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展
Jae Ko: Recent Sculpture and Drawings
2014. 4. 5~5. 17 마르샤마테카갤러리(Marsh Mateyka Gallery)(http://marshamateykagallery.com/current/koApr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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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led, JK801〉 종이, 먹물, 풀 가변 크기 2014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없는 재고(Jae Ko) 작가는 재미 설치 미술가로, 지난 20여 년간 ‘종이’를 소재로 한 조형 작품을 발표해 왔다. 한국인 출신 미술가로는 드물게 워싱턴을 활동무대로 자리 잡고 있는 그녀는 지난 2011년 워싱턴의 대표적인 사립미술관인 필립스컬렉션미술관(The Phillips Collection)에서의 개인전을 기점으로 그 해 가장 주목할 만한 지역 작가로 급부상하였다. 이후 2012년에는 ‘여자라는 익명(Anonymous Was a Woman)’상*을 수상한 10인의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계속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재고 작가가 이번 마르샤마테이카갤러리 개인전에서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 ‘여자라는 익명’상은 과거 여성들이 미술 및 저술 활동에 있어서 성차별로 인해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해야만 했던 사실에 유래했다. 상을 받을 때까지 수상자의 추천과 심사는 모두 익명으로 이루어지며, 추천 받을 수 있는 조건은 40세 이상의 여성 예술가로 제한된다. 1996년 시작된 이 상은 매년 심사를 거쳐 다양한 분야의 재능 있는 여성 예술가 10인에게 앞으로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자 상금 25,000불을 조건 없이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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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JK634〉 크래프트지 가변크기 2008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그가 필립스컬렉션미술관에서 선보인 장소 특정적 설치 미술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형태와 색감을 지닌 작품들로 구성됐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종이’라는 소재의 새로운 변신을 소개한다.
고은섬(이하 Art) 전체적인 작업 방식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Jae Ko(이하 JK)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시피 나의 작품의 소재는 ‘종이’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나만의 방식으로 변화(transform)시켜 새로운 질감, 형태, 그리고 색상을 구현해 보고자 했다. 내가 처음 시도했던 방식은 말려있는 형태의 종이(rolled paper)를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묻어 햇빛, 모래, 그리고 바닷물이 종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관찰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실험과도 같았다. 나는 이러한 종이 덩어리를 반으로 갈라 묻어보기도 하고 3개월 이상의 시간 동안 썩혀보기도 했다. 벌레가 갉아먹은 종이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먹물로 결을 하나하나 살리며 팽창하는 부피감, 그리고 빗물로 번져가는 질감의 변화 등은 오랜 시간 동안 인내로 자연과 교감을 통해 얻은 소중한 결과물들이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얻은 크기와 형태, 그리고 색감이 모두 다른 수천 장의 종이들은 나의 작품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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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Untitled, JK100〉 종이, 먹물, 풀101.6×101.6×22.86cm 1996 / 오른쪽 · 〈Untitled, JK406〉 종이, 붉은 먹물 55.88×45.72×12.7cm 2011
Art 이번 신작과 과거 작품을 비교한다면?
JK 초기 작품의 경우, 종이를 일정한 형태로 고정시키고 나서 먹물에 담가 서서히 물들인 다음 오랜 시간 동안 말려 종이의 결 하나하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작업하였다. 이후에는 붉은색이나 푸른색 등 특정한 색을 입혀 보는 방식으로 작품의 색상을 변화시켰다. 적색과 다홍색의 중간을 띄는 작품의 붉은 색은 3가지 이상의 페인트를 수십 수백 번 뿌리고 말리는 작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푸른색 또한 마찬가지이다. 먹물이 아닌 색상을 입히는 작품의 경우, 종이의 안쪽 깊숙이까지 물들여 수천 개에 이르는 결을 하나하나 살려야하기 때문에 최소 2~3개월 동안 색상을 입히고 말리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형태, 색상, 그리고 질감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수십 개에서 수백 개까지 작품을 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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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Untitled, JK100〉 종이, 먹물, 풀101.6×101.6×22.86cm 1996 / 오른쪽 · 〈Untitled, JK406〉 종이, 붉은 먹물 55.88×45.72×12.7cm 2011
이번 전시 출품작의 경우, 종이를 3차원의 형태로 최대한 비틀어 풀칠로 그 형태를 고정한 상태에서 색을 입혀보았다. 그 결과 벽에 붙어있는 듯 하던 작품은 자연스럽게 벽에서 좀 더 튀어나와 입체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종이를 계속해서 풀었다 감았다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종이 자체가 가진 형태를 유지하는 힘의 한계에 다다른다. 그 시점에 도달했을 때 그 형태를 고정시키고 내가 원하는 색과 질감을 살리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번에 새롭게 시도해 본 풀칠은 이전 작품과는 달리 겉면을 좀 더 매끄럽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냥 풀칠만 했을 때는 반짝거리고 플라스틱 같아 보이기 때문에 흑연 가루(graphite)를 섞어서 좀 더 살아 있는 질감을 표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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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행중인 작가와 애완견
Art 작품의 형태에 있어 특별한 영감(inspiration)을 받는 대상이나 경험이 있다면?
JK 어릴 적 나는 신문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막내딸로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재봉틀이나 프레스 등 다양한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시고 또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던 섬세하고 자상한 분이셨다. 내가 일본으로 유학을 간 이후 아버지는 늘 작은 붓으로 손수 적으신 붓글씨 편지를 나에게 보내시곤 하셨다. 아마도 그런 유년기의 기억들이 내 작품의 종이나 먹물 같은 소재 속에 자리 잡고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또 다른 영감의 대상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untouched mother nature)이다. 이곳 워싱턴에 정착하기 전에 나는 서부로 수많은 여행을 다녔다. 지난 세월 동안 나의 동반자인 짐 샌본(Jim Sanborn)*은 나에게 장거리 자동차 여행(road trip)의 묘미를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작품관과 작업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지만 여행만큼은 다르다.
* 짐 샌본은 워싱턴 출신의 미국 조각가로 랭리(Langley)에 있는 CIA 본부에 설치되어 있는 〈크립토스(Kryptos)〉를 제작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크립토스〉는 총 865개의 알파벳과 4개의 물음표로 이루어진 암호로, 현재 전체의 내용 중 4분의 1은 아직도 해독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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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틀콘 소나무
여행을 떠나면서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사람을 마주치면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그동안 해왔던 여행에서 나는 많은 것을 경험하였다. 서부에서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거칠고 광활한 자연을 마주하였고, 캐나다 빙산지대로 떠난 여행에서는 3일 동안 밤이 오지 않는 기이한 경험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수년 전 떠난 서부 여행에서 브리슬콘 소나무(bristlecone pine)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이 소나무는 자그마치 5,000년 생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식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동안 메마른 땅과 거친 바람에서 살아 남기위해 기하학적으로 뒤틀린 기묘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나의 작품의 3차원적인 형태는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담아내는 데서 기인한다.
Art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목표가 있다면?
JK 나는 항상 작품을 작업할 때 소재의 독창성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의 창의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작업을 통하여 ‘종이’라는 소재만이 가진 특성을 이해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변형(transform)시킬 때 나 자신과 작품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정신을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여 최고조에 다다라 희로애락마저 사라졌을 때, 그 순간 내가 느끼는 작품과 오롯이 하나가 된 경험과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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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뉴저지 조각공원미술관(Ground for Sculpture) 전시 예상도
Art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부탁한다.
JK 향후 전시계획으로는 2015년에 뉴저지에 있는 조각공원미술관(Grounds for Sculpture)*으로 부터 대형 설치 미술작품 제작을 의뢰 받은 상태이다.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조각공원미술관 작품에만 집중할 계획이다. 이전에 했던 설치 작품과는 달리 완전한 백색 종이를 사용하는 작품을 계획하고 있다. ‘백색’을 영어로도 한국어로도 관객에게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전시 제목을 찾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백색을 선택한 이유는, 완전무결한 색상을 통해 작품이 설치된 공간 속에서 관객들이 작품에 완전히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순간(total immersive experience)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앞으로 계획하는 전시도 그렇지만 점점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작품들을 작업하려 한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들은 점점 더 입체적인 형태로 벽에서 분리되어 앞으로 나오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앞으로도 당분간 이러한 시도를 지속할 것이다.
* 뉴저지 조각공원미술관은 1992년 조성된 42에이커(170,000㎡)에 이르는 조각 전용 공원을 가지고 있는 미술관으로, 뉴저지에 있다. 미술관의 모든 공간은 현대 조각을 위해 쓰이도록 지정되어 있다.
재고(Jae Ko) 1961년 서울 출생. 도쿄미술대학에서 수학. 큐갤러리(1988, 일본), 아메리칸대학미술관(2008, 미국), 필립스컬렉션미술관(2010, 2011) 등에서 개인전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