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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코리 아크앤젤, 미셸 마예루스 아카이브 프로젝트
2025 / 09 / 08

디지털회화의 선구자 미셸 마예루스(1967~2002)의 유산이 되살아났다. 미국의 디지털아티스트 코리 아크앤젤이 마예루스의 노트북을 복원하고, 이를 유튜브 렉처퍼포먼스로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전시 <Let’s Play Majerus G3>(4. 27~5. 4 베를린 미셸마예루스에스테이트)로 이어져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동시대 디지털 환경에서 미디어 아카이브의 의미와 보존의 문제를 되짚는다.

코리 아크앤젤 <Let’s Play Majerus G3 📽> 싱글채널 비디오, 사운드 2024~25_아크앤젤은 다섯 번의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마예루스의 디지털 아카이브를 공개했다. 오늘날 게임 방송의 형식을 차용했다.

“문화가 점점 더 디지털화 되면, 더 많은 문화가 버려지고, 잊히며, 작동할 수 없게 된 채 서랍에 보관될 것이다.”¹⁾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작가 미셸 마예루스는 2002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35세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와 페인팅을 결합한 대형 회화작업을 주로 선보였다. 로우파이 비디오게임, 영화, TV 등 초기 디지털 문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활용해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을 기반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 노이에베를린쿤스트페어라인 등 여러 기관에서 전시됐지만, 그가 생전 사용한 노트북 ‘매킨토시 파워북 G3’는 베를린 미셸마예루스에스테이트에 보관됐다.

디지털 문화와 기술을 기반으로 작업해 온 작가 코리 아크앤젤은 2014년 펜실베니아 앤디워홀뮤지엄의 아카이브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아날로그 기술과 매체, 미디어 보존 및 복원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박물관 소장품이었던 워홀의 30년 넘은 플로피 디스크에서 잊힌 디지털 실험작을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2017년 아크앤젤은 우연히 마예루스가 남기고 간 노트북의 존재를 알게 됐고, 미셸마예루스에스테이트를 방문했다. 그는 노트북이 부팅조차 어려운 상태임을 확인한 후 디지털아트를 연구, 보존하는 기관 ‘라이좀(Rhizome)’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2000년대 초부터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며 마예루스와 비슷한 노트북을 사용한 아크앤젤은 빈티지 소프트웨어를 복원해 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라이좀의 보존디렉터 드라간 에스펜시드와 마예루스의 노트북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복제본을 만들기로 했다.

<Let’s Play Majerus G3>전 전경 2025 베를린 미셸마예루스에스테이트_전시는 마예루스의 1996~2002년 작품과 아크앤젤의 2004년 이후 작품을 나란히 선보였다.

게임으로 재탄생한 디지털 아카이브

아크앤젤과 에스펜시드는 단순히 파일을 복구하는 것을 넘어, 당시 컴퓨터 운영 체제와 소프트웨어 환경을 그대로 복사하기 위해 데이터 복구 회사에 의뢰한다. 이들은 구형 컴퓨터 장치의 전체 구조를 모방하는 소프트웨어인 ‘에뮬레이터’를 이용했고, 팩시밀리로 노트북을 부팅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복제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유시 파리카가 『미디어의 지질학』(2025)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크앤젤은 이 과정으로 작가가 남겨둔 ‘디지털 작업실’에서 과거 역사의 단절과 잔해를 찾아낸다. 그는 2000년대 초반에 화석처럼 남겨진 작가의 마지막 모습, 폐기된 기술, 무한한 가능성의 흔적을 발굴해 나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복제본에는 당시 운영 체제와 마예루스의 바탕 화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의 마지막 바탕 화면은 ‘미스 팩맨(Ms. Pac-Man)’ 이미지였다. 아크앤젤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순간을 회상하며 “마치 그가 방금 자리를 비운 것처럼 느껴졌다”라고 언급했다.

마예루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펼쳐온 아크앤젤에게 그의 노트북을 복원하고 살펴보는 일은 곧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2000년대 초반 미디어 환경에서 마예루스라는 작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능숙하게 이미지를 다루고 작업에 반영했는지를 타임머신에 탄 듯 생생히 경험했다. 그는 여러 매체에 걸쳐 마예루스의 작업이 지닌 동시대성과 그가 기술을 활용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처럼 아크앤젤의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마예루스가 ‘포스트디지털회화’의 선구자였음을 다시금 일깨운다. 1990년대 마예루스는 이미 오늘날의 회화작가처럼 ‘포토샵’을 활용해 그림을 디자인하고 레이아웃을 조정했다. 즉 사전에 모든 결정을 내린 후 캔버스에 직접 렌더링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에 더해, 2000년 당시 마예루스가 전시 공간의 도면에 맞춰 구체적인 설치 계획안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발견됐다. 그는 스케치업 같은 3D 모델링 프로그램이 대중화되기 훨씬 전부터 물리적 공간에 구현될 가상 이미지를 시뮬레이션하는 일에 익숙했던 듯했다. 이처럼 마예루스는 21세기 초입부터 휴대와 이동이 가능한 자신만의 디지털 스튜디오를 지니고 다녔다.

미셸 마예루스 <Ohne Titel 762> 면에 아크릴릭 60×60×2cm 2001

아크앤젤은 마예루스가 남긴 디지털 작업실을 탐구하는 프로젝트의 방식에 관해 깊이 고민했다. 아크앤젤은 단순히 노트북에서 복원한 파일을 전시하는 대신, 디지털 환경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비물질 공간을 물리적 공간으로 활용한 작가였던 마예루스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낼 만한 매체와 방식을 택했다. 바로 게이머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트위치’와, 이를 송출하는 플랫폼인 ‘유튜브’다. 아크앤젤은 “마예루스의 G3를 플레이하자!”라는 제목으로 총 5개 에피소드를 제작해 유튜브에 게시했다. 아크앤젤은 이 방송에서 마예루스의 노트북을 일종의 게임 배경으로 전제하고, 게임에 접속한 유저가 디지털 작업실을 탐험하는 과정을 송출했다. 라이브 방송을 택한 아크앤젤은 렉처퍼포먼스이자 개인 방송 형식을 빌려, 디지털 아카이브를 탐색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시청자는 컴퓨터라는 예술가의 도구와 그 안의 작업 환경을 직접 체험하며, 마예루스가 남긴 작업의 본질에 다가선다. 이는 디지털 환경에서 미디어작가의 작업실이란 어떤 의미인지 되새기고, 디지털작업의 과정과 의미를 재조명하는 시도였다.

미셸 마예루스 <Lettin’ off as much as you can> 혼합재료 가변크기 1997

아크앤젤의 마예루스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세상에 공개되지 못한 천재 작가의 미공개 작품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더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마예루스라는 작가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동시에 디지털 시대에 아카이브가 갖는 의미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1996년 시작된 라이좀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예술작품의 의미와 보존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인터넷 등장 후 모든 것이 자동으로 저장될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오히려 가장 많은 자료가 유실된 시기가 바로 1990년대이다. 이 사실이 역설적으로 미디어 보존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온라인 전시, 초기 웹 사이트, 열화된 이미지 등 수많은 디지털 흔적이 지금도 사라지거나 대체되고 있다. 아크앤젤은 과거의 흔적을 복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다시금 현재의 맥락에 소환했다. 이는 무엇인지 모른 채 버려진 ‘미래의 조각’을 찾아내 오늘과 연결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1) Cory Arcangel, “THE WARHOL FILES: ANDY WARHOL’S LONG-LOST COMPUTER GRAPHICS”, Artforum(Summ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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