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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칼로&디에고리베라展

2014/03/09

Frida Kahlo & Diego Rivera, Art en fusion 
2013. 10. 9~2014. 1. 13 오랑주리미술관(Musée de l'Orangerie)(http://www.musee-orangerie.fr/index_u1l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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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칼로<LaColumnaRota>1944ArchivoMuseoDoloresOlmedo2013BancodeMéxicoDiegoRiveraFridaKahloMuseumsTrust,Mexico,D.F./ADAGP,Paris

미술사를 통틀어 대단한 커플이 몇 쌍 있다. 이번 전시의 두 주인공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상식을 뛰어 넘는 광기어린 삶이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멕시코의 돌로레스올메도미술관(Museo Dolores Olmedo)과 공동주최로 기획되었다. 100여 점의 회화 작품을 비롯하여 흑백 사진은 물론 당시 디에고 커플을 촬영한 영상이 함께 전시되었다. 돌로레스 여사는 디에고의 오랜 후원자였으며, 두 사람은 친구 이상의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디에고는 죽기 전에 30여 개의 상자가 넘는 엄청난 양의 자료를 그녀에게 위탁하면서, 자신의 사후 15년인 1972년까지 이 자료를 개봉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는 부탁했던 시기보다 훨씬 오랫동안 비밀리에 이 자료를 보관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2002년에 마침내 학자들에게 공개되면서 수년간의 연구를 거쳐,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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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리베라<NaturalezaMuertaCubista(congarrafa)>1916ArchivoMuseoDoloresOlmedo2013BancodeMéxicoDiegoRiveraFridaKahloMuseumsTrust,Mexico,D.F./ADAGP,Paris

“내 생애에 두 번의 큰 사고가 일어났다. 하나는 교통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를 만난 것이다.” 전시장 벽면에 새겨진 문구가 예사롭지 않았다. 왜 그녀는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며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을 ‘악몽 같은 사고’라고 회고했을까? 전시를 둘러보면서, 그들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프리다 칼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교통사고로 인해 불구가 된 그녀에게 남편을 만난 것은 그보다 더 큰 대형사고일지도 모른다.

당시 43세의 유명화가였던 디에고는 21세의 젊고 명민한 처녀인 프리다와 만나게 된다. 디에고는 2m가 넘는 거대한 몸집에 추남으로 잘 알려져 있었고, 프리다는 신비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그는 호기심어린 그녀에게 예술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고, 이와 더불어 인생의 고통과 풍파 가득한 부부의 삶을 안겨 주었다. 불멸의 멕시코 커플인 두 사람은 디에고의 지나친 여성편력으로 1939년에 이혼하였으나 다시 이듬해 재혼했으니, 그들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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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칼로<AutorretratoconTrajedeTerciopelo>1926PhotoFranciscoKochenADAGP,Paris2013

오랑주리미술관의 지하 전시장에 들어서면 디에고 리베라의 파리 유학시기의 작품이 관객을 맞이한다. 큐비즘 성격의 작품은 당시 가깝게 지냈던 피카소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서도 리베라는 마야문명 특유의 색깔을 표현했다. 이후 그는 고국에 돌아와 학교 및 공공시설에서 수많은 벽화작업을 진행했다. 민중화가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그는 멕시코의 역사와 사회상을 많이 그렸다. 소외계층인 인도인의 일상적 삶을 그리기도 했으며, 특히 1910년 멕시코 혁명을 소재로 작업했다. 당시 멕시코에는 문맹인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벽화는 민중을 교육하는 데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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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리베라<VendedoradeAlcatraces>1943PhotoFranciscoKochenADAGP,Paris2013

반면, 프리다는 자신의 삶을 그렸다. 겉으로 보이는 일상과 더불어 내면의 감정을 담았다. 무엇보다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신체의 고통은 그림을 그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짙은 눈썹과 머리에 단 꽃이 인상적인 프리다는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마치 렘브란트와 고흐처럼 자서전을 써내려가듯이 꾸준히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브르통이 1938년 학회 때문에 멕시코를 방문하였다. 그는 디에고와 프리다를 만났고, 프리다의 작품에 매료되어 이듬해 파리전시에 초청하였다. 당시 프리다의 파리 전시는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만큼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이후 막스 에른스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녀에게 그룹에 합류할 것을 적극 권하였으나 프리다는 이렇게 거절하였다고 한다. “나는 나의 몽환적 세계를 그린 것이 아니다. 나의 일상을 그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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