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려행’을 꿈꾸며
8월 8일 개봉한 임흥순의 영화 <려행>은 탈북 여성 10명의 삶을 조명하면서 북한으로의 여행을 상상한다. / 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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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순 <려행> 포스터
미디어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 임흥순은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 담론에서 소외된 이들의 서사를 영상으로 담아 왔다. 공장의 여성 노동자 문제를 다룬 <위로공단>(2014/2015)부터 할머니를 주인공 삼아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4.3사건의 상처를 기록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7)까지, 남성 중심적 구조에서 벗어나 여성의 관점으로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특히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정치적 정서적으로 가장 먼 나라인 북한은 작가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 온 대상이다. 2015년에는 김근태재단의 추모전을 계기로 탈북 가수 김복주를 만나 영상작품 <북한산>을 제작했다. 한복을 입고 북한산 원효봉에 올라 노래 <임진강>을 부르는 김복주의 모습에는 고향과 부모님을 향한 애잔한 심경이 생생히 담겼다.
지난 8월 8일 공식 개봉한 영화 <려행>은 <북한산>의 주제를 확장한 러닝타임 86분짜리 다큐멘터리다. ‘려행’은 ‘여행’의 북한식 발음으로 상상으로나마 북한을 여행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작가는 “우리는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영화를 만들면서 북한을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알다시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북한을 여행할 수 없는데, 이런 현실을 <려행>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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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행> 다큐멘터리 86분 2016/2019_영화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10명의 북한 이탈 주민 인터뷰와 그들의 퍼포먼스, 남북 현실을 상징하는 픽션화된 장면 등으로 이루어졌다.
<려행>은 2016년 제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아 안양의 삼성산과 안양천, 예술공원 일대를 무대로 펼쳐진다. <북한산>에도 출연하며 영화의 막을 올리는 김복주를 포함해 강유진 김경주 김광옥 김미경 양수혜 이설미 이윤서 이향 한영란 등 총 10명의 북한 이탈 주민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주부 대학생 디자이너 등의 역할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북한의 체제를 고발하는 매개로 소비되지 않고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한 경험을 공유하는 개인으로서 그들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들려준다. 각자의 사연을 직접 서술하는 인터뷰 영상, 남북 현실의 긴장감을 시적인 이미지로 압축한 연출 장면, 출연진이 다 함께 모여 대화하고 노래하는 퍼포먼스는 이들의 여정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 작품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인터뷰이들의 말이다. 어떤 형식의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처음부터 정한 건 없었다.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생긴다. 그때마다 장면들을 스케치해 놓고 나중에 영화로 만든다. 파편적인 느낌을 주려고 했다. 기존의 서사 방식이나 앞에 나온 이야기와 맞지 않더라도 굳이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2018년 정상회담 이후 통일에 대한 관심이 또 다시 시들어지고 있는 요즘, <려행>은 분단과 삶이 밀착된 이들의 목소리로 고향에 갈 수 없는 아픔과 그럼에도 ‘여행’ 이후의 일상을 지속해서 꾸려나가는 힘을 보여 준다. 남북 이데올로기 대립을 넘어 “가족이 함께 모여서 같이 식사할 수 있는 날,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날, 그런 게 저희한테는 통일이라고 생각”(이설미)한다는 염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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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행> 다큐멘터리 86분 201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