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하라!
2021 / 06 / 06
성범죄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예술노동권 실현해야 / 정 윤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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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에 있었던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예술권리보장법은 끝내 안건에 상정되지 못했다.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이하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예술표현의 자유’와 ‘예술인의 직업적 권리 보호’를 법률로 규율한다. 예술인에 대한 권리 침해 행위를 방지하고, 성평등을 실현하는 예술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폐쇄적인 예술계 문화와 권리 구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에게 실효성 있는 피해 구제 방안을 최소한으로 보장하는 것을 입법 취지로 했다. 이 법은 표현의 자유(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성평등(예술계 성폭력 방지), 다른 직업과 동등한 노동 및 복지 처우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다룬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헌법 제정 7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천부적 인권에 준하며 예술의 존립 근거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천부적 인권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블랙리스트는 단순히 아트씬 내부 문제가 아니라 민주적 기본 질서를 부정하고, 평등의 원칙을 침해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준거로 작동할 가능성 있는 전방위적 사회 문제였다.
현 정권의 국정 과제 1호는 ‘블랙리스트 적폐 청산’이었다. 정부는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를 위해 문화체육관광부를 위시한 문화예술 기관의 제도 개선과 법 제·개정을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그 일환으로 예술인권리보장법은 헌법 제22조 제2항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에 근거를 두고 추진되었으나 20대 국회에서 여야 정쟁으로 폐기되었다. 2020년 6월 21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김영주 의원 등이 법안을 발의했지만 소관 상임위원회인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본회의 안건으로조차 오르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은 블랙리스트 사태나 예술계 미투 운동 등 권리 침해가 일어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고 삶을 구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현존하는 예술 관련 법은 장르 중심의 지원 근거와 체계를 마련하는 내용으로 집중되면서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 등을 보장하기 위한 법에는 공백이 생겼다. 일부 전문가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예술인복지법 개정은 예술인 권리 보장 사안을 복지 영역으로 국한하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예술인복지법을 근거로 제정된 불공정 관련 고충 처리를 위한 예술인 신문고 등의 제도 실효성 여부를 따지지 않더라도, 근본적으로 예술인의 존재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법은 기존의 법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21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정부와 법조계, 현장 예술인이 오랜 기간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원안이다. 그러나 법안 통과를 명목으로 지난 20대 국회 상임위원회가 임의로 수정해 법 제정의 취지와 목적을 훼손했다. 축소되거나 삭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술표현의 자유 등 권리 보장을 위한 권리 침해 사안을 조사·심의·의결하는 예술인 권리 구제 기구의 독립성과 위상이 축소되었다. 둘째, 예술활동과 전파 행위를 방해한 공직자·공공 기관·공공 업무 관련자에 대한 벌칙 조항이 삭제되었다. 셋째, 국가 기관 등 예술지원 기관 또는 예술사업자의 요구(예술활동 관련 계약 내용의 변경 등 계약 조건에 대한 협의 요청)를 특정 사안에 따라 불응할 수 있는 항목 등이 축소되었다. 넷째, 교육자의 우월적 지위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등 권리 침해 적용 대상의 확대가 삭제되었다.
블랙리스트와 미투 운동이 사회 이슈로 떠오른 이후에도 예술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위기를 겪으며 사회적 재난 위기관리 시스템 부재와 국가 주도 정책 전달 체계의 폐해, 불평등한 권력, 예술지원 시스템에 귀착된 예술계의 총체적인 문제로 인해 예술인은 또다시 고통 받고 있다. 가령 일부 지자체에서 시행된 감염 관리 명목 조치는 예술가를 감염 정책에 협력하는 시민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공중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다. 예술영역의 특수성은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예술행위를 규제하는 상황은 일종의 ‘검열’과 다르지 않다.
공공 기관은 여전히 예술검열을 지속하고 있다. 형식이 달라졌을 뿐 내용 면에서 블랙리스트 사태와 다르지 않다. 최근에도 한 공공 기관은 작가의 동의 없이 작품 속 문구를 삭제하고 전시 홍보 자료로 만들었다. 블랙리스트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사유로 전시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그림을 가리는 일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 혹은 무혐의 법적 처분을 받고 현장으로 속속들이 복귀하여 보란 듯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한다. 일종의 백래시처럼 ‘미투’가 정치적으로 변질했다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작품을 발표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권리 침해 사안이 발생했을 때 이를 진상 조사하고 책임 지우고, 처벌할 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공직자가 가해자인 경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국정 농단 주모자 김기춘, 조윤선조차 처벌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예술가가 공공 주도의 각종 프로젝트와 일자리에 참여하는 일이 일반화되면서 표현의 자유 침해뿐만 아니라 불공정 갑질, 노동권 침해, 성폭력, 저작권 등 예술인 권리 침해는 더욱더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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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시작한 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 캠페인에는 미술작가 안준형, 박신철, 배우 김선영, 문소리, 코미디언 김기리, 영화감독 남순아, 뮤지션 하헌진, 연극감독 강윤지, 이효린, 최샘이, 젊은 성악가들, 몸소리말조아라, 문화연대, 예술대학생 네트워크, 예술인소셜유니온, 우롱센텐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등이 참여했다.
시민 사회와 예술계는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실효성 있는 법안으로 제정될 수 있도록 지난 4년 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다. ‘예술인권리보장법제정을 촉구하는예술인모임’을 결성하고, 이 모임을 중심으로 토론회, 기자 회견 등을 진행해왔다. 국회 상임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의원실을 찾아가 법 제정을 호소하며 좌절감을 느낀 적도 많다. 예술인의 삶과 권리에 관심과 책임을 느끼는 위정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예술인에게 예술 관련 제도와 정책 결정에 참여할 실질적 권한은 없다. 사회 불평등을 몸소 겪고 있는 예술가인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며 예술인권리보장법에 관심 가져주기를 바란다. / 정 윤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