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 돌아왔다
전시공간 기획의 <정신과 시간의 만화방>은 국내외 실험만화를 소개하며 오늘날 ‘독립만화 씬’의 구조를 살핀다.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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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시간의 만화방>전 전경 2019 전시공간_운영자이자 작가 김용관은 전시를 위해 가구를 직접 만들었다. 알록달록 페인트로 칠한 B자 모양 테이블은 모듈 형태로 제작되어 여러 방식으로 재조립할 수 있다.
만화 《드래곤볼》에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등장한다. 새하얀 빛이 가득하고 무한대로 펼쳐진 이곳에 들어갔다 나온 만화 속 인물은 극강의 캐릭터로 변모한다. 지구보다 365배 느린 시공간에서 하루 만에 무려 1년 치 수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박상아와 김용관이 서교동에 공동운영하는 전시공간(全時空間)은 정신과 시간의 방을 패러디한 <정신과 시간의 만화방-2호점 SIDE B>(7. 19~8. 11)전을 열었다.
전시공간이 국내외 출판·실험·독립만화를 소개하는 연례 전시 프로젝트 <정신과 시간의 만화방>은 만화적 상상력을 빌려, 전시장을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오랜 시간 만화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가상의 만화방으로 설정한다. 대학 시절 만화가를 꿈꿨지만 현대미술 작가가 된 김용관이 독립만화에 대한 애정을 담아 기획했다. 지난해 8월 만화 창작 모임 ‘쾅’과 비정기 만화잡지 《쾅 코믹스》를 초대해 1호점을 열었고, 올해는 독립만화 온라인 플랫폼 ‘사이드 비(SIDE B)’와 협력했다. SIDE B가 유통하는 만화가 23명(팀)의 독립만화 33권과 매거진, 리뷰 북, 굿즈를 소개하며 전시기간중 총 8회의 아티스트 토크를 진행한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책은 모두 SIDE B 웹사이트에서 판매 중인 상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제작 유통 소비, 비평과 2차 생산물까지 아우르는 전시 구성으로 오늘날 ‘독립만화 씬’의 전체 구조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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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벼리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 장면
2019년 4월 출범한 SIDE B는 만화가 성인수와 이안, 만화평론가 이재민이 공동 운영한다. 카세트테이프의 앞면(Side A)에 실린 타이틀곡에 비해서 덜 주목받은 뒷면(Side B)에 숨은 명곡을 찾아내듯, 직접 발로 뛰어 작품을 발굴하고 독자에게 소개하려 한다. 만화와 함께 리뷰를 게재하는 전략으로 짧은 활동 기간에도 두각을 드러냈다. 작품 입고의 결정 기준은 실험적 형식과 도발적 내용. 이재민은 “흥미 위주로 생산되어 ‘짤방’처럼 일회적으로 소비되고 사라지는 웹툰에 비해 독립만화의 차별적 요소는 사회적 이슈와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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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안티피터팬》장면
전시에는 만화의 분할 프레임을 형식적으로 실험한 작품이 눈에 띈다. 만화가 굄의 자전적 작품 《있잖아, 나》는 클로짓 퀴어(Closet Queer)였던 주인공이 커밍아웃 이후 겪은 일상과 심리의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황벼리의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는 사춘기 시절 왕따를 향한 가해, 피해 방관의 경험을 되새기며 공감을 자아낸다. 프레임을 구분하지 않는 편집과 독백으로 흐르는 전개 방식은 1980년대 미국 상투적 코믹북의 대안으로 등장한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장르를 연상케 한다. 반면 이안의 《안티피터팬》은 전형적인 만화 프레임을 고수하지만, 단일한 회색 지면에 밝은 오렌지 톤을 입혀 생동감을 더한다. 작가는 “독립만화는 독립출판과 만화라는 카테고리가 겹쳐 만들어진 독특한 영역이다. 전시를 통해 독립출판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한 이곳의 생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정신과 시간의 방>의 출품작 대부분은 텀블벅과 같은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제도와 시장 논리 내에서 생산 유통되는 만화에 비해 작가가 자신만의 시각과 태도를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는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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굄 《있잖아, 나》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