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맞서 연대하는
2019 / 10 / 17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전은 일상에 스며든 폭력을 인지하고 연대로 나아가길 희망한다. / 이 문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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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땀 흘리며 달려간다> 천에 수성 페인트, 아크릴릭 과슈 165×300cm 2019
요금문(曜金門)은 창덕궁 담장의 서북쪽에 있는 궁문이다. 요금문은 궁녀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이었고, 그 밖에는 군사시설인 북영(北營)이 위치했다. 요금문이 비스듬히 바라보이는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전시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8. 23~10. 26 인사미술공간)은 폭력을 다룬다. “전시는 폭력을 다룬다”고 기획자 정희영은 전시서문 두 번째 문장을 별다른 수사 없이 단정하게 썼다. 이 문장을 뒤로하고 들어선 전시장 안쪽의 풍경이 그다지 지옥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관객들은 놀랄 수 있다. 전시장은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폭력의 인상으로 낭자하지 않다. 그렇기에 보는 이들 중에는 이 전시가 폭력을 복화술 하듯 다루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기획자가 의도한 바이다. 기획자는 작가들로부터 폭력을 구한 것이 아니라, ‘폭력에 반응하는 조건’을 구했다. 그렇기에 정희영은 네 작가의 작업 이미지 안에서 한 작가가 부정적인 힘의 과잉(폭력)을 경험하고 이에 반응한 이유와 그 결과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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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록 <라그랑주 포인트> 싱글채널 비디오 35분 2019
전시장에 들어서면, 김지영과 이우성의 작업이 마주하며, 폭력의 시점(視點)을 달리함을 볼 수 있다. 김지영의 작업은 작가 자신이 방기와 모욕으로 점철된 세월호 사건을 마주하고, 자신의 반응을 누적해 가며 누적된 방향이 사건을 응시하는 자신의 태도임을 정리한다. 이우성의 작업은 폭력을 앞에 둔 이들의 반응을 무리의 수에 따라 달리 표현하면서도, 폭력이 과업이 된 시대의 감정선을 미세하게 처리했다.
한 층 내려가면 김무영과 이의록의 영상작업이 서로 등을 기대며 힘의 영도(zero point)가 없는 세계를 비춘다. 김무영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자유센터와 반공 영화를 두 축으로 재현의 조건에 늘 힘의 논리가 자리했음을 내비치며, 재현 전후의 세계란 모두 과잉된 힘의 기승전결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이의록은 세계의 기본값이 이미 힘(중력)이 존재하는 상태라는 것에 착안하여,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라그랑주 포인트를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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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닫힌 창 너머의 바람> 책 21×13cm 2017~18
다시 두 층을 올라가면 작업의 준거점이나 결괏값들이 여럿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잘려 나간 사진의 공백에서 부조리한 상상력이 웅거할 수 있음을 슬라이드로 증험한 이의록, 자신을 포함해 사람들이 임계점을 넘긴 표정을 지을 때를 묘사한 이우성, 기록물로 남은 극우파 인사의 단언을 채집하고 기록을 둘러싼 원심력을 드러내는 김무영, ‘인용’이란 방식을 통해 기억의 정치를 재구성하는 김지영은 모두 힘의 과잉을 평면 위에 어떻게 안착시킬지 고민한다. 대체로 슬라이드와 기록물, 규모가 작은 회화와 사진 그리고 짧은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폭력이라는 힘의 과잉을 마주하며 생산된 아카이브라는 인상을 준다. 농도에 차이는 있지만, 전시장에는 폭력의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폭력에 대한 14점의 리트머스 종이들이 놓여 있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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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영 <각인된 감각들> 싱글채널 비디오 30분 2019_전시제목은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 중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복서에게는 사각을 뜻한다.”에서 차용했다. 작가 김무영 김지영 이우성 이의록이 참여했다.
폭력이 삶의 조건과도 같았던 궁녀들은 간택되러 들어와 물 길으러 나갈 때 요금문을 드나들었다. 김무영은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힘을 재현하는 일의 저작권을 향해 들어가고, 김지영은 폭력을 독해할 때의 거리감과 방향성 두 가지를 찾아 나서며, 이우성은 어떤 사건을 마주하는 이들의 수에 따라 다른 감정선이 도출된다는 점을 발견하며 이들을 앞세우고, 이의록은 힘으로 느끼지도 못하는 세상의 조건을 연구하며 다시 힘에 대한 이해를 향해 들어간다. 네 사람은 정희영이 묻는 ‘폭력에 반응하는 조건’에 답하며 링(동그라미)에서 링(사각)으로 드나든다. 요금문 밖에는 국가 폭력을 관리하는 북영이 있었고, 링 밖에는 기획자와 작가가 감당하고 있는 폭력이 여전하다. 그렇다면 정희영이 말하는 ‘링’은 바깥의 폭력을 감내하는 조건들의 연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