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 올림픽과 비엔날레 시즌을 통해 세계화를 재사유하다
‘글로벌 행사’의 동력, 과정의 지속성이 갖는 힘
리우 올림픽과 비엔날레 시즌을 통해 세계화를 재사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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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리우데자네이루 하계올림픽 로고
요즘 TV 광고에 운동선수들의 모습이 부쩍 자주 등장한다. 큼직한 스포츠 행사 시즌 전후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난 8월 6일부터 22일까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제31회 올림픽이 열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살기 좋은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국제친선 도모’를 목표로 한 올림픽. 그야말로 세계인의 축제이자 인류평화의 염원을 담은 행사다. 그런데 체력이 곧 전투력을 상징했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의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열었던 올림픽이 어떻게 ‘세계인의 평화’를 상징하는 국제적 행사가 됐을까? 가을 운동회에서 어린이들이 철봉에 매달린 동그란 과자를 따먹듯이, 프로급 선수들이 아마추어인 양 메달을 따먹는 것이 ‘세계인의 평화’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2008년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올림픽 문화예술 고문직’을 사퇴한 일이 있었다. 당시 개최국인 중국이 지금껏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아프리카 수단 정부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상대로 중국은 ‘세계인의 평화’를 표방하며 베이징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쯤에서 ‘세계인’이라는 낱말에 약간의 낯설음과 함께 의문이 생긴다. 과연 ‘세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21세기에 들어 급속도로 퍼져나간 개념 중 하나가 ‘글로벌’ ‘세계인’일 것이다. 그리고 세계 각국, 각 도시에서는 이 글로벌과 세계인을 향한 각종 행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행사에 비하면 그 규모와 영향력은 미비하지만, 비엔날레 역시 국제행사를 표방하며 세계 각국의 작가 및 예술 관계자들을 아울러 세계 미술의 동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비엔날레 행사는 미국 프랑스 브라질 터키 등 각지로 퍼져나가며,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광주 부산 창원 대구 등 수많은 도시에 자리 잡게 됐다. 비엔날레 정도는 열려야 글로벌 시대에 발맞춰 나가는 문화 선진국, 문화도시라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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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963(고려제강 수영공장)에 설치된 조로 파이글의 <Poppy> 2012_2016부산비엔날레 Project2 출품작
비엔날레가 국제행사로서의 역할을 자처한 만큼 그 포부 또한 ‘전 지구’를 겨냥하고 있다. 9월 초 비슷한 시기에 열린 서울과 광주, 부산의 비엔날레들이 내세운 타이틀만 보더라도 그 관심의 스케일은 ‘전 지구적’이다. 미디어시티서울은 지구 밖으로까지 확장하여 화성인의 언어라고 표현되는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라는 제목을 내걸었고, 광주비엔날레의 ‘제8기후대’라는 제목은 인간의 생존방식과 문명의 발달을 기후를 통해 설명한 지구상의 7개의 물리적 기후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미래의 ‘상상의 세계’을 말한다. 부산비엔날레의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라는 제목 역시 지구와 인류를 포괄한다. 예술의 장을 통해 인류학적 고민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행사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인류학적 고민 중 하나는 바로 글로벌이라는 개념의 생성과정과 그 기능이 야기하는 문제점에 관한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빈곤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포된 모순된 논리를 예술이라는 장치를 통해 시각화하고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비엔날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지역의 고유성, 주체성, 독자성에 대한 가치를 재탐색하고 이를 포괄하고 수용하고자 노력해왔다. 세계화 흐름 안에서 부상하는 로컬리티의 문제가 비엔날레 내용의 일부가 된 것이다. 비엔날레가 국제행사를 표방하면서도 각 도시의 ‘공공의 자금’으로 만들어지는 행사이기에 로컬리티가 오랫동안 그 화두가 되어 온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비엔날레가 다루고 있는 로컬리티의 문제는 전시를 통해 시각화되기도 하고, 체험이나 참여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돼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려스러운 점은 지구적 차원에서의 지역적 관심이 예술의 영역에서 일종의 취향이나 하나의 트렌드로 머무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서구인들의 동양의 이국적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동방취미 경향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처럼 말이다.
스포츠와 예술의 공통점은 ‘인간의 전유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도전과 한계, 상상력을 실험하고 가늠하는 활동을 축제의 중심에 놓고 인류를 향한 목표를 지향하는 것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능력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그러한 행사들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괴리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한번의 이벤트로 그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는 주기적 행사로 이어 나가려는 것은 곧 ‘과정’의 지속성이 완결된 ‘결과’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