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감독들
<바람 맞으셨군요>(2024. 12. 21~1. 25)는 광고업계에서 20년, 많게는 40년 이상 종사한 광고 감독 5인의 시선을 좇는 프로젝트다. 그들이 만든 매혹적인 세계를 바깥에서 되돌아보고, 그 세계를 소재 삼아 만든 작품을 전시한다. ‘광고’라는 허구의 세계에서 제품을 연출해 온 이들이, ‘예술’이라는 또 다른 허구의 세계로 자리를 옮겨 자기를 탐구하고 작품을 연출한다. 광고와 미술은 가상으로 시청자를 매혹하고 쾌락을 준다는 점에서 동일하나, 의도와 목적지가 다르다. 광고는 제품의 사용에서 발생하는 삶의 변화를 환상으로 심어주지만, 본질적으로 삶 자체보다 제품 판촉에 방점을 둔다. 반면 예술은 삶의 단면이나 내면을 상상으로 재구성해 이미지나 형태를 만들고, 만들어진 작품으로 우리 삶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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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맞으셨군요>전 전경 2024
강한영은 1세대 광고 감독으로서 영상을 아날로그적으로 연출하면서도 매혹적인 제품 이미지를 구현했다. 전시에는 과거 연출한 광고에서 제품 이미지를 덜어내고, 광고 모델의 초상을 무빙 이미지로 선보였다. 10배속 느리게 편집된 무빙 이미지는 그 옛날 텔레비전 광고로 보여주던 영상을 쿨하게, 때로는 숭고한 이미지로 보이게 만든다.
김종원은 광고 감독 시절과 광고 제작 과정을 바깥에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작업해 작품으로 옮겼다. <동상이몽>은 생생한 촬영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필름 카메라 앞의 프로젝션과 감독 모니터 영상의 불일치는 감독의 시간과 촬영 현장의 이면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쇼릴>은 디지털 필름으로 촬영한 광고 이미지 수천 장을 스크린 삼아, 과거에 촬영한 광고 영상을 겹쳐서 보여준다. 스펙터클하면서도 간결한 메시지를 전하는 감독의 취향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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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 <對峙(대치)> 스텐백 편집기, 35mm 디지털 필름, 단채널 비디오 127×120×81cm 2024
문생은 광고 감독 은퇴 후 주 무대를 애니메이션과 페인팅으로 선택했다. 무대 같은 애니메이션 배경에 무겁게 나는 새나 꾸물거리며 날뛰는 개미, 목각 인형 마리오네트 등을 등장시킨다. 무대의 바깥, 즉 만화 배경의 바깥을 향해 나아가려는 작가의 욕망을 담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과거 광고 역시 굉장히 초현실적이어서, 그 옆에 나란히 놓인 회화작품과도 연결도힌다는 점이다.
이지송은 광고 감독에서 영상작가로 활동한 지 어언 10년이다. 스스로 ‘광고의 때’를 벗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대다수 이러한 수행의 흔적이자 기록이다. <런드리 데칼코마니>는 형형색색 세탁기 속에서 돌아가는 빨래를, 움직이는 만다라로 형상화한다. 또 다른 작품에는 그가 여행하며 마주했던 빈집과 빈집의 틈을 채우는 광고가 함께 재생된다. 이 광고는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물질적 꿈과 욕망이 교차하는 모습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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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생 <하벤 F> 캔버스에 유채, 40.9×53cm 2024
채은석은 “‘엘라스틴’ 했어요”의 광고 감독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 평소 기록한 글을 사진으로 보관해 둔 메모 300여 장을 나열했다. “만졌으나 닿지 않았다”거나, “어린나무는 해를 보며 자라고, 어른 나무는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자란다” 등과 같은 글귀와 이 글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평면 작품을 보면 그가 그 시절 어떻게 광고 이미지를 만들어왔는지 엿볼 수 있다.
광고나 미술이나 둘 다 새로움이라는 맥락에서 작업하지만, 하나는 작업의 대상이 제품이고 다른 하나는 작업하는 인간이 주체가 된다. ‘상품의 사제’에서 ‘자아의 단독자’로의 자리 이동은 모험이며 지난한 선택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짧게는 5년, 길게는 40년 전의 광고와 이를 자전적인 예술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이 교차하면서, 이미지가 난무하는 시대에 이미지의 목적과 순환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생 후반기에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낯선 세계로 진입하기란 쉽지 않은 법. 그렇기에 ‘젊은 보수주의자’가 대세인 세상에서 ‘나이 든 혁신주의자’란 귀하고 감동적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미술이 그간 익숙했던 광고와는 다를 수 있지만, 광고의 홍수에 사는 현시점에 광고 감독이 미술에 바람나는 일은 왠지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