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박서보
박서보의 삶과 예술을 소설처럼 따라간 독특한 책이 나왔다. 저자는 그의 딸 박승숙이다. / 김재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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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인물과 사상사 2019
지난 6월호 특집의 주인공은 박서보였다. 그의 대규모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5. 18~9. 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를 계기로,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미술의 거장을 향한 편집부의 오마주였다. 하지만 기사를 준비하면서 뜻하지 않은 벽에 부딪혔다. 작가와 작품에 관한 비슷한 내용의 자료가 너무 많았다. 연희동 스튜디오 ‘기지’에서 작가와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도 나눴지만, 작가의 구술이 아닌 좀 더 색다른 알짜배기 소스가 필요했다. 그때, 원고 한 편을 받았다. 박서보 작가의 딸인 박승숙 씨가 집필한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의 출간 전 원고였다. 작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보다 더 생생하고 더 자세한 내용이 글에 담겨 있었다. 이런 걸 써도 되나 싶은 내밀한 사생활도 적혀 있었다. 6월 특집에서 담당 에디터가 공을 들였던 아카이브 꼭지 <박서보, 12개의 키워드>는 이 원고의 일부를 간추린 것이었다.
박승숙은 미술치료사로 20여 년을 활동했다. 홍익대와 동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미국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에서 미술치료를 공부했다. 전문가로서 저술 활동도 꾸준히 병행했다. 박서보의 <묘법> 작품을 표지 이미지로 사용한 《마음똑똑》(2014)을 비롯해, 미술을 통한 그룹치료 과정을 엮은 《세상에서 가장 용기있는 여행》(2003), 《영화로 배우는 미술치료》(2000) 등 주로 미술치료의 경험과 과정, 심리를 탐구하는 에세이였다. 예술가의 질병과 창작의 관계를 분석한 필립 샌드블롬의 《창조성과 고통》도 번역해 소개했다. 아버지의 인생을 풀어낸 신간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는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라는 원초적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그는 ‘독자가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생각하며 읽는 부담을 최대한 덜기’ 위해, 심리 치료사의 장기인 캐릭터 파악과 심리 분석을 통해 박서보라는 인물의 생애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기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동안 박서보를 다룬 책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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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박서보의 성산동 작업실 위층에서 함께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이외에 총 4부로 구성되었다. 박서보의 일대기를 따른다. 1부 ‘나를 찾아가다’는 어린 시절, 한국전쟁, 안국동의 이봉상회화연구소 이야기가 펼쳐진다. 2부 ‘기회를 잡다’는 부인과의 러브스토리, 파리국제청년작가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에 머물던 시절을 담았다. 3부 ‘나만의 것을 만들다’는 김창열 이우환 김환기 등 박서보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이 등장하고, 4부 ‘색을 발견하다’는 한지를 사용하고, 색을 도입하며 노년에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창작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박서보가 맨몸으로 돌파해 나간 한국 현대사의 험난했던 시간이 필자의 맛깔나는 글솜씨로 재탄생했다. 소설로도, 다큐멘터리를 위한 스크립트로도, 혹은 누군가 대신 쓴 회고록으로 읽어도 재미있다. ‘한 권의 무협지를 본 듯하다’는 온라인 서평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는 심리 에세이에 가깝다. 특히 저자의 고백이 담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내게 평생 상처만 준 것 같은 가장 가까운 존재를 어떻게 인정하고 이해할 것인지, 그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얻게 된 ‘치유’의 순간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주류에 맞서는 혁명가’, ‘거침없는 행동가’, ‘한국 현대미술의 리더’, ‘18시간씩 작업하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대작 작가’, ‘홍대 미대의 수장’ 등은 전쟁의 가난에서 지금의 한국으로 급성장하느라 어수선했던 이 사회가 허락하고 부추긴 아버지의 외관일 뿐이다. 그것을 한 꺼풀 벗기면, 거기에는 꼬마 재홍이 숨어 있다.” 그는 미술계를 호령한 아버지에게서 겁이 많은 어린 꼬마의 얼굴을 겹쳐 본다. 그 천진한 얼굴을 상상하는 일에서 글쓰기가 시작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