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의 퍼포먼스와 《채식주의자》,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대하여
‘정상인’이 되지 못한 자들의 죽어가는 ‘말’들
소설가 한강의 퍼포먼스와 《채식주의자》,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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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배내옷> 싱글채널 비디오 15분 36초 2016 ⓒ 최진혁
오뉴월이주헌에서 열린 전시 <소실.점>(6. 3~26)전은 작가 차미혜와 소설가 한강의 2인전이다. 이 전시에서 한강은 ‘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번엔 텍스트가 아니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짜거나 조약돌 소금 얼음을 손 위에서 녹이는 듯한 행동을 하는 등, 문인으로서는 생소한 매체인 ‘몸’을 이용한다. 한강의 출품작은 퍼포먼스 기록 영상과 퍼포먼스의 결과물로 나온 오브제들인데, 이 작업들은 그의 신작 소설 《흰》(난다 2016)과도 연결된다. 《흰》은 눈 설탕 수의 등 ‘흰 것’의 목록을 총 65개의 이야기로 엮은 책이다. 그러나 ‘흰’이 단순히 색깔로서 ‘하얀색’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획자에 따르면 한강의 작업은 “그 ‘중심의 공간’을 ‘흰’이라 명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며, 한강은 “‘흰’을 가로지르려면 말의 죽음을 통과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즉 ‘말의 죽음’이라는 것을 헤치고 나가야만 자유롭게 종횡할 수 있는 공간 역시 ‘흰’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말은 언제 죽음을 당할까? 주체가 침묵을 선택할 때가 아니라 강제로 침묵당할 때 말은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흰’은 억압이나 폭력에서 벗어난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한강은 (음성)언어는 아니지만 침묵도 아닌 퍼포먼스를 시도하면서, 강한 발설과 굳은 무언(無言) 사이의 망설이는 말들을 불러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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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돌, 소금, 얼음> 싱글채널 비디오 7분 24초 2016 ⓒ 최진혁
최근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관심 ‘폭격’을 맞은 소설 《채식주의자》(창비 2007)에서 ‘말의 죽음’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면서부터 고기를 거부하기 시작한 주인공 ‘영혜’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하지만 총 3부로 나뉜 소설은 각각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에서 서술되며, 영혜는 말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누군가 영혜에게 채식을 시작한 이유를 묻자 남편은 자기 또한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할까봐 그의 말을 막고, 아버지는 영혜의 입에 무작정 고기를 쑤셔 넣는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 《피어라 돼지》(문학과 지성사 2016)를 해설한 권혁웅 시인은 “돼지는 무수히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먹힌다. … 실제로 여자도 생산을 위해서 무수히 (남성의 언어로 말하자면) 먹힌다”고 말한다. ‘먹는’ 행위는 오로지 상대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진 존재가 약한 존재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이다. 인간은 고기를 먹고, 남자는 여자를 ‘먹는다’고 비속어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영혜는 채식주의자로서 육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으로부터 비폭력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영혜는 육식과 함께 브래지어 착용도 거부한다. 가슴 역시 그에게 비폭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그러나 그의 남편은 도드라지는 유두의 윤곽을 의식하며 영혜를 타박하고 브래지어 착용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현재 우리 사회가 여성을 통제하는 무수한 억압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운 현상임에도 여성은 2차 성징이 시작할 때부터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을 남들 앞에 보이면 수치스럽게 느끼도록 학습 받는다. 가슴은 물론 브래지어 끈도 노출해서는 안 되며, 생리는 ‘마법’이나 ‘그날’ 등으로 암시해야 한다. 얼마 전 연예인 설리가 자신의 SNS에 ‘노브라’로 보일 법한 사진을 게재하자 일부 네티즌들은 도덕성을 운운하기까지 했다. 가부장제의 관습이 여전히 만연한 이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의 신체 및 행동에 대한 규율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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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는 여성혐오 살인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과 국화꽃으로 가득 찼다. Photo by 니문
지난 5월 17일 새벽 강남역의 한 화장실에서 발생한 여성을 타깃으로 삼은 살인 사건은, 곧이어 이를 규탄하는 자들과 여성혐오 범죄임을 부정하는 자들의 전면적인 대치로 이어졌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희생자를 애도하는 포스트잇으로 뒤덮이고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도 수차례 진행됐다. 하지만 시위에 나온 여성은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다.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자리에서까지 수많은 살해 위협과 신상 유출, 웹상에서의 조롱, 비하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말하는 일조차 ‘감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몰라도 된다는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 사건을 그들의 주장대로 한 조현병 환자의 문제로 보더라도, 사람을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구분하여 후자를 모두 몰아 내고 ‘안전한 세상’을 표방하는 일이 과연 옳을까? 정상인을 규정하는 자들은 언제나 사회의 권력자들이고, 그들은 대체로 발언권을 독점한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세계 바깥에서 ‘그 누군가의 정상인’이 되지 못한 자의 말들은 지금도 계속 죽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