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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아시아문화전당이영철예술감독해촉에부쳐

2015/03/06

한반도 문화실크로드의 카오스모스
광주아시아문화전당 이영철 예술감독 해촉에 부쳐

/ 김종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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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금남로전남도청일원에들어서는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배치도.‘빛의숲’을컨셉트로열린광장의기능을겸한다.

한 달 가까이 문화예술계의 이슈가 되었고 숱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으나 나는 사태의 앞뒤를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그 모든 기사와 자료들을 찾아 읽어도 오리무중일 뿐이다. 그러니 이 지면에서 위촉해지 통보를 불러 온 이유, 아니 그 이유를 억지춘향으로 짜내야 했을 정권의 스트레스 혹은 그 이유 너머의 음모론 따위를 세밀하게 그릴 재간이 나에겐 없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언론을 통해 배포됐으니 글의 행간을 꼼꼼히 본다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포털사이트에 검색어 몇 개를 넣고 클릭해 보라.

그렇다면 이영철 감독의 해촉이 우리에게 던지는 ‘사건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일까? 외압설에 따른 부당해고? 홍익대 학연 카르텔의 급부상에 따른 역작용? 무지한 문화부 장관의 문화적 테러? 더 이상 휴직을 허락할 수 없는 계원예술대의 인내성 한계? 그런데 광주의 문화단체와 시민단체들은 그의 해촉을 적절한 조치라고 논평하고, 언론은 해촉 기사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사실’ 너머의 주장까지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진흙탕이 될 공산이 크다. 또한 사건의 본질조차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게다가 아시아문화전당특별법도 이 글을 쓰는 2월 27일 저녁까지도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여야가 빠른 시일 내에 운영주체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9월 개관은 허수아비 놓고 잔치하는 꼴이 될 게 뻔하다.

아시아문화전당을 위해 2005년부터 2023년까지 국비 2조 8천억 원, 지방비 8천억 원, 민간 투자 1조 7천억 원 등 총 5조 3천억 원의 예산이 책정됐고 이미 1조 원 가까운 국고가 투입됐다. 왜? “창조적 상상력이 새로운 문화적 창의와 예술로 승화되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다. 따옴표 내의 문장은 아시아문화전당의 비전에서 인용한 것인데,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5.18민주항쟁의 상징인 옛 전남도청 자리에 세기적 복합문화공간의 탄생을 공약했고, 그것은 2005년부터 실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새로운 건축적 실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의 콘텐츠를 그곳에 담기 위해 모여들었고, 또한 그 사이 우연처럼 ‘아시아’라는 대륙은 전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새로운 의제를 형성하며 화두로 급부상했다. 그것은 심지어 아시아 내부에서조차 아주 뜨거운 화두다. 이렇듯 아시아가 아시아의 안팎에서 인류의 화두로 뜨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21세기가 시작되고 어떤 예지의 실현처럼 동아시아 변방의 도시 광주에서 아시아문화전당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개관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연결하는 한반도 문화실크로드의 거대한 시원이 열리는 날이 말이다.

나는 그 날이 실크로드로 흩어지고 다시 모여서, 그야말로 창조적 상상력이 새로운 문화적 창의와 예술로 승화되는 리얼 판타지 디지털리즘의 빛고을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은 또 번개 터지는 날에 열리는 용들의 축제이며, 막혔던 땅 우물과 하늘 우물이 회통해서 거대한 신화가 쏟아지는 순간이라고 기대했다. 이성과 합리, 과학과 구조의 시대를 성찰하면서 신화와 직관, 자연과 카오스모스의 시대를 새로 결합하게 될 것이라고도 상상했다. 그 이유는 그곳이 슬픈 영혼들의 우물지이기 때문이었다. 5.18은 가장 잔혹한 시대의 가장 완벽한 코뮌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광주는 카오스모스가 생성될 수 있는 최적의 신화지다. 두 번째 이유는 그곳에 이영철 감독이 있기 때문이었다.

1987년 《현대미술비평 30선》 중 그가 번역한 하버마스의 〈모더니티: 미완성의 프로젝트〉를 읽었고, 민중미술의 당파성 논쟁을 구해 읽었으며, 그가 뉴욕 퀸즈미술관에서 기획한 〈태평양을 건너서〉전(1993)을 연구한 바 있다. 그 이후 〈도시와 영상전〉(1998), 〈공장미술제〉(1999)에서 그의 전시를 처음 보았고, 2004년 토탈미술관에서 〈당신은 나의 태양〉전을 보았으며,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개관전도 보았다. 지난해에는 그를 직접 만나서 그가 꿈꾸는 아시아문화전당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늘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이상의 이데아를 쏘아 올려서 충돌시키는, 기이하고 낯선, 독선의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였다. 그래서 그의 전시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숨 가쁘게 역동적이나 때때로 고요하고, 미학을 무너뜨린 곳에서는 비린내가 나지만 명징했다. 모더니티와 후기구조주의에 집중했던 청년이 시나브로 예지에 눈뜨더니 예술의 맥놀이를 즐겼다. 그러니 그가 있는 곳에서 예술은 활개를 쳐 대지만 오히려 제도는 장벽이었다. 그의 맥놀이는 폭풍우 같아서 어떤 때는 주변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기도 했다. 마치 그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새 것이 탄생한다는 듯 그런 황폐화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전시에 녹여내고는 했다. 그는, 그 자신이 그 자체로 카오스모스적인 인간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시아문화전당의 예술감독에 여전히 가장 적합한 인물이 그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가 해촉됐다.

문화부는 이영철 감독의 카오스모스적인 삶과 지적 유희와 앞뒤 없는 행태와 길들여지지 않는 비제도적 언술에 화가 났음에 틀림없다. 광주에서 숱한 오해와 충돌을 불러일으킨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카오스모스 없이 어떻게 ‘창의적 상상력’을 생각하며 복잡계 같은 아시아의 문화를 불러들일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 그에게 맡겼으니 시원의 길트기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가 이어 나갔던 실크로드의 접점들을 그 없이 온전히 복원할 수 있을까? 개관이 되고 나면 일의 시스템은 더 견고해져 버릴 텐데 어떻게 아시아와 유연하게 만나지? 계속 한숨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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