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계에도 ‘여섯 빛깔 무지개’ 뜰까?
한국 미술계에도 ‘여섯 빛깔 무지개’ 뜰까?
청량엑스포(http://xpo.co.kr/), 햇빛서점(https://www.facebook.com/sunnybooks.kr) 등 LGBT 콘텐츠 전문 예술공간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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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보광동에 오픈 예정인 게이 서적 전문 ‘햇빛서점’이 첫 대외 활동으로 지난 6월 28일 열린 제16회 퀴어퍼레이드에서 ‘햇빛부채’를 배포했다.
지난 6월 28일 제16회 퀴어퍼레이드가 서울에 커다란 무지개를 드리웠다. 역사상 첫 서울광장 개최를 일구어 낸, 3만여 명에 이르는 역대 최대 규모의 퍼레이드 행렬은 이틀 전 미국에서 들려온 낭보에 더욱 격양돼 있었다. 1969년 스톤월 항쟁 이후 49년 만에 미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됐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21번째다. 한국 사회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2001년 대비 2014년 동성 결혼 찬성 비율은 18% 증가한 35%였는데, 세대별 찬성 비율 중 19~29세가 66%, 30대가 50%에 달했다. 특히 영화감독 김조광수와 영화사 대표 김승환 동성 커플이 지난 7월 동성 결혼 합법화 소송을 제기한 상태여서, 과연 한국이 아시아 첫 동성 결혼 합법화 국가가 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최근 국내 미술계에서도 LGBT에 의한, LGBT를 위한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운 전시, 행사, 공간 등이 등장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 미술계에는 ‘퀴어아트’라고 특정할 만한 씬(scene)조차 형성되지 못했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공민권 운동과 함께 페미니즘, 동성애자 인권 운동 등 성 담론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졌고, 1970년대 LGBT 연구, 1990년대 퀴어 이론 등으로 확장됐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1980~90년대 활발했던 페미니즘 미술과 맞물려 퀴어아트가 부상하지는 못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퀴어 아트씬을 이끌어 갈 주체, 커밍아웃한 LGBT 미술인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 그런 와중에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당당히 밝힌 미술공간 운영자들이 최근 LGBT 콘텐츠를 적극 수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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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BT 단체가 제작한 상품이나 LGBT의 소장품을 전시 및 일부 판매한 〈Qbject〉전(7. 1~19) 개최 당시 ‘청량엑스포’ 출입문 전경
이는 소규모 공간에서 두드러진다. 지난 5월 청량리동에 오픈한 청량엑스포가 대표적이다. 송하영 장수정 최조훈 3인의 공동 운영자 중 한 명이 성소수자이고, 이를 반영해 공간의 성격을 “미술, 문학, LGBTQIA 등을 아우르는 축제”라고 규정했다. 지난 7월에는 6월 성소수자 인권의 달에 뒤이어 20일여 간 ‘Qbject’라는 전시를 열었다. 페어 형식을 겸한 이 전시는 제16회 퀴어문화축제 부스에서 판매된 상품, LGBT 단체에서 제작한 상품을 비롯해 성소수자의 소장품 등을 바닥에 진열해 두었고, 일부 상품은 현장에서 관객이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공동 운영자 최조훈은 “성소수자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물에 덧씌워진 의미를 걷어 내 오브제-성소수자-관객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객관화하고 사물을 해체, 조립해 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말했다. 청량엑스포는 9월 초부터 게이 작가 4인의 그룹전을 준비 중이다. 8월 하순에는 보광동에 ‘게이 전문 서점’이 오픈한다. 프리랜서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해 온 박철희가 운영하는 햇빛서점은 《PINUPS》 《BUTT》 같은 해외 유명 게이 잡지나 각종 LGBT 서적 및 굿즈를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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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제53회 베니스비엔날레 덴마크와 북유럽관의 포스터. 실제로 북유럽관에는 나체의 모델이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퍼포먼스를 실행했다. Photo by Nick Ash
마침 국내 대표적 미술기관도 LGBT 작가에 주목하고 있다. 올해부터 서울관에서 개최될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5〉전(8. 4~11. 1)에는 꾸준히 정체성 문제를 탐구해 온 게이 작가 오인환이 후보 작가 4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또한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그간 해외의 게이 작가를 국내에 소개한 바 있다. 2011년 프랑스 작가 장-미셸 오토니엘(Jean-Michel Otoniel), 2013년 미국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개인전에 이어, 지난 7월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출신의 게이 듀오 작가 엘름그린&드라그셋(Elmgreen & Dragset)의 개인전(7. 23~10. 18)을 열고 있다. 이들은 미술관 자체를 개방적이면서도 폐쇄적인 관문이자 경계의 공간인 ‘공항’으로 변신시켰다. 편집증적으로 섬세한 디테일과 기발한 전환적 아이디어가 유쾌하기도 하지만 기능을 상실하거나 외면 받고 버려진 상태를 드러낸 작품들은 우울하고 쓸쓸한 분위기도 자아낸다. 작가의 성 정체성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는 특징을 작업에 반영한 듯하다. 이번 개인전 이전에도 가상의 게이 컬렉터가 자기 저택에서 자살한 상황을 연출한다거나(베니스비엔날레 북유럽관 2009), 막대한 자산을 물려 받았지만 자신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파산한 가상의 영국 건축가의 저택을 꾸미기도 했다(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 개인전 2013). 최근 다시 불붙은 페미니즘 이슈와 함께 성 담론이 활성화 되면서 한국에서도 튼튼한 LGBT 아트씬이 형성될 수 있을지, 맑게 갠 하늘에 걸린 여섯 빛깔 무지개를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