내년부터는 위험하고 무지막지한 쇠 찌꺼기 분쇄 과정을 새로운 기술로 대체한다고 하니, 어쩌면 파쇄공을 다룬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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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개인전 전경 2014 학고재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