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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전시의귀환展

2015/02/11

25년 만에 부활한 ‘지구의 마술사’
전설적인 전시의 귀환展 2014. 7. 2~9. 8 파리 퐁피두센터(https://www.centrepompidou.f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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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마술사:전설적인전시의귀환〉전전시전경2014파리퐁피두센터

1989년 5월 18일 퐁피두센터와 라빌레트 그랜드홀(Grande halle de la Villette)에서 열린 〈지구의 마술사〉전을 기점으로 현대미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컨템포러리 아트의 ‘세계화’가 그 포문을 연 것. 전시는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제3세계 지역까지 아울러 전 대륙의 현대미술 작가 100여 명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컨템포러리 아트의 영역이 그간 ‘민속 미술’로 치부되던 비서구권 미술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지난 2014년, 이 ‘전설적인 전시’의 개최 25주년을 기념하고자 퐁피두센터에서 아카이브 전시가 열렸다. 1989년 이 전시를 진두지휘한 큐레이터 장-위베르 마르탱(Jean-Hubert Martin)도 이번 기념전 준비에 합류했다. Art는 스튜디오를 찾아가 그를 만났다. 마르탱이 직접 말하는 당시 전시의 탄생 과정과 미술사적 의의, 그리고 이번 기념전의 취지에 관해 들어 보자.

Art 1989년 〈지구의 마술사〉전을 기획했을 당시 미술계의 상황은 어땠나?

JHM 동유럽이나 남아메리카 미술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물론 간혹 적은 양의 정보를 접하거나, 해당 지역의 미술을 다룬 전시가 이따금 개최됐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국가의 문화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사실 1968년 이후 ‘국제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긴 했다. 젊고 급진적인 국제주의자 학생들이 주축이 된 68혁명 때문이다. 그들 덕분에 당시 유럽 근방의 국가, 또는 동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금은 알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런 움직임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이후 1970년대 개념미술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예술작품에 대한 패러다임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술관들이 회화 시장을 뒤따르는, 즉 미술계가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나로서는 이런 사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개념미술을 옹호하고 지지하던 갤러리들이 갑자기 “사실 회화가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Art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동기로 〈지구의 마술사>전을 기획했고, 그 이면에 깔린 비평적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JHM 앞서 언급한 미술계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미술계는 한눈에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좁디좁은 세계였다. 나는 거리를 두고 좀 더 큰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구의 마술사>전은 스스로 완벽한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밖을 보려 하지 않았던 좁은 미술계에 대항하는 행위로서 비평적 의도를 담고 있다. 한편 영미권에서 ‘민속 미술(indigenous art)’이라고 칭하는, 전 세계에 있는 ‘토착 미술’은 서구의 시스템 내에서 민족학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미술로 여겨지지 않고 있었다. 이는 서구 중심의 매우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분류였다. 19세기, 아니 그 이전으로 다시 퇴행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우리는 이에 관해 자성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구의 마술사〉전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Art 이번 기념전의 아카이브 자료 중 다양한 대륙에서 온 작가들이 함께 작업하는 과정을 촬영한 비디오가 흥미로웠다. 작가 리서치부터 전시 구현까지, 당시 이런 규모의 전시가 어떻게 가능했나.

JHM 처음 이 전시에 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1982년 즈음이었고, 1985년이 돼서야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이후 전시 개최까지 4년이 걸렸고, 그동안 협력자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했다. 말 그대로 정말 거대한 작업이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이라고는 팩스가 이제 막 보편화됐다는 것뿐이었다. 팩스 덕분에 세계 곳곳과 연락할 수 있었다. 준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리서치’였다. 나는 가능한 한 넓은 시각을 가지고 연구하길 원했다. 당시 갤러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미술계의 시스템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직접 방문했던 국가에서 작가를 직접 선택하거나, 지난 몇 세기 혹은 몇 년 동안 각 문화 안에 자리 잡은 전통적이고 전위적인 예술 활동을 연구하길 바랐다. 모든 연구를 4년 동안 함께 진행할 수는 없었다. 전시 협력자들은 연구를 위해 각각 다른 나라로 이동했고, 되도록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데 몰두했다. 탐사 과정에서 정말 어려웠던 것은 연구에 필요한 서적 중 유럽어 혹은 영어 번역본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지리 서적부터 여행 서적까지 많은 책을 찾아보고, 흥미로운 이미지나 흔적을 뒤쫓는 식으로 초반 연구를 진행했다. 다행히 각 지역의 현지인과 단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민속 문화 연구를 위해 다른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켰다.

Art 1989년 전시에 초청한 작가들의 선정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JHM 그 기준은 동시대적 요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술사와 고대 회화를 전공했던 나의 경우, 비교적 동시대 미술에만 몰두했던 다른 큐레이터들에 비해 폭넓은 미술사적 접근이 가능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 미술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의견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한편, 미국과 유럽권 국가에서는 문화적 다양성에 근거를 두고 꾸준히 접촉하며 작업해 왔던 작가 위주로 선정했다.

Art 한국에서는 백남준이 이 전시에 참여했다. 그런데 정작 이 전시의 개념과 상통하는 작가 요셉 보이스의 작품은 전시되지 않았다.

JHM 백남준은 이 전시를 많이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멋진 전시다!”라고 자주 말했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서구 아방가르드 시스템을 완벽히 수용했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예술을 완벽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지구의 마술사〉전이 이런 맥락에서 자신이 느낀 한계와 같은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이해했던 것 같다. 전시를 위한 연구 진행 단계에서 요셉 보이스와 로베르 필리우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당시 나는 살아 있는 작가만 전시해야 한다는 기준을 매우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두 작가를 제외했다. 솔직히 이 두 작가를 전시에서 제외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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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서의장-위베르마르탱.베른쿤스트할레관장(1982~1985),파리국립현대미술관관장(1987~1990),뒤셀도르프쿤스트팔라스트관장(2000~2006),2000리옹비엔날레예술감독,2009모스크바비엔날레큐레이터,2011베니스비엔날레프랑스관커미셔너등을역임했다.〈지구의마술사〉(파리퐁피두센터,1989),〈Artempo〉(베니스포트니미술관,2007)등의전시를기획했다.

Art 이번 기념전 기획에 당신은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JHM 전시 구현 이전 단계에만 참여한 정도이다. 주로 전시 관련 아카이브 자료 수집을 도왔다. 내가 소장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많은 학생들이 함께 일했는데, 자료를 분류하기 시작했을 때 전시와 관련된 모든 자료는 엉망으로 방치된 상태였다. 현재는 모든 자료가 매우 잘 정리됐다.

Art 이번 전시에서 벽면에 비정형적으로 배치한 출품작 이미지들과 작가들의 작업 설치 장면을 상세히 촬영한 영상들이 인상적이었다.

JHM 벽면 위에 진열된 사진들은 모두 25년 전에 설치됐던 작품들의 이미지로, 전시에 참여했던 작가 사르키스(Sarkis)가 촬영한 사진들이다. 당시 홈비디오 시스템이 보급됐기 때문에 우리는 일종의 ‘비디오 카탈로그’를 제작할 수 있었다. 이 비디오는 전시 기간 동안 판매됐다.

Art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과거 전시를 다시 선보이는 ‘리메이크’ 전시가 주목받고 있다. 일례로, 1969년 하랄트 제만이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전이 2013베니스비엔날레 기간 동안 재연됐다. 이번 25주년 기념전은 여타의 리메이크 전시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JHM 2013년 베니스에 다시 전시된 〈태도가 형식이 될 때〉전은 기록이 아닌 실제 전시했던 작품과 함께 당시 전시의 개념을 다시 전달했다는 점에서 ‘리메이크’ 전시라고 분류할 수 있다. 사실 〈지구의 마술사〉전을 퐁피두센터에서 다시 개최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이런 리메이크 형식의 전시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후 칸딘스키도서관 관장 디디에 슐만(Didier Schulmann)이 아카이브 전시에 관한 아이디어를 냈다. 나는 과거 전시의 자료를 정리, 분류했고 이를 출판물로 제작한다는 데 동의했다. 따라서 이번 기념전은 리메이크 전시라기보다 아카이브로 구성된, 기록을 위한 전시다. 리메이크 전시가 최근 여럿 개최됐는데 이 형식에 그다지 호의적이진 않다. 시간이 흐르면 ‘당시’ 전시의 맥락이 ‘지금’에는 완전히 바뀌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과거의 작품이 오늘날의 시점에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것에 더 흥미를 갖고 있다.

Art 25년 전 〈지구의 마술사〉전은 ‘당시’의 미적 관점에 대한 비평적 시선을 제시했다. 흥미롭게도 지금 이 전시를 다시 봤을 때 우리의 ‘현재’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현재 미술계에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질문을 하자면 1989년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를 느끼지는 않는지.

JHM 대중이 현대미술에 이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로부터 충분히 멀리 떠나오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미술관, 컬렉터, 갤러리들이 구성한 시스템과 서양 동시대 미술의 개념 안에만 머물러 있다.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잘 돌리지 않으며, 우리는 이를 ‘물질 문화’라고 부른다. 나는 이 문제를 논하고자 2001년 뒤셀도르프에서 〈제단(Autels)〉전을 기획했다. 전 세계 70여 명의 샤먼, 마술사, 사제 등을 초대했고, 그 중에는 한국 무당, 샤머니즘에 관한 놀라운 작품들도 있었다. 이 전시는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말하기 위해 기획됐다. 서구 식민주의가 근대 불가지론의 출현과 함께 종교의 예술적 가치를 부정하고 평가절하해 왔기 때문이다. 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예술적 표현을 자극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은 하나의 시각적 표현이며 예술이다. 갤러리나 미술관, 혹은 민속미술관에서 이 주제와 연관된 작품들이 드물게 전시되곤 하는데 이는 불합리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과거에 향수를 느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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