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시대, 현대미술은 어디로?
2020 / 01 / 09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https://fifth.uralbiennale.ru/en/)는 러시아 연방의 현대미술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국제적인 예술 프로젝트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센터 주도로 출범해 현재까지 예카테린부르크를 중심으로 개최되고 있다. 풍부한 광물 자원을 기반으로 성장한 도시의 산업적 역사적 유산을 동시대의 관점에서 되돌아보고, 현대미술을 통해 지역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5회째를 맞은 올해 비엔날레는 9월 12일부터 12월 1일까지 옛 공장 건물이었던 ‘우랄 광학 및 기계 플랜트’에서 열렸다. 행사를 이끈 주역은 중국의 젊은 큐레이터 샤오유 웽. ‘불멸’을 주제로 25개국 76명(팀)의 작가가 본전시에 참여하고 현지 미술기관 10곳과 협업한 특별 프로젝트, 10개 도시에서 운영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으로 우랄 전역에 미술 축제를 벌였다. 푸틴의 장기 집권으로 표현의 자유가 심각한 위협을 받는 러시아에서 현대미술 비엔날레는 어떤 모습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을까? / 박 재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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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차이더 <Moscow Summer Olympic Games 1980>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90×90cm(부분) 2012~14_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의 인프라를 현재의 시선으로 포착했다. Courtesy the Artist
2009년 설립된 비엔날레 재단이 제공하는 전 세계 비엔날레 목록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에는 250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운영 중이다. 비록 이 목록은 한 번만 열리고 소식이 묘연한 남극비엔날레(2017~)나 5년에 한 번 열리는 카셀 도큐멘타와 같은 행사도 포함하고 있지만, 대략적으로만 계산하더라도 전 세계에서 사흘에 두 개꼴로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베니스부터 광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비엔날레는 ‘예외적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자원을 통해 ‘모든 것’이 되고픈 욕구를 애써 억누르거나 조절에 실패하는 모습을 반복하는 듯하다. 때로는 예외적으로 주어진 자원과 인력이 덫이 되어 비엔날레를 사로잡는 것 같기도 하다. 예컨대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길(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이라는 흥미로운 표제 아래 이도 저도 아닌 전시를 선보인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혹은 많은 관객에게 ‘전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전시로 여겨졌던 지난 광주비엔날레를 생각해 보라.
이른바 문화 정책, 문화 외교를 통해 지역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전 세계 곳곳의 도시와 지역 자치단체들에게 비엔날레는 일종의 마법 열쇠와 같아 뵌다. 국내의 경우만 해도,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출범한 강원비엔날레(2018~),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를 오가며 진행 중인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2005~), 광주 및 부산과의 차별점으로 사진 매체에 집중한 대구사진비엔날레(2006~), 제주의 관광도시적 국제성에 걸맞은 미술행사를 꿈꾸며 시작된 제주비엔날레(2017~)를 비롯해 15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치러지고 있다(어쩌면 대한민국은 인구 및 면적 대비 ‘비엔날레’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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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시스킨-호쿠사이 <The New Versailles>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6
지역의 새로운 정체성, 미술로 모색하기
올해로 제5회, 즉 10년째를 맞이하는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 (Ural Industrial Biennial, 2010~)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 세계에 범람하는 비엔날레 가운데 5회를 맞이한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는 이른바 ‘중견급’ 비엔날레라 할 만하다. 이 비엔날레는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불확실한 경제적 상황에 놓인 러시아 중부의 우랄 지역을 탈산업 단계에 접어든 유럽과 여전히 산업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아시아의 중간적 연결점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 경제 상황과 사회적 현실이 전 지구적 맥락에서도 중요성을 띤다는 개념 틀을 마련하며 시작되었다.
한편,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가 진행된 10여 년은 또한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의 시대와도 시간적 궤를 같이한다. 푸틴은 2000년대를 통틀어 두 번의 임기를 대통령으로 지냈고, 2008년부터 지금까지는 세 번의 임기를 지낼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대신 스스로를 총리로 임명해 사실상 러시아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다. 2012년 러시아 대선 직전 모스크바에서 푸틴에 반대하는 즉석 공연을 펼친 록밴드 ‘푸시 라이엇(Pussy Riot)’이 징역 3년을 구형받은 사실에서 볼 수 있듯, 러시아에서 표현의 자유는 점차 더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비엔날레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비엔날레(2007~)는 2017년 이후 표류 중이다. 비엔날레 재단 대표인 율리아 무지칸츠카야(Julia Muzikantskaya)가 참여작가와 테크니션들에게 경제적 심리적으로 위해를 가했다는 공개 성명서가 올해 10월 제8회 모스크바비엔날레 오프닝을 앞둔 시점에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가 열리는 중심 지역인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는 옆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러시아의 좌측 삼분의 일 지점 가량에 위치한 공업도시다. 실제 지리적 위치와 관계없이 ‘러시아 중부’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이른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여겨지는 우랄산맥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18세기 말부터 ‘아시아의 창’으로 불리는 동시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지나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예카테린부르크는 또한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도시이자 러시아에서 현대미술 활동이 일어나는 네 개의 대표적 도시(모스크바 예카테린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디보스토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예카테린부르크는 19, 20세기에 걸쳐 우랄 지역의 풍부한 광물 자원 등으로 공업도시인 동시에 군수도시로 자리 잡았고, 소비에트 시기에는 경제 활동의 90%가 산업 활동이었을 만큼 산업 활동 위주로 운영되었다. 오늘날 예카테린부르크에서는 여전히 활발한 경제 활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회 구조와 전 지구적 경제 상황 변화로 경제 활동의 구성을 보다 다양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런 점에서 예카테린부르크는 카셀과 닮은 면이 있고,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의 새로운 분관이 자리를 튼 청주와 비슷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카셀의 경우처럼 양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비엔날레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 경제 구조에서 비롯한 문화적 건축적 유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점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우랄’이라는 지역성과 ‘인더스트리얼’이라는 맥락을 비엔날레의 명칭에서부터 명확히 한 덕분에, 지난 10여 년간 치러진 비엔날레는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코스민 코스티나스(Cosmin Costinas), 데이비드 리프(David Riff), 예카테리나 데곳(Ekaterina Degot)이 기획하고 옛 인쇄 공장을 주 전시장으로 삼았던 제1회 ‘모바일 이미지의 노동 영웅’부터 주앙 리바스(Joâo Ribas)가 기획하고 예카테린부르크 시내 14곳의 공장에서 4차 산업시대의 ‘새로운 문해력’을 주제로 치러진 제4회에 이르기까지,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는 소비에트 시대의 산업 유산이 지역 곳곳에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예카테린부르크의 맥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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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코너 <CROSSROADS> 싱글채널 비디오 1976 digitally restored by UCLA Film & Television Archive, 2013 Courtesy Kohn Gallery and the Conner Family Trust
다섯 번째를 맞이하는 비엔날레의 주제는 ‘불멸(Immortality)’ 이었다. ‘다중의 미래를 위해(For a Multitude of Futures)’를 부제로 삼은 이번 비엔날레는 육휘(Yuk Hui)의 기술에 대한 우주론적 논의를 참조점 삼았고, 이를 통해 기계과 기술을 통한 불멸이라는 꿈에 매몰된 상상에 대해 보다 비서구적인 시야를 제시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인간과 외부 환경, 기술에 대해 영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제의적 비선형적 방식을 드러내는 작업을 전시 전반에 걸쳐 배치하였고, 개별 작품이 제시하는 내용적 방향이나 시각적 특징을 기착지 삼아 이것이 서로 교차하는 관람의 경로를 만들어 냈다. 큐레이터 샤오유 웽(Xiaoyu Weng)이 제안한 “주요 등장인물(protagonist)”과 “연안의 경계선(shoreline)”은 다음과 같았다: 불, 폭력과 버섯구름, 나비와 미술관, 시간, 죽지 않는 존재, 노동과 지루함, 거울과 명징한 거울, 해파리, 기억과 회상, 잊힌 솜씨와 지식, 변태하는 삶들.
비엔날레 본전시의 기획을 맡은 샤오유 웽은 상하이 태생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와티스 인스티튜트와 KADIST 재단의 아시아 프로그램 디렉터를 역임한 뒤 로버트 N. H. 호 재단의 후원으로 구겐하임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며 <우리 시대의 이야기(Tales of Our Time)>(2016~17) <한 손으로 손뼉치기(One Hand Clapping)>(2018)를 기획했다.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 설립 초반부터 커미셔너를 맡으며 줄곧 비엔날레를 이끌고 있는 알리사 푸르드니코바(Alisa Prudnikova)를 필두로 한 국제 선정 위원회가 국제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동양인 여성 큐레이터를 본전시 큐레이터로 선정한 것은 다분히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의 정체성을 감안한 결정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진행된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의 모든 장소는 실제로 가동 중인 산업 시설을 포함해 왔고, 비엔날레와 함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작가들이 우랄 지역의 산업 유산뿐 아니라 현재적 모습을 직접 경험하게 했다.
공장과 함께 가동되는 전시
올해 비엔날레는 ‘우랄 광학 및 기계 플랜트(The Ural Optical and Mechanical Plant)’를 주 전시장으로 삼았다. 현재 가동 중인 공장 부지 한편에 방치되어 있던 옛 공장 건물을 활용해 공장의 2층과 4층을, 레지던시 작가를 위한 공간과 주 전시공간으로 썼다. 건물의 크기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으로 개축을 거친 옛 연초제조창과 비슷했고, 전시공간으로 쓰인 4층은 광학 장치 제작소로 활용된 공간을 활용했다. 전시를 만들기 위해 공간을 적극적으로 ‘화이트큐브화’하는 대신, 전시 진행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시설(전기와 조명) 재건과 청소만 이뤄진 인상이었다. 시 외곽의 공장 외에도 오랫동안 비어 있던 시내의 옛 공산당 극장에서도 위성 전시를 진행했고, 비엔날레가 진행되어 온 기본적 틀에 따라 예카테리나부르크 시내의 여러 미술공간이 연계 프로그램의 형식으로 전시와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주 전시장의 경우 실제로 운영 중인 공장 부지에 들어가야만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반적 전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군복과 유사한 제복을 입은 보안 요원들이 신분증을 검사한 뒤 개인정보를 손으로 직접 기록하는 장부에 이름을 올리고서야 전시를 보러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레스 프리뷰 기간 중 열린 기자회견 역시 비엔날레 주최 측의 참여 신청 등록 확인 외에 별도의 신분증 검사를 거쳐야 입장할 수 있었다. 가동 중인 공장 부지에 들어가는 만큼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고 실제로는 형식적인 과정에 가까웠으나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경험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번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에는 25개의 지역 및 국가에서 총 76명의 작가와 콜렉티브가 참여했다. 우랄 지역의 10개 도시를 무대로 진행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는 7개국에서 온 10명의 작가가 참여했고, 예카테린부르크와 우랄 지역의 미술기관들이 참여하는 특별 프로젝트에서는 10개 기관이 개별적으로 전시를 개최했다.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의 하이라이트는 큐레이터의 비전을 중심으로 구성된 본전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엔날레 본전시에 매 비엔날레와 함께 진행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전시, ‘지식 플랫폼’ 및 현지 미술기관의 특별 프로젝트를 겹쳐 보자면 예카테린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우랄 지역 전역에서 벌어지는 현대미술관 담론의 축제라는 그림이 그려진다.
비엔날레를 위해 새롭게 제작이 이뤄진 커미션 프로젝트의 수가 20개 이상에 달하는 가운데, 참여작가 삼분의 일 가량은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작가로 선정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를 향해 기차로만 24시간 이상 이동해야 하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리적 특성상 운송과 설치에 이르는 실무적 부분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큐레이토리얼한 측면에서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의 미션에 충실한 작업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즉, 러시아 안에서 이뤄지는 미술 활동과 국제 미술계에서 발생하는 작업 활동의 좌표를 겹치는 것이다. 이것은 비엔날레를 통해 선보이는 작가와 작업들을 마냥 국제적인 미술의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제시하거나, 현지 작가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과는 다른 제스처다. 실제로 가동 중인 공장 부지에 자리한 건물에서 전시가 진행된다는 점은 여기에 고유한 장소성을 더한다(제3회 비엔날레에서는 ‘KGB 요원의 마을’로 불렸던 호텔을 전시장으로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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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포제넨스케 <사각튜브 연작 DW> 골판지, 흰색 플라스틱 스크류 가변크기 1967_환기구 형태의 골판지 4개를 기본 구조 삼아 관객이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다.
‘불멸’의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다
샬롯 포제넨스케(Charlotte Posenenske, 1930~85)의 작품 <사각튜브 연작 DW(Vierkantrohre Serie DW)>(1967~)을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가 미션으로 삼고 있는 ‘좌표 포개기’의 일례로 보아도 좋겠다. 산업시설의 배기관 부품 형태를 차용해 조각적 구성 요소로 삼고 있는 이 미니멀리스트 조각작업은 골판지로 만든 30여 개의 유닛으로 이뤄졌다. 1967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일상과 산업 현장에 존재하는 구조물로 만든 이 작업은 오랫동안 미술계에 소개되지 못했다. 미술의 한계에 불충분함을 느낀 작가는 법과 사회학을 공부해 노조 활동에 매진했고, 작고하기 직전에야 제 작업이 미술의 맥락에서 보여도 좋다는 유지를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디아비콘미술관 등 옛 산업시설을 화이트큐브로 바꾼 곳에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작업이 원래 있어 마땅한 산업 현장에 놓인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었다.
예제브 태생으로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리아 사프로노바 (Maria Safronova, 1979~)의 <the Office> 연작에 속하는 회화 <Panic>(2016)은 화면에 등장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취하는 어느 사무실의 모습을 묘사한다. 책상에 하나씩 있는 컴퓨터 화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분자 구조를 연상케 하는 기호가 떠 있다. 기술과 삶, 일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지금, <Panic>이 묘사하는 상황은 모든 사무직 종사자의 궁극적 악몽과 다름이 없다. 반쯤 무너져 있다고 해도 섭섭지 않을 거대한 옛 광학 공장의 4층까지 덜컹거리는 4인용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층고가 상당히 높고 좁은 계단실을 통해 걸어 올라간 뒤, 전시장의 가운데쯤에서 페인트가 조금씩 벗겨져 나가는 벽에 걸린 <Panic>을 보게 되는 상황은 꽤 역설적이다.
체르노빌 재난을 명백히 염두에 두고 작업한 사프로노바의 연작 <Classroom>(2019)은 특정 장소를 위한 회화라 할 만하다. 전형적인 소비에트의 학교 시설을 묘사하는 이 연작에 등장하는 여러 공간은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낡아 가는 모습을 보인다. 작품이 걸린 옛 공장의 상태와 거의 유사한 모습인데, 인간이 등장하지 않은 이 연작의 작품 속에서는 ‘교보재’들—분자 구조나 동물의 골격을 묘사하는 모형 등이 무대를 차지한다. <Classroom> 연작은 <Panic>과 더불어 인간이 아닌 사물이 상황을 주도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사회 구조나 믿음의 체계가 지닌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불멸’이라는 관점에서는 인간 위주의 사고가 지닌 유한함을 회화라는 오래된 예술 형식으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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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사프로노바 <the Office-Panic> 캔버스에 유채, 보드 97×142cm 2016 Courtesy the Artist
이번 비엔날레의 유일한 한국인 참여작가인 정금형(1980~)은 비엔날레가 벌어지는 공장을 작업실 삼아 머무르며 <Small Upgrade>(2019)를 제작했다. 작가의 기존 작업에 ‘작은 업그레이드’를 가한 이 작업은 인간의 신체 기관을 모사한 마네킹 부품과 각종 롤러, 유압 부품이 나름의 규칙에 따라 거대한 테이블 위에 배열된 형태로 제시되었다. 마치 조립과 해체 과정의 중간쯤에 놓인 의사(擬似) 휴머노이드 공방인 것처럼 보이는 작업은 <Homemade RC Toy Small Upgrade F2019>라는 이름을 붙인 로보틱 조각, 작가 스스로 작업의 해체와 조립을 위한 안내 및 기록 영상으로 만든 <Upgrade Guide F2019>, 작업에 들어간 모든 부품을 늘어놓은 <Materials> 등으로 이루어졌다. 한때 의료와 군사용 광학 장치를 생산하던 공간에서 제작된 ‘홈메이드’ 신체는 어떤 면에서는 작가의 동료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뤄질 퍼포먼스에서 작가와 함께 무대에 등장하게 될 바퀴 달린 머리와 몸은 인간과 사물을 주체와 객체로 보는 낡은 구분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이미 샬롯 포제넨스케의 작업을 언급하였지만, 이번 비엔날레는 작고한 작가들의 작업과 생존작가들의 옛 작업을 중요한 무게추로 활용했다. 예컨대 사하라 이남의 민속 조각품들이 어떻게 박물관 제도에 통합되며 ‘죽은 역사’의 일부가 되는지를 그린 크리스 마르케와 알랭 레네(Chris Marker & Alain Resnais, 1921~2012 & 1922~2014)의 1954년 작업 <조각상도 죽는다>를 통해 문화적 기억과 죽음, 불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브루스 코너(Bruce Conner, 1933~2008)의 <CROSSROADS>(1976)는 1950년대 미군이 비키니섬에서 핵실험을 진행하고 기밀로 묶어 두었던 영상기록에 몽롱한 앰비언트 음악을 입힌 영상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한참 전에 만들어진 이 영상을 2019년에 관람하고 있자면 기술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 불멸을 이루고자 할 때 벌어질 일을 사뭇 무심하게 예견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1957~1996)의 <무제 (복수)>(1991)는 전시가 이루어질 때마다 새로운 삶을 얻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덕분에 창작자의 죽음 이후 독자적인 삶을 이어나가며 불멸에 이른 작품으로 제시된다. 러시아의 엄혹한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자면 지나치게 낭만적인 접근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본전시 동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 1948~)의 <Adrian Moves to Berlin>(2007~)에는 9·11 테러 이후 점차 우경화되어 가는 미국을 떠나 (난민 이주와 젠트리피케이션이 문제로 떠오르기 전의) 베를린으로 이주한 노년의 작가가 등장한다. ‘베를린 노동자 단결의 음악’인 전자음악에 맞추어 도심의 광장에서 한 시간 넘게 춤추는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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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형 <Small Upgrade> 의학용 마네킹, 영상 외 혼합재 료 가변크기 2019 Courtesy the Artist and Sifang Art Museum, Nanjing, Photo by Zoom Zoom Family
현대미술의 자리를 찾아서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의 프레스 프리뷰는 마냥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기자회견이 열린 프레스 프리뷰 첫날 오후에도 여전히 작품을 설치했고, 프레스 투어 중에는 아직 장비 세팅이 마무리되지 않아 전원이 꺼진 모니터를 두고 작품 설명이 이뤄졌고, 심지어 전원이 꺼져 아직 보지 못한 작품의 내용에 대해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작품 캡션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 “캡션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거나, 조각작품이 운송용 보호재에 싸여 제 자리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풍경은 규모가 큰 현대미술 비엔날레가 단지 예술적 의지나 비전만으로 실현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결국 비엔날레를 개최한다는 것은 미술전시를 위한 기반, 즉 현대미술의 맥락을 이해하는 인력 풀에서부터 작품 운송과 설치를 진행할 전문가, 영상과 음향 장비를 담당할 테크니션 등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울 광주 부산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엔날레가 개최될 때마다 수많은 미디어 작업을 위한 영상과 음향 장비 수급을 위해 작은 경쟁이 벌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가 올해로 10년째를 맞이하였지만 2년에 한 번 열리는 대규모 전시를 통해 현대미술이 잘 보일 수 있는 지역적 기반을 닦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것 같다. 다만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의 커미셔너인 알리사 푸르드니코바가 10년 동안 같은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점은 비엔날레의 지속성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보인다.
푸틴의 장기 집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이 별다른 제재 없이 지속되는 가운데, 대체로 비판적 사고와 시선을 내재한 현대미술의 장이라 할 수 있는 비엔날레의 자리는 무엇일까? 우랄인더스트리얼비엔날레 프리뷰 기간에도 푸틴에 반대하는 야당 지도부에 대한 갑작스러운 체포와 구금이 러시아 전역의 도시에서 벌어졌다. 우랄 지역의 산업 유산과 장소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지난 비엔날레에 비해 보다 우주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 ‘불멸’은 어쩌면 당장 눈앞에 놓인 엄혹한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뤄진 것일지도 모른다.
프레스 프리뷰에서 만난 한 러시아 미술 블로거는 전시 관람을 위해 10시간에 걸쳐 기차를 타고 예카테린부르크까지 왔지만 이번 전시에 “동의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황급히 자리를 뜨기도 했다. 군수 공장으로 쓰인 장소에서 신분증 검사를 받아 가며 전시를 보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현대미술과 맞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도 기차로 10시간이 걸리는 소도시에서 활동하는 그에게 현대미술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러시아에서) 현대미술은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